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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사대주의자’라는 익숙한 이미지 너머, 김부식의 사상을 다시 읽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신간 『김부식(金富軾)』(이강래 지음) 발간
◆ 군주의 책임과 민본·위민의 정치, 대외 인식까지 김부식의 사유를 입체적으로 조명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고려의 정치가이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정사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자인 김부식(1075~1151)의 사상을 살피고, 그에 대한 기존 평가를 재검토한 『김부식(金富軾)』(이강래 지음)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국 사상가의 궤적과 철학적 개념을 탐구하여 우리 안에 잠재한 사유와 문화의 근원을 이해하기 위해 기획한 <사유의 한국사> 교양총서의 열한 번째 책이다.
◆ 묘청의 대척점에 놓였던 김부식, 익숙한 평가를 다시 묻다
김부식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역사적 인물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역사가이자 묘청 등 서경 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정치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익숙함만큼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몇 가지 강한 이미지에 묶여 있다. 묘청의 자주적 노선에 맞선 사대주의자, 고구려보다 신라를 앞세운 역사가라는 인식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이러한 평가를 단순히 부정하거나 김부식을 옹호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대신 그가 실제로 남긴 말과 글, 정치적 행위를 하나씩 확인하고 그것이 나온 시대적 조건을 함께 살핀다. 김부식을 묘청의 반대편에 세워놓고 판단하기보다 그가 살아간 12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상, 급변하는 동북아 국제질서 속에서 그의 선택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숙종·예종·인종 대를 거치며 약 50년 동안 관료로 활동한 김부식의 생애를 따라간다. 이 시기 동북아에서는 여진의 금이 급부상하고 요가 멸망했으며 북송도 남쪽으로 밀려났다. 고려 내부에서는 이자겸의 정변과 서경 세력의 봉기라는 정치적 위기가 이어졌다. 세 차례의 사행을 비롯해 다양한 외교 경험을 지닌 김부식이 현실의 국익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살피는 것은 그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삼국사기』의 편찬자를 넘어 정치가·외교 관료·문인 김부식을 복원하다
김부식에 대한 평가는 『삼국사기』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왔다. 『삼국사기』의 한계나 오류를 김부식 개인의 역사관과 의도에서 찾고, 그렇게 형성된 김부식의 이미지를 다시 『삼국사기』를 평가하는 근거로 삼는 순환이 반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편찬자가 참여하고 앞선 시대의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진 관찬 역사서를 한 개인의 의도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삼국사기』의 김부식’과 ‘12세기를 살아간 김부식’을 구별하면서도 둘 사이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담긴 고대의 사실 기록을 곧바로 김부식 개인의 생각으로 환원하지 않고, 그가 직접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평가한 사론(史論)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역사서로서 『삼국사기』가 지닌 문제와 김부식 개인의 역사 인식을 구분해 살핀다.
동시에 김부식이 남긴 100여 편의 시문을 함께 검토한다. 이를 통해 『삼국사기』 편찬자라는 단일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정치 현실과 국제관계를 판단한 관료, 외교 현장을 경험한 정치가, 자신의 감정과 현실 인식을 글로 남긴 문인으로서 김부식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 사론과 시문을 통해 읽어낸 김부식의 사상
이 책의 또 다른 중심축은 김부식의 사상이다. 특히 『삼국사기』에 실린 31편의 사론은 편찬자의 적극적인 가치 판단이 담긴 글이라는 점에서 김부식의 생각을 살필 수 있는 핵심 자료다. 저자는 이를 중심으로 그의 정치사상과 윤리의식, 역사 인식을 분석하고 시문과 정치적 언행을 함께 살펴 그 생각이 현실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추적한다.
김부식이 중시한 것은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이 각자의 위치에서 마땅한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유교적 정치·윤리 질서였다. 그러나 김부식이 말하는 정치질서는 군주에 대한 신하의 일방적인 복종을 뜻하지 않았다. 군주가 군주다운 책임을 다해야 신하 역시 자신의 도리를 다할 수 있으며, 부당한 처사와 불의한 명령에는 항거할 수 있다는 인식도 사론에서 확인한다.
이러한 정치 인식은 백성을 통치의 근본에 두는 민본·위민의 관점과 연결된다. 또한 왕조의 흥망을 군주의 도덕적 책임과 백성·신하의 호응,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김부식의 사상이 추상적인 유교적 명분에 머물지 않고 왕조의 존망과 군주의 책임, 국가 내부의 질서와 대외관계라는 현실 정치의 문제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 ‘자주 대 사대’의 이분법을 넘어 김부식과 그의 시대를 다시 보다
이 책이 김부식을 다시 살핀다고 해서 그의 정치적 선택과 사상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김부식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어떠한 근거와 해석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검토하는 동시에 그의 정치적 판단이 지닌 한계와 좌절도 함께 살핀다. 만년에 나타난 특권의식과 윤리적 한계 역시 평가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특히 묘청의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금 정벌 주장을 ‘자주’로, 이에 반대한 김부식을 ‘사대’로 배치해 온 익숙한 구도를 당시의 현실 속에서 다시 검토한다. 이상과 명분만이 아니라 당시 고려가 처했던 국제정세와 정책의 실현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해야 김부식이 내린 정치적 선택의 의미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부식이 신라를 높이고 고구려를 낮추려는 의도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는 평가 역시 사료와 논리를 토대로 되짚는다. 저자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오류나 결락, 유교적 윤색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곧바로 김부식 개인의 정치적 의도나 역사 왜곡으로 연결하는 해석에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 『김부식』 기획과 필자 선정, 그리고 3년의 집필
『김부식』은 발간까지 4년여가 걸렸다. 이 책은 <사유의 한국사> 시리즈 중 하나로 기획되었는데, 짧은 호흡의 단편적 연구가 아닌 깊이 있는 통찰을 얻기 위해 한 가지 주제를 한 명의 연구자가 일관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3년간 집필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저자는 학계 동향 조사와 편찬위원회 검토를 통해 주제에 가장 적합한 연구자로 선정되었고, 한국 사상의 정통적인 측면과 새로운 시각이 모두 반영될 수 있도록 했다. 인물의 사상과 개념의 통찰이라는 두 축을 빈틈없이 엮어 기존 연구 성과를 망라하여 내용을 담았으며, 특정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했다.
이 책의 저자인 이강래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오랫동안 한국 고대사의 기본 문헌이 어떤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 당대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이 어떻게 담겼는지를 연구해 왔다. 특히 『삼국사기』의 전거와 형성 과정, 역사 인식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기록된 사실뿐 아니라 그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시선과 사유를 읽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삼국사기』에 대한 오랜 연구는 자연스럽게 그 책을 편찬한 김부식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그동안 축적해 온 『삼국사기』 연구를 바탕으로 김부식이 살았던 시대와 그가 남긴 글을 함께 살피며 그의 정치사상과 윤리의식, 역사 인식을 추적한 결과물이다.
◆ 한 인물의 사상과 평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국 사상과 역사 입문자를 위한 교양서
이 책은 한국의 철학, 사상,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김부식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짚고, 그의 언행과 사상을 보여주는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그 의미와 한계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한 인물의 사상이 어떠한 정치·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평가는 후대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사대주의자’나 ‘『삼국사기』 편찬자’라는 익숙한 이름 뒤에 가려진 김부식의 사유와 마주하게 된다.
이번 『김부식』 발간과 함께 눈여겨볼 책이 있다. 바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의 대표 도서 중 하나인 『역주 삼국사기』(전 5권)이다. 김부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삼국사기』를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한 이 책은 1998년 정구복 교수를 비롯한 5명의 연구자가 처음 펴낸 이래,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꾸준히 찾아온 기본 역주서로 자리 잡았다.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 교감과 번역, 주석을 보완한 개정증보판이 2011년 발간되었으며, 이후 16년간 축적된 성과를 다시 반영한 재개정판이 2027년 발간될 예정이다. 1998년 초판부터 30년 가까이 『삼국사기』 역주를 이어온 연구자 전원이 이번 재개정 작업에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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