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자학에서 본 선악의 실체성
  • 저자 김철호
  • 발행일 2023-11-30
  • 판형 신국판
  • 쪽수 336쪽
  • ISBN 979-11-5866-720-7, 94190
  • 정가 20,000원
  • 분류 AKS총서  >  인문총서
    사상  >  철학
  • 구입처 교보문고 예스24  

도서 소개

이 책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 개념인 선과 악을 주자학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악은 왜 선보다 강한가, 악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악에도 존재 이유가 있는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 뒤에 감춰진 우리 시대의 절망과 탄식을 읽어내고, 오늘날의 선악 문제에 주자학이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지, 그 제안은 유효성이 있는지에 대해 논증을 펼친다.


주자학의 모든 개념을 연결하는 구심점은 선과 악이다

유학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 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답하지, 선(善)이라고 답하지는 않는다. 기존 연구를 보아도 이기론, 심성론, 수양론을 주제로 삼을 뿐 선악을 별도의 연구 주제로 다룬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저자는 주희(朱熹, 1130~1200)의 저작에 선악에 대한 언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그의 글 곳곳에서 선과 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이기(理氣)·음양·성(性)·태극·인의예지 같은 유학의 핵심 개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주자학의 중심부에 있는 이기, 심성, 격물(格物), 성의(誠意) 등의 개념은 각기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만 선악이 빠지면 구심점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리(理)는 절대선을 정립하기 위해 도입되었고, 기(氣)는 뿌리 깊은 악의 원인을 해명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며, 격물이나 성의는 뿌리 깊은 악을 극복하기 위해 재해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도·태극·음양 같은 다른 개념들도 마찬가지이며, 주자학의 모든 개념을 연결하는 공통의 문제의식이 있다면 바로 선과 악의 문제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악은 늘 선보다 강하다

주희의 스승은 31세의 주희에 대해 “선을 즐거워하고 의로움을 좋아하는 것이 그와 견줄 만한 인물이 드물다”고 평한 바 있다. 주희의 이러한 선에 대한 열망은 어쩌면 악이 넘쳐나는 현실에 대한 반증일 수 있다. 주희가 살았던 12세기 남송은 이전 어느 시기보다 생산력이 증대되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권세를 가진 자들의 탐욕과 착취로 인해 백성들이 기본적인 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려웠던 시대다. 주희가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선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당시의 세태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이 세계가 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탄식은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는 칸트의 말처럼, 악하기는 쉽지만 선하기는 어려우며, 현실에서 악은 늘 선보다 강하다. 그런데도 주자학은 극구 선이 인간의 본질이고, 악은 선이 아닌 무엇일 뿐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자학은, 선하면서 악한 인간의 이중성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악을 제거하고 선을 실현할 가능성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에는 형이상학적 타당성과 현실적인 적용 가능성이 모두 요구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저자는 공자로부터 맹자, 순자, 한당유학, 북송유학을 거쳐 주희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와 특징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해야 하는 이유

저자는 주희를 중심으로 유학의 선악 개념을 소개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선악론과의 비교를 통해 그 보편성을 확장한다. 무엇보다도 주자학의 선악 개념을 우리 사회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유 문법으로 다듬어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그 핵심은 악의 실체를 부정하고 선으로부터 악을 정의하는 방향성에 있다. 오늘날 대중 매체에 넘쳐나는 타자를 악마화하고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손쉽게 선한 사람이 되거나, 명시적인 악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적 태도가 악으로부터 선을 정의하는 역방향성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만 동시에 악을 유발하는 기질을 지녔다고 본다. 따라서 악은 제거하고, 악인은 변화시켜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기원이 분명치 않은 격언은 인류가 오랫동안 악(죄)과 악인(죄인)을 구별해서 다루어왔음을 보여주며, 동서고금의 현인들이 공통적으로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악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악을 알아차리고 선을 깨닫는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주자어류』에는 주희가 제자에게 ‘물의 비유’가 본성의 선과 악을 설명하는 데 미흡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비유라고 강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이 탁해지듯 본성은 악으로 향하기 마련이지만 처음부터 맑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비록 탁하더라도 맑게 할 수 있는 것은 물과 사람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의 시작점에 깨끗한 물이 있었듯이 인간의 본성에도 선한 본성만 있다. 그렇기에 선에 무지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어야 하고, 지독한 악인에게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학지성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인일보 "인류의 근본문제 '오늘날 선과 악' 고찰"

저자 소개

김철호.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성리학의 도덕추론과 선악론을 주제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경인교육대학교에 재직하며 성리학의 경(敬)과 불교의 마음챙김 등 동양윤리 가운데 교육 현장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분야로 연구를 확대해왔다. ‘철학과 심리학을 통해 보는 우리시대 선과 악’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를 주제로 한 강좌와 집필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대표 논저는 『도덕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악의 리는 없다-정호의 리유선악에 대한 주희의 해석」, 「혐오사회에서 노자철학의 의미」, 「도덕적 명상으로서의 경(敬)」 등이며, 역서로는 『마음챙김명상교육』 등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서언 선악을 생각하는 이유
1. 오늘날 선악을 생각하는 이유
2. 주희 선악론의 탐구 이유와 가능성 

 

1장 선진유학의 선악 개념
1. 선악 개념의 출현
2. 공자:악은 선하지 않은 것[不善]이다
3. 맹자: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4. 순자:이기심이 공동선을 만든다

 

2장 한당유학의 선악 개념
1. 동중서: 선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선[未善]을 완성하는 것이다
2. 양웅: 본성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3. 한유: 선악은 타고난 본성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4. 이고:악은 본래 있던 것은 아니다[邪本無有]

 

3장 대립: 선악에 대한 주희의 문제의식
1. 대립의 두 양상: 상관대립과 모순대립
2. 대립의 실태: 악은 선보다 강하다
3. 대립의 해소: 통합적 이론을 향하여 

 

4장 선의 근원: 리
1. 성즉리: 도덕형이상학의 건립
2. 성즉리의 의미

 

5장 선의 의미와 종류: 주희와 호남학파의 성선 논쟁
1. 논쟁의 배경
2. 호남학에서 ‘성선의 선’과 ‘선악의 선’
3. 주자학에서 ‘성선의 선’과 ‘선악의 선’
4. 주희와 호굉의 성선 해석 비교

 

6장 악의 근원: 기질
1.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2. 기질과 근본악

 

7장 선악 대립의 역설적 통합: 기질지성
1.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대립 
2. 역설적 사유에 의한 통합
3. 기질지성의 재해석

 

8장 악의 위상: 악한 리도 있는가
1. 선악개천리: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2. 이유선악: 악한 리는 없다

 

9장 악의 의미와 존재 이유(리)
1. 악의 의미: 악은 선의 결핍이다
2. 악에도 존재 이유(리)가 있는가

 

10장 통합적 구도
1. 선진유학에서 한당유학에 이르는 선악 개념의 변화 양상 
2. 구도의 통합: 이원론적 일원론

 

11장 아우구스티누스 선악론과의 비교
1. 이원론의 계보: 조로아스터교·마니교·기독교 
2.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원론적 일원론
3. 주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비교

 

결언 주희 선악론의 의미
1. 주희 철학의 현대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2. 문제: 악으로부터 정의되는 현대 사회의 선
3. 노자의 해법: 선악을 잊어버리자
4. 주희의 해법:악은 선으로부터 정의되어야 한다

서평 및 출판사 리뷰

1.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주자학은 별다른 가치가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윤리학과 거리가 멀다는 '편견 아닌 편견'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비단 수정주의의 비조로 꼽히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행했던 수정주의적 작업에는 역사발전단계론의 필연성 대신 칸트적 윤리학을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로 들어 있었다. 실상 마르크스주의가 주요하게 다루는 '착취' 문제에도 윤리적인 함의가 짙게 배어나온다는 점만 보더라도 마르크스주의가 윤리학과 아주 무관하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비판자들의 주장이 아주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절대적 선"과 같은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윤리학의 근거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마르크스주의와 윤리학은 서로 연관이 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윤리학의 관계에 대해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저작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반뒤링론>이다. 엥겔스는 이 저작에서 뒤링이 모든 사회변혁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영원한 진리"를 조롱하며 그로부터 도덕적 원칙 등의 다양한 논의를 도출해내는 것을 비판한다. 뒤링의 '영원한 진리'와 대비되는 엥겔스의 도덕관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도덕의 세계에도 역사와 민족적 차이를 초월하는 항구적인 원리가 있다는 구실 밑에 그 어떠한 도덕적 교의를 막론하고 그것을 영원한, 결정적인, 항구불변한 도덕적 법치그로서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시도를 일체 거부한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종래의 온갖 도덕이론을 결국 사회의 소여 경제상태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회가 지금까지는 계급적 대립 속에서 운동하여 온 만큼 도덕은 항상 계급적인 도덕이었다. 즉 도덕은 지배계급의 지배와 이익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피억압계급이 충분히 강력하해지면서부터는 이 지배에 대한 피억압 계급의 반항과 피억압자의 미래의 이익을 대표해 왔었다."(프리드리히 엥겔스, 1989 : 132)다시 말해서 엥겔스는 시대와 민족, 그리고 사회발전단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도덕적 원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은 특정한 지배세력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거나, 혹은 반대로 그 지배세력의 쇠퇴에 따른 피지배 세력의 도덕적 원칙이 일반화되어 나타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뒤링을 조롱하며 만약 뒤링의 말처럼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해서 선악의 구별을 쉽게 한다면 이토록 많은 도덕적 논란이 왜 존재하냐고 묻는다. 엥겔스가 보기에 오늘날의 현대는 "과거의 종교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적-봉건적 도덕"이 설교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도덕"이 있고, 이와 나란히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도덕"이 있다. 또한 이 각각의 도덕 내부에는 다양한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기독교-봉건적 도덕"의 경우에는 "천주교 도덕과 신교도덕"이 구별되며, 이것들은 다시 "예수이트파적 천주교 도덕과 정통파적 신교 도덕"으로 계속해서 나뉘어진다. 도대체 이 많은 도덕들 중 어느 것이 해당 종파의 도덕관을 대표하는가? 또 더 나아가서 어떠한 도덕이 사회 전체의 도덕관을 대표하는가? 여기 어디에 '영원한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현대인들은 현대 자본제 사회 내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계층적 분화, 계급적 분화에 따라 각자의 "계급적 처지의 기초가 되"는 "실천적 관계", 즉 "생산과 교환이 진행되는 그 경제적 관계"에 따라 "자신의 도덕관을 취한다"는 것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게나 상이한 도덕관을 갖고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의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게 하는, 공통의 지반이 있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보기에는 그러한 공통점도 특정한 경제발전의 단계에 구속되어 있다. 예컨대 "동산(動産)에 대한 사적소유"가 발생하게 된 이래로 모든 '계급사회'에서는 "훔치지 말라"는 사적소유에 대한 보호조치가 도덕적 규율로 존재해왔다.(프리드리히 엥겔스, 1989 : 133) 
다시 말해서 엥겔스의 주장을 "선과 악을 한데 뒤섞"어두어 "온갖 도덕이 소멸"한 상태, "각 개인"이 "제멋대로 행동"해도 무방한 상태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엥겔스는 여기서 모든 도덕이 무가치하다든지 하는 도덕적 허무주의를 설파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사회구성체 전체의 '재생산'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점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회구성체 속의 여러 생산관계 및 계급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인류사회가 하나의 사회구성체로서 존속하는 한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규율은 어떠한 계급관계에 기초해 있든, 심지어 계급관계로부터 해방된 사회에서도 여전히 도덕적 규율로써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가 존속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갖고 전근대 사회에서의 도덕과 법을 분석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그 사회가 어떠한 것을 목적으로 도덕과 법을 정초지었는가 하는 점이 된다. 이는 전근대 신분제적 사회와 근대 자본제 사회 간의 차이를 전제로 해야 명확해지는데, 근대 자본제 사회로의 이행이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 달리 표현하자면 자연과 사회와의 분리를 지표로 한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근대사회의 시작은 정치가, 경제가, 더 본질적으로는 '사회' 그 자체가 신분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신'의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냈으며 따라서 인간의 노력여하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사회계약론의 함의는 주권의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라기보다는 계약을 통해 주권의 소재를 변경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정치체제 또한 새롭게 조성할 수 있다는데에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예속신분제적 관계에 기초하여 사회적 관계를 고정시켜 영구불변의 상태로 만들고자 그러한 사회질서에 도덕적 규범의 가치를 부여하려 노력하였다. 자연과 사회는 그렇게 결합하였고, 정치와 경제 또한 그렇게 통합되었다. 신분제적 분업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전제로 하는 인간 노동력의 유동성은 오직 근대 자본제 사회에 도달했을 때만 사회의 보편적 원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전의 전근대의 예속신분제 하에서는 인간 노동력을 그의 특정한 사회적 직군과 그의 공적인 위치를 결합시켜 사회적 분업관계 속에 배치해두었기 때문에 그로부터의 이탈은 사회질서 전체의 교란 혹은 붕괴로까지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회적 분업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초월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에 의해 수천년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이는 달리 표현하자면 지배의 합리화와 정당화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작용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의 '주자학'을 비롯한 전근대적 사고체계 일반은 적어도 근현대에 접어든 시점에서는 역사적 분석의 대상으로서만 가치가 있지, 그 자체로 현대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지적 체계로 자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 사상사적 탐구대상에서 '성악' 담론의 부활을 위한 주자학으로의 전환
하지만 김철호의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상술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는 전연 다른 방향에서 사안에 접근한다. 그는 앞서 엥겔스의 관점에 따르더라도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는 규율과 마찬가지로 시대, 계급, 민족, 언어 등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가치개념'들이 있다고 지적하는데 "선악"(善惡) 개념이 바로 그런 것이라 지적한다. 만약 선악 개념을 축으로 하여 주자학을 비롯한 유학 사상 전체를 재해석하고 그로부터 오늘날의 '선악' 개념을 사유하는데 유의미한 기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주자학 연구의 가치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다.(김철호, 2023 : 13) 그는 현대 사회가 혐오, 증오, 악마화, 갈라치기 등의 이분화된 선악 담론을 채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해석을 제공해줄 보펴적 윤리학의 부재가 개인들로 하여금 "내적 불안감에 대한 설명을 찾지 못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고 지적한다.(김철호, 2023 : 18) 미디어 매체를 가득 채운 극단적인 혐오 표현들이 타자를 적이나 악마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폭력이 난무한 사회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자학의 '선악론'은 이러한 세태를 극복하는데 있어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김철호는 그것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주자학에 선악론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주자학 연구사에 있어 '선악' 개념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었다. 이는 주자학을 포함한 유학 내부에 '선악론'을 다룬 저작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철호는 주자학을 깊게 연구해보면 오히려 혼란스러워보이고 그다지 언급되지 않는 듯한 '선악' 개념이 주자학 내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자학이 재해석하는 다양한 개념들이 모두 '선악'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김철호 : 2023 22-23) 시대와 역사적 배경을 달리 하는 다양한 개념들이 주자학 내에서 하나의 체계로 종합되며 '선악' 개념과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개념들로는 주희가 생각했던 선악의 문제를 해소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컨대 '리'는 왜 도입되었을까? "절대선을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기'는 왜 동원되었는가? "뿌리 깊은 악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김철호, 2023 : 27)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하여 제1장 선진유학의 선악 개념에서부터 출발하여 제2장 한당유학의 선악 개념을 통해 주자학의 출현 이전의 유학 내부에서 이뤄졌던 다양한 '선악' 개념을 다룬다. 제1, 2장을 통해 주자학의 재료가 되는 선진유학과 한당유학의 주요한 개념들을 습득하고 나서야 주희가 어째서 선악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였는가를 제3장에서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분석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선악'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유학통사(通史)를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통사적 인식에 기초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악론,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의 다양한 서구적 종교들과의 '비교사'적 접근까지 행하는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통사와 비교사의 접목을 통한 주자학의 역사적, 그리고 "논리적" 위치를 세우고자 함이 바로 이 책의 주요한 목적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이러한 목적을 이 저서가 어느정도 달성했는가에 대해 사상사를 전공하지 않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적어도 '논리적'인 차원에서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선'과 '악'의 관계에 있어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입장은 주자학을 단순히 과거의 사유체계로 치부하지 못하게끔 하는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선'과 '악'이라는 2항을 갖고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총 4가지밖에 없다. 즉 '악'이 '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주자학적인 인식, '선'과 '악'은 각자 독자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사마광 등의 이원론적 관점, 반대로 '선'이 '악'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등의 애덤 스미스 이래의 현대사회의 관점, 그리고 '선'과 '악'의 구별 자체가 의미없다는 노자, 니체 등의 관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유형화를 통해 '선악'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인류지성사의 전개과정을 대별하고 비교사적으로 각각의 사유가 지닌 특질을 파악함으로써 현대 사회에서의 선악 담론을 보다 세련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분류법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노자와 니체의 경우에는 선악 구별을 하지 말자는 입장과 '선'이 '악'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입장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인위적'인 선악 구별에 기초한 '악'에 대한 징벌이 '선'을 '악'으로 바꾸어놓기에 "선이 악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입장으로 분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도 딱히 4가지의 유형에 딱 맞춰서 특정한 사상들을 분류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리적 위상을 부여하는 게 주자학을 과거의, 이미 지나간 사유체계가 아니라 현대적인 사유체계이자 보편적인 담론으로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주자학의 성악론
김철호에 따르면 주자학은 국내외적인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던 중국 송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성립하였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인구수와 세수가 감소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군비 증가와 정부의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져 모든 지배층이 거리낌 없이 탐욕을 드러내고, 일반 인민들은 기아와 착취로 연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김철호, 2023 : 103) 이러한 시대적 혼란기 속에서 주자학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악'을 줄이고 '선'을 권할 수 있는지 그 논리적 근거를 찾고자 하였다. 어떻게 하면 '공맹의 도'를 실현할 수 있는가? 이 병들어 있는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사회적, 도덕적 혼란을 제거하고 유학의 가치를 '절대화'할 수 있는 이론체계를 구축해야만 했다.(김철호, 2023 : 105) 주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인간의 선함과 악함"을 종합적으로 설명해주고 그에 따라 시대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이라 여겼다.
주자는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리'(理)를 중심으로 하는 방대한 형이상학을 구축하였다. 본래 공자와 노자에게서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리'를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삶의 방향성을, 가치체계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리'에 대한 김철호의 설명을 보면 주자에게 있어 '리'는 플라톤에게서 있어 '이데아'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리'는 이 세상의 설계도이자 "사물이 지니는 고유한 결"로서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개별자에 갇혀 있지 않고 온 우주의 원리로까지 추상화될 수 있다. 주자에게 있어 '리'를 사물의 측면에서 볼 때는 '리'라 부르지만, 사람의 마음의 측면에서 볼 때는 '성'(性)이라 부른다.
이 지점에서 이 저작에서 가장 논리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나타나게 된다. 김철호는 사물, 자연, 우주 등의 원리에 따라 인간이 '선'하게 살게 된다는 주자의 주장이 '자연주의의 오류'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일치시키는 주자의 사유가 흄이 말한 '자연주의의 오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흄을 비롯한 근대 서양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일 뿐 보편적 시각"이라 볼 수 없다고 말한다.(김철호, 2023 : 129) 그러면서 서양적 세계관과 동양적 세게관은 애당초 시작 자체가 달랐고 각자가 나름의 역사적 독자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치와 사실의 구분을 중시하는 서구적 기준에 기초하여 동양적 사유를 판별해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하는데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비교사적인 입장에서 동양의 선악론과 서양의 선악론을 비교할 필요가 있는가? 그저 전근대 사회의 대부분의 사유는 "가치와 분리된 존재는 없다"는 점에서 공통되었으며 근대의 분업체계와 다른, 아직 미분화된 사회체계 속에서 가치와 사실의 분리가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지적하듯이 현대 사회 또한 궁극적으로는 진선미의 일치로 대표되는 가치와 사실의 통합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오류로 보기보다는 지향해야 할 '원형' 혹은 무언가로 보는 게 좋지 않겠나, 정도로만 정리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한다.
김철호에 따르면 주자는 인간의 도덕법칙과 자연세계의 자연법칙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연이 선하기에 인간 또한 선해질 수밖에 없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펼쳤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품게 되는 지점은 그렇다면 왜 주자는 자연이 선하다고 가정했던 것일까, 하는 부분이다. 김철호는 "자연세계를 선하다고 보는 주희의 시각은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뒤에 그것은 동아시아인들이 처해 있던 자연 "환경과 관련이 깊"다고 답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 지역은 평탄한 농지, 낮은 산, 항해가 가능한 강으로 이루어져 농경에 적합"한 지역으로, 이런 지역에서 사는 인간은 "천지의 균형과 사계절의 순환 속에서 호흡하고 일하"는 와중에 "자연법칙의 신성함과 절대성을 저절로 체득"했을 것이라 한다.(김철호, 2023 : 126) 물론 자연재해와 같이 두려운 일도 있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탄생, 성장, 번식, 죽음 등의 동일한 생애주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주희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생각하게 하였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했다기보다는 자연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에 자연이 인간에게 '선한 존재'라는 의미인데 다소 동의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김철호에 따르면 이처럼 자연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그 본래적인 성격은 "생명을 낳는 것"(生物)에 있기 때문에 주희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자연과 인간에게 내재된 덕목은 같다"고 여겼다고 지적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인'(仁)이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고유의 법칙에 따라 우주에 "생명력을 피우려는 의지"(生意)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Arete), 중용 등이 생각나는데 이 점을 좀더 강조해서 비교사적으로 접근했더라면 저작의 완성도가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있다.
주자가 이처럼 자연과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는 까닭은 그렇지 않고서는 선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남학파의 호굉이 우주본체로서의 성(性)은 선악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의 개념에 의해 온전히 포섭될 수 없는 무언가로 보았다면, 주희는 그에 반대하며 성 자체가 도덕적인 의미에서 '선하다'고 보았다. 선한 본성으로부터 그것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인간을 선하게 행동하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의 일치 속에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증명하였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선한 본성을 지닌 자연세계에서,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왜 '악'이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 된다.
앞서 논리적인 경우들을 4가지로 구성하면서 선악이 각각 다른 기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의 '악'은 도저히 제거할 수가 없게 된다. 악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근거'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한다는 말은 곧 인간 자체를 제거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이 악으로부터 비롯된다거나 선악의 어떠한 구별도 없어 어떠한 행위도 용납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선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주희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주자학은 이러한 시도에 맞서서 선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그것을 전제로 하여 악을 설명해야만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이 책의 제목인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관점이다.
김철호에 따르면 초월적 근원으로서의 성(性)이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법칙을 정당화해준다면 그로부터 도출된 "현실의" 선악은 각각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 주자는 다소 추상적인 이상향으로서의 성선의 선과 현실에 나타난 선악의 선, 그리고 선악의 악을 구별함으로써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연상시키는 설명을 펼친다. 성선의 선은 그와 대별되는 어떠한 악도 없이 그 자체로 정립되어 있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선악'의 선과 '선악'의 악은 각각 선과 악을 상대로 하여 정립되어 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만약에 성악의 악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악의 '리'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초월적 영역으로서의 악의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에 악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주희는 초월적 가치로서는 오로지 성선의 선만이 존재하고 이 선은 홀로 존립할 수 있다고 가정한 뒤에 그것의 복제로서의 선악의 선과 선악의 악이 각각 따로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적 차원에서는 모두 선하지만, 현실의 차원에서는 그로부터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선악의 선이 선악의 악에 의해 제압당할 수도 있게 된다.(김철호, 2023 : 152-153)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의 악을 만드는가? 악의 근거는 무엇인가? 김철호에 따르면 주희는 그것을 '기'(氣)에서 찾는다.(김철호, 2023 : 171)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주희는 초월적 근거로서의 '리'를 본래 선하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선한 '리'로붙터 '악'이 도출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은 분명 서양 지성사에서 '선'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왜 악을 냅두는지 설명하는 과정과는 전연 다르다. 주희와 같은 유학적 사유체계에서 악은 그저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누구 때문에, 누군가의 책임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자연의 원리 속에서 그렇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절대악'이라 할만한 무언가, 태어났을 때부터 악한 사람을 마주하는 현실의 인간으로서는 이러한 설명이 다소 부족하다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자는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악'에 대한 '선'의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주자에 따르면 본래 선한 '리'와 "바르고 치우침, 어둡고 밝음, 맑고 탁함, 통하고 막힘" 등의 모순적 특질을 지니고 있는 '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그 자신의 본래적인 '설계도'인 '리'에 따라 설계되어 있지만 그것을 만드는 '기질'의 차이에 따라 그 형태와 모습을 부여받게 되면 그것이 곧 그들의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쉽게 말해서 설계도는 같더라도 사용되는 재료의 차이에 따라 전연 다른 물건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기'가 고정되어 하나의 형태로 굳어졌을 때 그 기질에 기초한 인간의 성품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근대 유학의 이데올로기적 특질이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본성의 영역에서는 모두가 '선'하고 그런 점에서 "평등"하지만 부여받은 기질에 청탁, 편정, 통색 등의 차이 내지는 오행의 차이가 달라지고 그러한 차이가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에 반영될 때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것은 곧바로 현실세계에서의 "참된 존재와 열등한 존재" 간의 위계질서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진다. 전근대적인 예속신분제는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모두 같은 인간으로서 '본성'에 있어서는 평등할지 몰라도 '기질'에 있어서의 차등에 따라 신분제적 차등이 형성되고 고착되며 신분제 전체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사회적 위계 속에서 높은 위치에 가까울수록 성인에 가까워지고, 그 반대에는 점차로 소인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리고 성인에 의한 소인의 계도와 지배 또한 도덕화된 원칙에 따라 정당화되는 것이겠다.
 아무튼 주희는 이러한 기질의 차이를 통해 '악'의 근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근원적으로는 선하지만 그 기질의 발현에 따라 물욕이 강해지며 악해지거나 반대로 약해지며 선해질 수도 있다. 즉 선악은 "본성→기질→물욕→선 또는 악"의 순서대로 발현된다.(김호철, 2023 : 188) 그런데 이러한 작용은 '필연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필연성에 따라 인간의 자유의지는 박탈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태어났을 때 정해진 기질에 따라 선해지거나 악해지는 게 결정된다면 거기에 어떠한 인간의 자율성이 개입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악에 대한 책임은 그렇게 박탈되는 것 아닌가? 
주희는 인간 본성이 반드시 '기질'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그런 점에서 기존의 성즉리에서 벗어나 장재의 기질지성에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자의 기질지성이란 인간이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인간은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 리와 기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듯 선과 악이 섞여 있지만 그 본래적 순서에서는 본성이 기질을 앞선다는 점에서 선한 본성이 먼저 발현하게 된다. 거의 동시적일지라도 선이 악에 비해 먼저 발현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아무리 악인이라 하더라도, 책의 비유를 빌리자면 나무가 점점 더 썩어들어가고 있더라도 거기에는 여전히 선한 본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앞서 던져졌던 질문이 다시 나오게 된다. 도무지 갱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족속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그런 이들조차도 주자에게 있어서는 아직 그 내부 어딘가에 인간적인 선함이, 선한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구제의 여지가 있다.

 

4. 선이 악으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사회에서의 성악이란?
이상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주자는 자신의 '도덕형이상학'을 체계화함으로써 현실의 예속적 신분제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왜 모든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인간과 자연은 본래적으로 '인'을 실현하도록, 다시 말해서 보다 많은 생명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 몸을 구성하는 '기질'이 그러한 '본성'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갈고 닦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주자학의 교훈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고자 한다. 현대 사회는 '이기적인 개인', 즉 '악'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공리와 결합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이런 사회에서 악을 악으로만 대한다면 그것은 또다른 폭력으로, 또다른 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주자가 그랬듯이 저자 또한 악인 속에도 선한 본성이 있으며, 그러한 자기 내부의 선한 면을 마음수양을 통해 드러내고자 수양해야만 한다. 악인이 드물듯이 선인도 예외적이다. 악은 평범하며 우리 모두가 선인도 악인도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꾸준히 성(誠)의 윤리에 따라 자기수양을 거듭하며 선한 본성을 발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분명 일정한 정도의 울림을 준다. 주자학을 '현대화하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하였듯이 주자학의 논리에는,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저자의 윤리학에는 가장 큰 난점이 존재한다. 바로 인간이 본래 '선하다'는 주장 자체를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 또한 현대의 진화심리학이나 생물학의 결과물을 통해 '이기적인 유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법칙과 도덕법칙 모두가 '선'(善)에 기초하고 있다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이 부분에 대한 보완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뤄져야 할 것인가? 자연과 인간의 대립적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지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근대 자본제 사회에서의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것의 통일적 관계의 회복으로서의 전근대적 사유체계의 '현대화'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주자학이 현대사회에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보다 급진적인 사유로 나아갈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덧붙여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윤리학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는 '가상'의 세계에 속한다. 윤리학은 오히려 '실천' 속에서 정립되어야 할 무언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저자가 생각하는 '주자학'이 현대적인 '실천'에 있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풀어주었으면 한다. 저자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는 아마도 교육과 계도에 보다 중점을 두자는 것이 될 것 같은데 주자학 또한 그 지점에서 현대화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덧붙이며 서평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주자학을 갖고 이렇게 흥미로운 주제의 저서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능력이 돋보이지 않는가 한다. 또한 이 책은 통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자학을 비롯한 유학 사상 전반을 살펴보기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 기초해서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체계들이 선악론을 기준으로 하여 비교될 수 있다면 이 책이 제시한 비교준거로서의 선악론의 가치는 학술적으로도 점점 더 커질 것이고 또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저자의 다음 저작이 궁금해진다. 일독을 권한다.

 

작성자: 손민석

게시글 원본: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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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자학에서 본 선악의 실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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