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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고 요약문: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연구결과물, 기타 파일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 기초연구/공동연구과제
과제코드 2001-10
연구과제명
  • 국문 : 박정희시대연구
  • 영문 : -
연구책임자 이완범
공동연구자
  • 이준식 / 본원 / 특별연구원
  • 박태균 / 서울대학교 / 교수
  • 홍성률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 전문위원
  • 문현아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 연구원
연구기간 2001-03-21 ~ 2001-12-15 연구형태 학술논문
연구목적 및 배경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을 잡는 데 기반이 되었던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19615 · 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하기까지 박정희는 사회와 군대내의 부패한 기존질서에 불만을 가진 비판세력의 리더였다. 박정희의 전력(前歷)과 장면에 대한 지지 때문 쿠데타 이후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가졌던 혁명 주도세력은 반공을 국시로 선언함으로써 미국의 압력을 무마시켰다(미국은 그를 전향한 공산주의자로 분류하였다).
   1963년 예편 이후, ‘경제개발’(근대화)을 기치로 내걸어 민정 이양후 대통령 당선에 성공한 그는 한 · 일회담을 통하여 정권의 물질적 토대를 확보하게 된다. 이후, 재벌과 밀착하고 대미 · 대일 의존적 수출드라이브 전략을 채택하여 물적 기반을 나름대로 확대시키는 데 성공한다. 경제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월남파병 · 중동특수 등이 이루어져 어느 정도 극복하였으나, 장기집권에 기인한 정치적 도전에 대해서는 강권적으로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1972비상사태라는 미명 아래 영구집권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성숙된 민주화운동과 YH사건 등 노동운동, · 마항쟁 등 민중항쟁에 직면하여 1979년 후반기에는 극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 블록 내부의 분열을 자초하여 결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격 당하고 사망하였다(19791026).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거의 대부분인 19년간을 최고권좌에 있었으며 17년간을 대통령(5 · 6 · 7 · 8 · 9)의 위치에 있었던 박정희는 전형적인 군인 출신의 독재자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를 비판하면서 단행한 정치개혁의 결과는 이승만 정권의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었으며, 초기의 과단성 있는 개혁은 정권이 연장될수록 희석화 되었다. 외교정책이나 국내정치의 이념면에서 민족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외피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미 · 대일 의존적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가 최대의 과제로 제시하였던 것은 역시 조국근대화 즉 경제발전이었다. 이에 대한 평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는 생산력의 발전이 미약했던 1960년대 초의 상황에 조응하는 나름대로의 현실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경제개발 제일주의는 왜곡된 인식에서 나온 잘못된 처방일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사회에 변혁하기보다는 정책적으로 재편성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오늘날까지 축적되어 심층적인 수준에서 표출되고 있다.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방법
   이 연구는 사료의 분석을 통한 실증적 검증을 주요한 방법으로 삼는 역사적 접근법(historical approach)을 사용해서 박정희 시대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관한 사실확인이 아직 미흡한 상태이므로 미간행 내무 문서와 공간된 외교 문서 · 증언 등에 의존한 역사적 고증방법과 연대기적 서술(chronological description) - 서사적 방법(narrative method)이 가장 설득력 있고 유용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연구방법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문헌자료 중심으로 찾아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정확히 기술하는 동시에 그 일들 사이의 관계성을 추출해 내는 방법이다. ‘정치인의 역할저력(심층동인)’ 등을 연구하는 국제관계사 방법론이나 실증주의적인 이론적 분석’(theoretical analysis)의 유용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이들 방법론은 역사연구의 초보적 전제인 사실 확인 작업을 한 연후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철저한 자료수집을 토대로 사실관계를 발굴하고 체계적인 정리하여 균형 있는 해석, 실증적인 분석과 연구를 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작업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이론적 방법론을 제한적으로 원용하는 수준에 그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진실이 객관적 사료에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실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는 더욱 고차원의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방법론이 바로 주관적 방법인 비판적 해석이다. 해석학(hermeneutics)적 방법은 주관적인 행동(action)과 객관화된 사실(fact) 뒤에 실재하면서도 숨겨진 의미(meaning)와 진실을 규명해내는 유용한 도구이다. 따라서 객관적 사료 가운데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드러났을 때 해석의 방법을 과감히 채용하여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이해의 방법은 보조로 채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의 남용은 학문적 업적 자체를 상대화시키고 객관적 자료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하므로 우선 문서를 통해 실증을 한 연후에 진실이 은폐되었다는 확증이 설 때 제한적으로 적용할 것이다.
   또한 사회-경제적인 서술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수치가 인용되는 등 초보적인 통계 방법도 원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내용
   현재까지의 연구수준을 반영한 종합적 연구를 목표로 함.

 

   1945년 해방전후부터 시작된 현대 한-미관계는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해방직후 한국의 정권수립과정에서부터 미국은 후견자로서 한국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왔다. 한국현대정치사를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한국정치에 끼친 영향에 대한 1차자료에 토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박정희 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19488-15 정부수립과정에서부터 1950년대의 이승만제거계획, 19604-19, 19615-16, 197910-26, 19805-17 등 정권교체기에 미국은 일정한 역할을 행사했다. 전환기에 미국이 한국정치에 개입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기존 연구에서도 지적되고 있으나 미국은 비밀해제 문서와 한국자료를 교차 비교하여 엄밀하게 실증한 연구는 아직 없다. 박정희 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미국 자료는 메릴랜드(Maryland)주 컬리지팍(College Park)의 내쇼날아카이브(the National Archives; 국립문서보관소; 약칭 NARA, 혹은 NA) 기밀문서와 1986년에 완공된 카터기념도서관(Jimmy Carter Library and Museum; 내쇼날아카이브 체계에 의해 운영됨) 자료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해당하는 한국관계 비밀 자료를 이미 1970년대 이후에 공개했으며 최근에는 1970년대 자료 등을 공개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의지를 제어했던 포드 행정부의 비밀문건이 1998년에 비밀해제되었던 것이다.
   특히 카터와 박정희와의 관계는 한국현대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인데 카터는 1976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전임대통령 포드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제3세계와의 외교에서 인권문제를 강력히 제기하였다. 한편 제3세계의 나라들에서는 민족주의적 경향성을 지닌 외교로 대응했다. 한국의 경우 유신체제의 인권탄압상황에 특히 주목했던 카터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특유의 도덕외교(Moral Diplomacy)를 수행했다. 이에 더하여 주한미군철수 문제까지 제기하여 한국정부를 압박했다. 19773월 9일 카터는 주한 미 지상군을 4-5년에 걸쳐 철수한다고 언명했다. 이 와중에 박정희 정부는 냉전체제 양대축의 하나인 적성국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는 등 미국과 갈등하게 되었다. 또한 자주국방을 강화하려고 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력을 축적하려고 했다. 인권문제와 주한미군 철수, 자주국방 등 핵심이슈는 이후 양국 정상 간에 계속 논의되었다. 결국 19791026일 박정희가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한-미 갈등은 진정되었으며 1981년 이후 레이건 정부의 수립으로 한미관계는 다시 밀월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최근에 공개될 것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비밀문서를 색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정치에 미친 미국의 영향력을 사실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 미국의 비밀자료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본 연구자는 우선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주 컬리지팍 소재 국립문서보관소 분관에서 6개월 동안 1970년대 문서 등을 발굴한 후 조지아주 아틀란타 소재 카터센터에서 자료 조사와 연구를 병행할 예정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숨겨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연구의 시대적 범위는 19615-16군사정변에서부터 197910-26사태까지의 박정희 시대이다.
   미국은 자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1945년 한국에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한반도가 적대세력의 손에 넘어가거나, 적어도 그럴 위험이 있는 회색지대로 남아 있도록 방관하지는 않았다.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의 미군정 3년간은 한국에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공산정부(=친소정부) 수립 방지에 1차적 목적을 두었었다. 이런 맥락에서 미 국무부는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1946년 중반 이후 좌우합작을 지원했으며 진보적 개혁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간파가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미국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1947년 후반 이후 이승만 세력과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 국무부는 다른 기관보다 더 이승만을 비판적으로 인식했지만 미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 외에 별다른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과 한민당이 결별하고 이승만이 미국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자 미국은 이승만을 확고하게 지지하기보다는 한민당을 비롯한 야당의 합리주의적 온건파’(와 자유당내 온건파; 1950년대 후반기) 세력을 대안으로서 고려하게 되었다. 1950년대 전반기에는 그 개입안이 보다 노골적이었는데 1952년 정치파동 직후 장면 혹은 이종찬 장군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려고 시도한 것이나 19535월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 그 예이다. 물론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은 이승만의 대일강경노선이 한일관계정상화를 통해 동북아 지역의 안정을 보장하려는 자국의 입장과 배치된다고 판단했으며 이러한 견해차이가 제거를 고려한 한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0년대 후반기가 되면 한국의 독립 국가도 그 체제가 정비되어 이전 시기와 같은 노골적인 내정 개입은 입안되지 않았으며 대신 여야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개혁세력을 지원하는 식의 포스트이승만대비책을 입안했던 것이다.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대 후반기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으로 파생되는 정치 위기가 국가 존립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미국은 자유당 강경파 중심의 극우 세력이 주도하여 이끌어 가는 정국의 상황이 자칫 공산주의 세력을 유리하게 만드는 정치적 위기로 발전할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자유당 온건파가 진보적 개혁을 시도하여 공산화를 방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1958년 국가보안법 파동에서 자유당 온건파가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자 미국은 1960년에 이르면 합리주의적 야당이 진보적 개혁을 행해 공산화가 방지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는 1946년의 좌우합작 지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국무부의 반혁명적인 개혁 추진 정책이다. 그러나 결국 미국의 기대는 달성되지 못하고 4-19라는 혁명적 방법에 의한 정권교체가 일어났으며 미국은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하야를 强勸함으로써 혁명을 개량화할 수 있었고 허정과도정부의 파괴 확대 방지-질서 회복 노력을 지지했으며 장면정부의 수립을 후원했다. 그러나 장면정부가 사회개혁의 열기를 잠재우지 못하자 미국은 여러 가지 대안(contingency plan)들을 고려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는 이러한 대안 중의 하나였다. 미국이 박정희의 계획을 처음부터 후원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쿠데타 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미국은 무능력한 정부보다는 안정된 정부를 선호했다고 할 수 있다. 19615-16 직후 미국 정부는 박정희의 좌익전력 때문에 즉각적인 승인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반공을 국시로 내걸자 사실상의 승인절차를 밟아나갔다.
   미국은 한국정부 수립 이후 조정자의 위치에서 여야간의 타협을 추구했으므로 독재정권의 전횡을 견제했다. 미국은 원칙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원했지만 한국의 정권변동에 미쳐 온 영향이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므로 이승만 정권에서나 5-16 이후의 민정이양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자유민주주의 수호 압력 행사와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일련의 권위주의적 정권(유신체제나 전두환 정권)을 사후 승인 내지는 지지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독재지지민주화 권유사이에서 오가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으며 왜 이렇게 조정자와 직-간접적인 개입자의 위치를 넘나들었을까? 이것은 그들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대답될 수 있는 의문이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사회혁명과 공산화를 방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한국정치를 비롯한 세계에 개입했다. 독재를 혐오하기도 했지만 이는 독재정권의 지속이 사회혁명과 공산화를 가능케 할까봐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혁명은 더욱 더 혐오했는데 이것이 공산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약 미국에게 사회혁명과 독재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들은 당연히 독재를 선택했다.
   박정희 정권은 닉슨 독트린 후 자주국방을 추진했으며 핵개발을 추진하는 등 미국의 군사적 지배를 벗어나려고 했다. 특히 냉전체제하 미국의 잠재적 적이었던 소련과 관계개선을 시도하려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이 미국에 의해 퐉되었으므로 미국은 한국을 더욱 더 견제하려고 했다. 이러한 압력은 카터행정부 수립 후 주한미군 철수 압력으로 구체화되었으며 한국은 한층 더 자주국방을 추구하여 양국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카터는 한국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민주화시키려고 인권문제를 제기했지만 한국의 소련 경도로 나아가게 되자 한국정부 비판의 강도는 약화되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감축으로 다시 사실상의 백지화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비판적 인식은 해소되지 않았으며 여러 대안을 고려하다 결국은 197910-26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미국의 개입 목적(혁명방지)과 그 방식(독재견제와 조정자 역할 수행)은 미국이 한국에 개입한 1945년 이래의 역사가 만든 축적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해방직후의 상황부터 살펴보아야 대응 방식의 변동과정을 보다 근원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미국은 미군정 시기에 한국정치를 직접 지배하는 참여자 내지는 행위자였다가 1950년대 후반기에는 다소 뒷전에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정치의 현장에 투입되어 직접 행위하는 행위자(actor)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도움을 행사하는 지원자 내지는 후견인으로서의 변화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방법 면에서 독재를 견제하고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양식은 후견인이 행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948년 이후의 시기에도 국면에 따라서는 후견인과 조정자의 위치를 넘어서는 개입을 하기도 했다. 1960년과 1961년의 정권교체기에 단순한 조정자의 역할을 넘어서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본 연구의 주된 대상 시기인 1970년대 후반 들어 미국 정권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양되자 한국에 대한 압력은 조정자 역할에서 이탈하여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내정간섭으로 여겨질 정도의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5.16 쿠데타의 발발 배경과 원인
         ··············· 홍석률(서울대 강사, 문학박사)

머리말

1. 4.19직후의 정치 · 사회적 불안
   1) 장면 정권의 위기
   2) 남한 체제의 위기

2. 5.16 쿠데타 주도세력의 형성
   1) 1950년대 한국군의 정치화
   2) 장면 정권기 한국군 동향과 쿠데타 세력의 결집
3. 5.16 쿠데타의 발발과 성공
   1) 쿠데타의 발발과 장면정권과 유엔군 사령관의 대처
   2) 쿠데타에 대한 민간의 반응

맺음말

 

박정희 군사정부 연구: 미국의 개입과 정치변동(1961-1963)
         ···············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

1. 머리말

2. 윤보선의 초당적 거국내각안과 미국의 구상
   1) 사전접촉설과 윤보선의 초당적 거국내각
   2) 윤보선을 이용한 미국의 구상

3. 통화개혁과 일부 정치세력의 퇴진

4. 민정이양을 둘러싼 공방과 1963년의 과도정부안
   1) 육사 8기 그룹과 민주공화당의 창당
   2) 민정이양을 둘러싼 미국의 첫 번째 개입
   3) 미국의 두 번째 개입과 과도정부와 중도파 정당 구상

5. 맺음말

 

박정희와 미국: 쿠데타와 민정이양 문제를 중심으로, 1961-1963
         ··············· 이완범(한국정신문화연구원)

I. 서론

II. 5-16군사쿠데타와 미국
   1. 미국의 한국문제 대안 모색과 쿠데타 징후 포착
   2. 쿠데타 직후 미국의 즉각적 반응: 서울과 워싱턴의 불협화음
   3. 장면을 기피하고 윤보선을 만난 미국: 쿠데타를 받아들이다
   4. 장면 내각총사퇴와 쿠데타의 승리
   5. 쿠데타의 배후와 미국
   6. 박정희의 반공 표방과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최종 승인
   7. 한국 군부의 개혁과 경제개발에 대한 미국의 기대
   8. 박정희의 196111월 미국방문: 경제개발계획과 민정이양 공약

III. 민정이양 과정: 쿠데타세력-미국의 갈등과 타협, 위장민정
   1. -미간의 민정이양 일정 논의
   2. 2-18민정불참약속과 미국의 중재
   3. 박정희의 3-16군정연장선언과 미국의 민정이양 강요
   4. 4-8성명과 민정이양 추진
   5. 미국의 박정희 출마 양해: 순수민정에서 위장민정으로
   6. 양대선거와 미국

IV. 맺음말

 

박정희 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성 과정
         ··············· 이준식(한국정신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사회학)

1. 머리말
2. 일본 제국주의의 파시즘 이데올로기
3. 일제 강점기 박정희의 세계관 형성
4. 박정희 시대 초기 지배 이데올로기와 일본
5. 맺음말

 

박정희 시대 문화정책: 가부장 담론의 재생산
         ··············· 문현아(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I. 들어가면서

II. 가부장적 문화지배
   1. 문화지배의 이론들
   2. 가부장제의 의미

III. 대중문화를 통한 문화정책: 영화와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1. 1960년대 가부장 담론의 현대화
      1) 다시 서는 근대적 남성
      2) 현대의 남성/전통의 여성
   2. 1970년대 가부장 담론의 강화
      1) /노동의 이중적 억압
      2) 성적대상으로의 공고화

IV. 박정희 시대 문화정책의 특성

V. 나오면서

참 고 문 헌

연구결과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오늘날의 중요한 논쟁 중 하나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박정희 시대에 대한 인식을 학문적으로 돕기 위해 기획되었다. 각 연구자별 집필 논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5-16 쿠데타의 발생원인과 발발 (홍석률)
   2. 박정희 군사정부 연구 (박태균)
   3. 박정희와 미국 (이완범)
   4. 박정희 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 (이준식)
   5. 박정희 시대 문화정책 (문현아)

 

   앞의 세 원고에서는 주로 미국의 비밀문서에 의존하여 박정희 시대 초기인 군정기(1961-1963)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역사적 해석이 시도되었으며, 뒤의 두 연구는 지배이데올로기, 문화정책이라는 다소 이론적인 테마로부터 박정희시대를 보고자 하였다.
   홍석률 박사는 그의 글에서 5-16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보았으며 박태균 교수는 군정기 미국의 정치개입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완범 교수는 미국이 5-1쿠데타와 민정이양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찰했다. 이준식 교수는 박정희 시대 지배이데올로기가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았고, 문현아 박사는 박정희 시대 가부장 담론의 재생산 과정을 영화와 대중가요라는 대중문화의 장르를 통해 분석했다.

참고문헌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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