한국학 칼럼
고문헌 속에서 찾은 새로운 이야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어쩌면 옛 것에, 그것도 아주 오래된 문헌 속에 있을지 모른다.
   선조들이 한 자 한 자 기록한 일기 등 고문헌에는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이 될 서사가 숨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016년 주최한 창작 콘텐츠 공모전의 대상 수상작 ‘헬조선: 노비신분사기극’은 1862년 단성민란을 일으킨 단계(端磎) 김인섭(1827~1903)의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김인섭은 1846년 병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 수도 있는 자였다. 그러나 그는 농민들이 수탈당하는 꼴을 마냥 지켜보지 않았다. 감사와 현감에게 수차례 편지를 보내 탐관오리의 만행을 고발했다. 이 편지마저 묵살당하자, 농민들을 이끌고 현감과 아전을 쫓아냈다. 이 일로 김인섭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았고, 1864년 다시 관직에 오른 뒤에도 모함을 받아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는 23세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53책에 이르는 ‘단계일기(端磎日記)’를 남겼다. 언젠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봐 줄 누군가를 기다린 것처럼….

   시나리오 ‘헬조선: 노비신분사기극’을 창작한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소속 대학생 3인은 바로 김인섭이란 인물을 주인공 정석의 아버지로 상정하는 서사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꿈꿨던 개혁을 그의 아들이 이어받는다면….’ 단 한 줄의 상상력으로 출발한 이야기는 가상의 아들 정석이 아버지가 남긴 53책의 일기를 꺼내 보며 아버지가 못다 이룬 개혁의 꿈에 도전하는 서사로 확장됐다. 현재 이 시나리오는 영화제작사와 기획안·시나리오 집필 계약을 모두 마치고 영화화를 앞두고 있다.
◇ 고문헌 속에서 찾은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 배경에는 탄탄한 온라인 데이터베이스(DB)가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스토리테마파크’가 대표적이다. 이 홈페이지에는 김인섭이 남긴 ‘관음사전춘기(觀音寺餞春記)’를 비롯해 고문헌 속에 숨어 있는 다채로운 이야깃거리가 올라와 있다. 2012년부터 매년 콘텐츠 창작 공모전을 주최해 고문헌 속에 뿌리내린 이야기의 씨앗을 싹틔우고 있다. 실제 ‘헬조선: 노비신분사기극’ 시나리오 창작자인 대학생 3인은 이 홈페이지에서 김인섭의 생애를 접하고 오늘날의 ‘헬조선’ 청년들과 비슷한 처지란 생각을 떠올렸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출간된 ‘고문헌에 담긴 조선의 일상’(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역시 조선 시대 사료에 숨어 있던 새로운 이야기를 건져 올린 사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 장서각 수장고에 있는 조선 시대 사료 수는 29만 8092점에 이른다. 종류도 다양하다. 왕실 문헌만 12만여 점, 노비 문서나 양반들이 주고받은 편지 등 민간 고문헌도 17만여 점이나 된다. 정수환 한중연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장 등 장서각 소속 연구원 8명은 이처럼 방대한 사료 속에서 조선인의 일상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뽑아냈다. 정 실장은 “딱딱한 한문만 가득할 것 같지만, 고문헌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진득하게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실학자 황윤석(1729∼1791)이 8세부터 62세까지 쓴 일기 ‘이재난고’’가 대표적이다. 총 46권 중 한 권에는 18세기 중엽 한양의 주택시장에 대한 ‘깨알 정보’가 담겼다고 한다.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황윤석은 1769년 마흔 살에 승진해 한양에서 왕실 족보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서울살이’를 위해 고향 땅을 판 40냥을 들고 사대문 안에서 열심히 발품을 팔지만 작은 집 한 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에는 내 집 마련이란 꿈을 포기하고 하숙생으로 지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내 집을 마련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임자’를 기다리는 고문헌은 무궁무진합니다. 별것 아닌 조선의 낙서에서 당대의 유머 코드를 읽어낼 수도 있죠. 수많은 사료에서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는 건 후손들이 해야 할 큰 숙제입니다.” (정수환실장)
◇ “역사 공백 채울 민간 소장 사료 DB화”
   이야기뿐일까. 고문헌에는 역사의 공백을 채워줄 단서도 담겨 있다. 지난해부터 민간 기록유산의 실태를 조사하는 ‘기록유산 DB 구축사업’을 실행하고 있는 문화재청은 “개인이 남긴 역사야말로 거시적 시각에 치우친 한국사의 공백을 채워줄 사료”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민간 소장 고문헌은 왕실이나 정부 소장 기록유산에 비해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치부돼왔다. ‘비지정문화재’란 신분의 한계 탓에 그간 일부 지역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자체적으로 소규모 연구만 진행되곤 했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 당대 생활문화상이 담긴 미시사(微視史)의 가치가 떠오르면서 민간 사료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기록유산 DB 구축사업은 벌써 적지 않은 성과를 얻고 있다. 문화재청은 충청과 전라, 제주에서 2만 건 넘는 신규 고문헌 자료를 찾아냈다. 일례로 고령신씨 가문 소장 고문헌 조사에선 조선 후기 문신 신좌모(1799∼1877)가 1855∼1856년 청나라에 서장관(書狀官: 외교문서 기록관리)으로 파견됐을 때 작성한 ‘연행일사(燕行日史)’ 유일본이 처음 발견됐다. 조사에 참여한 김근태 고문헌과콘텐츠연구소 대표는 “청나라 문인들과 나눈 대화와 한시 등이 빼곡해 양국의 문화교류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라고 평했다.
   충북 제천에서 활동하는 의병연구가 양승운 씨가 수집해온 항일의병 사료에선 독립운동가 이범진 열사(1852∼1911)가 남긴 유일한 시고(詩稿: 시의 초고)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러시아 주재 초대 공사로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쓰다 1910년 경술국치 때 자결한 이 열사는 관련 기록이 거의 전해진 게 없었다. 민간 소장 자료는 한 인물은 물론 당대 역사의 공백을 채워줄 ‘마지막 퍼즐’인 셈이다.
   아직도 어딘가는 누군가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고문헌들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조사 지역을 확대해 전국의 민간 기록유산을 세세하게 훑고, 2026년까지 기록유산 DB 구축사업을 이어갈 방침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기한이 없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마지막 한 점의 기록유산을 찾을 때까지 이어져야 할 일이다. 고문헌이라는 탄탄한 토대가 생활·문화사를 비롯한 역사학계의 새로운 연구 주제로, 때로는 K-콘텐츠의 이야깃거리로 뿌리내리길 바라본다. 가장 개인적인 기록이 가장 정치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가 가장 세계적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