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소현세자빈 강씨는 무죄(無罪)이다.

김우진 사진
김우진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연구원

인조와 효종의 미움을 산 소현세자빈 강씨


   대중 사이에 익히 알려진 조선 왕실 비운의 세자와 세자빈은 바로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빈 강씨(愍懷嬪, 1611~1646)일 것이다. 특히 소현세자는 무능하고 자존감 낮은 인조에게 미움을 받고 원인 모를 병으로 급서(急逝)한 인물로, 강빈은 괴로운 타향 생활 끝에 고국에서 남편을 잃고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반죄로 사사된 인물로 기억된다. 동정의 원인은 소현세자를 염습(殮襲)하는 과정에서 전해지는 비정상적인 사체 정보와 강빈의 처벌 과정이 정확한 물증 없이 오로지 인조의 심증과 추측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동정 여론은 당시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조는 물론 효종까지 강빈의 신원(伸冤)을 언급한 자는 역당(逆黨)으로 처리하겠다며 엄명을 내렸던지라 그 누구도 쉽게 거론하지 못했다.


   실제로 강빈의 억울한 죽음을 제기했던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은 공초한 지 나흘 만에 장살(杖殺)되었다. 물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적극적인 설득 결과, 효종은 김홍욱의 신원을 허락하였다. 대신 그의 죽음이 ‘역적을 비호하여 강빈을 신원’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강빈을 언급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이렇듯 강빈에 대한 언급은 인조·효종의 엄교(嚴敎)와 김홍욱의 사사 사건을 계기로 자연히 금기시되었다.


70여 년의 억울함과 7개월 만의 신원


   1718년(숙종 44) 3월, 숙종은 강빈의 신원을 명하였다. 숙종은 평소 소현세자가 사당에 홀로 모셔진 상황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관작을 삭탈당했던 부친 강석기(姜碩期, 1508~1643)에 대한 재평가 등이 그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에 앞서 왕실에서는 강빈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관되거나 처형된 강빈 집안 인물들에 대해 용서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빈까지 신원하기에는 인조와 효종의 엄명이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강빈의 신원은 선대왕들의 행위에 시비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숙종은 강빈의 가족뿐만 아니라 강빈까지 신원시키기를 원했다.


   숙종은 강빈의 복위를 실현시키는 동시에 선대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여기서 그가 착안한 묘수는 바로, 효종이 김홍욱을 신원하면서 언급했던 하교를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앞서 효종은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시켜준 것은 강빈의 옥사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이에 대해 ‘김홍욱이 역적을 비호한 사람이었으면 효종이 결코 관직을 회복시켰을 리가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다시 말해, 숙종은 김홍욱의 신원에 대한 효종의 판결을 비틀어서 ‘(효종이) 강빈을 역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재해석한 것이었다. 이렇게 숙종은 강빈의 복위에 대한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인조와 인조의 의지를 계승한 효종에 대해서는 평가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이후 강빈의 신원은 ‘선시(宣諡)’, ‘합봉(合封)’, ‘반교(頒敎)’, ‘봉묘(封墓)’의 과정을 거치며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숙종이 강빈의 복위를 선언한 지 단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정령(精靈)이시여! 흠향하소서!


   송시열이 지문 찬술을 고사한 이후에도 예송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는 계속되었다. 척신 김석주와 정국의 변화를 꾀하던 남인들은 명분상 예론을 이용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다음해 1월 결국 송시열은 유배를 떠났고 이후 대부분의 서인들이 축출되면서, 남인과 척신 세력이 집권하는 갑인환국이 완성되었다. 숭릉지문은 갑인환국이 진행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

   숙종이 강빈에 대해 처음부터 동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역적으로 보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비로 강등할 때의 기준으로 삼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숙종의 태도가 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
   숙종이 강빈의 억울함에 공감하고 원혼을 달래며 적극적으로 추복시켰던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선 을병대기근에 이어 조선은 전국에 극심한 기근과 여역(癘疫)으로 인해 수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아직 원손이 없는 상태에서 세자빈인 단의빈(端懿嬪, 1686~1718)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왕실 종사에 뜻하지 않은 위기감이 흘렀다. 숙종은 시력 악화와 건강상의 문제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상태에도 불구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강빈의 혼을 위로하였다.


   절박해진 숙종은 국가와 왕실의 이변과 비극을 타개하고 백성을 대통합시킬 수 있는 분위기 쇄신이 필요했다. 이런 때에 거론된 것이 강빈의 신원이었다.


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