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9살 공녀의 식모 고용계약서

김백희 사진
허원영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연구원

   1917년 6월 4일생인 공녀(空女)가 만석꾼 지주가에 식모로 들어가게 된 것은 9살을 갓 넘긴 1926년 7월 28일이었다. 장서각의 마이크로필름(MF 35-009645)에는 당시 작성한 고용계약서와 영수증, 그리고 간단한 기록이 남아있어 공녀가 겪은 식모살이의 편린들을 확인할 수 있다.


   공녀가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식모로 가게 된 것은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족의 생활난 때문이었다. 공녀의 아버지 김태춘(金泰春)은 공녀가 태어난 후 2년도 안 된 1919년 2월에 사망했다. 다른 형제와 가족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고용계약서에 따르면 공녀의 식모 계약은 친모인 신선녀(辛仙女)의 생활상 어려움으로 인한 것이었다. 계약의 주체는 공녀였지만, 공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친모 신선녀가 친권자로 함께 계약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실제 계약의 주체는 공녀의 어머니 신선녀였다. 신선녀는 남편이 사망한 후 7년여 동안 홀로 가계를 꾸려나가다가 생활난을 이기지 못하고 딸 공녀를 고을의 만석꾼집에 식모로 보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계약상 공녀의 임금은 25원, 고용 기한은 계약일로부터 만 25년이었다. 1년에 1원에 불과한 임금을 일시불로 지불받고 25년 식모 계약을 체결했다. 참고로 1926년 당시 식민지 조선의 조선인 여자하인의 임금은 식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월평균 7원이었다. 25년치 공녀의 임금 25원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액수였는지 알 수 있다.


   계약과 관련한 문제는 기간 대비 임금뿐만이 아니었다. 고용된 기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공녀는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단, 만 6년 이내에 고용을 해제하고자 할 경우에는 고용 임금에 대해 매 원당 월 4전의 이자와 의복비까지 계산해 되갚아야 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었다. 만일 공녀가 성장해 고용된 지주가에서 결혼을 하고 본 계약을 해제하고자 할 때도 임금과 결혼비용을 즉시 계산해 납입해야만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


   이 계약에는 공녀와 함께 친모 신선녀가 친권자로 참여해 날인했으며, 계약 조항의 준수를 함께 책임졌다. 또한 친권자로서 신선녀는 공녀가 출거하거나 도망간 경우에도 위와 같은 금전적 책임을 져야만 했다.


   공녀의 식모 계약은 고용계약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계약의 내용이 심하게 왜곡돼 있다. 노동력 제공에 대한 임금 지급이라는 임노동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피고용자, 즉 공녀와 그 가족의 상황에서 기인한다. 어린 나이의 여아들이 식모살이를 하게 되는 많은 경우처럼, 공녀의 식모 계약은 노동력 제공에 따른 임금만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녀 가족의 입장에서는 입을 하나 줄임으로써 가족의 생계비 부담을 줄일 수 있었으며, 공녀의 입장에서도 최소한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왜곡된 고용계약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공녀의 식모 고용계약서

[그림 1] (좌) 공녀의 식모 고용계약서 , (우) 공녀모출급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그렇다면 공녀의 식모살이는 어떠했을까? 고용계약서 및 영수증과 함께 촬영된 ‘공녀모출급기(空女母出給記)’라는 기록을 통해 볼 때,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녀모출급기’는 공녀의 식모 계약 이후 지주가에서 공녀와 관련하여 지출한 내역을 정리한 것으로, 공녀 모친 신선녀 앞으로 달아 놓은 부채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공녀의 첫 번째 도망은 식모 계약을 하고 3년 후, 공녀가 12살이던 1929년 10월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31년 10월, 공녀는 두 번째로 도망했다. 그리고 16살이 되던 1933년 2월 세 번째 도망을 했다. 1926년 7월, 9살의 나이로 25년의 식모 고용계약을 25엔에 체결하고, 7년이 지나 1933년 16살의 나이가 되기까지 공녀는 식모살이로부터 세 번의 도망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