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날마다 이 문서와 씨름하면서 문서를 보는 눈이 조금씩 트이고 있습니다.

이번 한중연 사람들 코너는 국가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에서 사료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계신 이상규 박사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이상규 사진

안녕하십니까? 국사편찬위원회의 건물이나 조경 분위기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매우 비슷하네요. 현재 박사님이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제 업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국사편찬위원회(국편) 소장 대마도종가문서를 정리, 간행하는 일이고 둘째는 통신사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일입니다. 첫째 업무가 중심이며 대마도종가문서 중에 『분류기사대강(分類紀事大綱)』이라는 자료를 탈초, 교열하여 간행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 제5권을 간행했습니다. 둘째 업무는 국사편찬위원회가 담당하는 해외 소재 한국사 자료를 수집하는 기능과 맞물려 빼놓을 수 없는 업무입니다. 2010년 이후 전임자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쓰시마로부터 토쿄, 닛코로 이어지는 통신사 경로를 따라서 통신사 자료를 수집해 왔는데, 2020년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출장이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요. 대학원 시절 기억에 남는것은 무엇입니까?


이상규 사진

대학 사학과에서 일본사 강좌를 듣기도 했고 공부 모임 속에서 한일관계사 논문을 읽으면서 조선시대 한일관계사로 전공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석사과정에 들어와서 막상 공부해 보니 논리적인 글을 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 애를 먹었고 느즈막하게 석사논문을 제출하였습니다. 박사과정 때도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석사논문의 주제를 연장하여 왜학역관을 통해서 17세기 한일관계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역사학 전공 교수님들은 재학 시기에 7~8분 계셨는데 주로 이성무, 정구복, 허흥식, 최진옥 교수님한테 강의를 들었습니다. 석사과정 때의 지도교수인 이성무 교수님은 공부의 자신감을 심어 주셨고, 박사과정 이후로도 연 2회의 세미나에서 자기 논문 주제에 대하여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 주셨습니다.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최진옥 교수님인데, 제가 박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근무할 때도 그랬지만, 이곳 국편에서 생활하면서 그 분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직기간에 크고 작은 어려움 속에도 강단 있게 사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원 과정 때 저를 깨우쳐주고 분발하게 한 동료 선후배들이 꽤 있었습니다. 구두점이 떨어지지 않는 실력으로 한문 독회에서 얼굴이 붉어지는데도 함께 해준 동료 선배들이 기억나고 석사논문에 쓸 자료를 위하여 근무시간을 할애해 국편에서 사진을 찍어준 동료도 기억이 납니다.

대마도종가문서를 중심으로 한 대일관계사를 전공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사이방기록(裁判記錄), 1734년(英祖10, 享保19)

사이방기록(裁判記錄), 1734년(英祖10, 享保19)

석사과정에 들어와서 수업 따라가기가 힘들었지만 2학기에 지도교수를 정하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기에 본인의 논문 주제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다행히 나가던 학회에서 과천 국편에서 일본 자료 윤독회가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때가 1993년 12월 하순입니다. 그 이후 6개월 동안 아무런 기초도 없이 한문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닌 허사가 곳곳에 있어 보이는 일본근세 자료의 독회에 참가했습니다. 그 자료는 대조선외교 현장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쓰시마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가 저술한 『교린제성(交隣提醒)』이었고, 거기서 조선 역관 언급이 자주 나와서 역관을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어줍잖은 일본어 실력에 정자로 표기되었는데도 허사가 곳곳에 있어 보이는 문서에 익숙해지는 데는 세월이 꽤 걸렸습니다. 석사논문 때부터 박사논문 이후까지도 그때그때 대마도종가문서를 활용하기는 했지만 전면적으로 승부를 하지는 못했는데, 3년 전 국편으로 옮겨와서 날마다 이 문서와 씨름하면서 문서를 보는 눈이 조금씩 트이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교린제성』이란 책도 국편 종가문서 중의 하나였고, 종가문서가 어렵고 생소한 문서이기는 하지만 한국 기록과는 달리 종가문서는 동래부사나 그 아래 단계인 조선 역관들, 조선 표류민까지도 세세하게 묘사된 자료입니다. 어렵더라도 덜 알려진 자료에 도전한 것입니다.


대마도종가문서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는지요?


대마도종가문서는 일본 막부의 허락을 받아서 조선과의 외교를 대신했던 쓰시마번, 즉 대마도 소오씨(宗氏)가 남긴 기록입니다. 이 문서는 16세기 이전, 즉 일본의 중세 문서도 일부분 들어있기는 하지만 대종은 쓰시마번이 조선과 무역, 외교, 표류민 송환, 번정(藩政) 등에 대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줄여서 종가문서라고도 합니다. 이 문서는 한국의 국편과 일본의 쓰시마시 역사민속자료관을 비롯하여 6개 처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본래 종가문서는 구 쓰시마번, 부산 왜관, 에도 번저(藩邸)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873년 소오씨가 외무성에 외교권을 잃으면서 문서의 소장처가 여러 곳으로 나눠졌습니다. 일부 문서는 민간에 팔렸다가 1990년대 후반 일본 문화청에서 구입하여 국립규슈박물관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국편 소장 종가문서는 본래 쓰시마에 있던 것 가운데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편찬을 위한 자료로 1926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구입한 것입니다.

요즈음 한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최근 한일관계의 상황이 하시는 업무에 영향을 주기도 하나요?


 이상규 사진

저는 1990년 말 짧게 일본어 연수를 다녀왔는데, 그때 일본에 초청된 인원 가운데 한국이 꽤 윗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에 일본 문화를 개방하고 일본과 관계가 좋았던 시기입니다. 이런 말씀은 일반론이고 저는 전공도 이런 쪽이 아니라서 자신 있게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2015년 학회 총무를 하면서 한ㆍ일 수교 50주년 학술회의 비용으로 6,000만원을 지원 받아 5개국 학술회의 진행을 하였습니다. 당시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연구재단, 그 위의 교육부까지 정책과제를 지원하고 향후 결과보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볼 때 정부기관의 기획 의도가 건전하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 2010년대 이후 한ㆍ일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는 편은 아니지만 일본과의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부처 또는 산하기관에서는 정상적인 절차대로 움직여가고 있다고 봅니다.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취미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입산을 석사과정 때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저를 아시는 분들은 아무개가 언제나 산에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할 겁니다. 3년 전에 이직한 국편은 한국학중앙연구원보다 입산하기가 더 여건이 좋아서 사무실에서 5분만 나가면 관악산 줄기로 이어집니다. 다른 장점도 있겠지만 업무에 쫓겨 있다가 생각을 비울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독자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제가 3년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떠날 때 저를 응원해 주신 분들을 가끔 떠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회 닿는 대로 뵙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석ㆍ박사과정 때 2~3년 한국 고문서 정리 일에 참여했습니다. 이 일이 당시 전공과는 무관하다 싶었는데 20여년이 지난 뒤에 국편 종가문서 속에 명문 비망기 등의 조선문서를 접하면서 굉장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부하는 과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