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 기초연구/단독논문게재형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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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2001-19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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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정해창 | ||
공동연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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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기간 | 2001-03-21 ~ 2001-12-15 | 연구형태 | 단독 |
연구목적 및 배경 | 전통은, 그것이 “잘못된” 신념들 위에서 이룩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한번 수립되면 좀체로 깨어지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에 익숙해져서 그 전통이 주는 다양한 요소들을 습관화, 의식화한다. 한마디로 전통에 안주해 있으면 위험에 직면할 필요도 없고 삶은 “편하다”. 그래서 이 전통에 도전하는 사람은 매우 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더군다나 그 도전이 전통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이 아니고 전면적인 부정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전통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그 전통의 체제 안에서 모든 것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새로운 시도를 꺼린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가 우선 자신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리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의 타당성을 가리기보다는 그 전통이 주는 위안 뒤로 숨는 경향을 보인다. 하물며 2000년 이상 지속된 철학의 전통을 단번에 부정하고 나서는 것은 대단한 모험일 뿐만 아니라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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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방법 및 내용 | ○ 연구방법
○ 연구내용
(1) Saying and Showing은 Tractatus의 열쇠이다. 「논고」는 표상의 한계를 결정하려는 시도이다. 「논고」는 칸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칸트는 지식의 한계를 그으려고 한 반면에 비트겐시타인은 표상 또는 의미의 한계를 그으려고 하였다. 비트겐시타인에게 논리는 사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따라서 논리는 기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사실언어이기 때문이다. 사실언어는 사실을 표상한다. 논리는 그 사실언어를 가능케하는 것이다. 논리는 명제와 명제에 의해서 지시되는 세계가 공통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통의 뼈대가 표상을 가능케하는 것이다. 논리는 표상되거나 말해질 수 없지만 보여질 수는 있다. 논리의 명제는 senseless. 논리명제는 세계의 논리형태를 보여준다. 세계를 초월하는 것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nonsensical(unsinning).
(2) 「탐구」는 「논고」를 비판한다. 그림이론을 부정한다. 즉 모든 단어는 의미가 있고 의미는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이라는 주장을 부정한다. 비트겐시타인이 비판하는 또 하나(어거스틴)는 의미가 심적이고 따라서 사적이라는 관념이다. 여기에서 비트겐시타인과 실용주의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실용주의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는 목적있는 활동에서의 그 역할이다. 실용주의는 이런 점에서 contextualism이다. 이렇게 볼 때 비트겐시타인은 묵시적 실용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the meaning of a word is its use in the language” (PI, 43) 그리고 “Words are also deeds” (PI, 546)라는 언명에서 우리는 비트겐시타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3) 비트겐시타인은 철학적 견해로서 실재론을 공격한다. 실재론에 의하면, 어떤 판단의 타당성은 인간의 판단과 독립적인 성격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렇다면 비트겐시타인의 상대주의는 conventionalism인가? 그의 몇 개의 주요 언명들을 들어보자. “A doubt that doubted everything would not be a doubt” (OC, 450) “A doubt without an end is not even a doubt” (OC, 625) “Doubting and non-doubting behaviour. There is the first only if there is the second” (OC 354) “Can I be doubt at will?” (OC 221) “At the foundation of well-founded belief lies belief that is not founded” (OC 253) “Explanations come to an end somewhere” (PI, 1) 비트겐시타인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형태의 상대주의는 conventionalism 또는 사회적 상대주의이다. 왜냐하면, 타당성을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실용주의와 양립한다. 왜냐하면 타당성을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공동체의 관행, 그 공유된 삶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context 자체는 집단적 사회적 전승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관행에 의해서 주어진 것 따라서 변경될 수 있고 포기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존재가 자연적 사실들과 양립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들은 사회에 있는 다른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강제적일 수 있다.
(4) 비트겐시타인은 implicit pragmatist이고 동시에 conventionalist이다. 철학적 저작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난센스. . . . 철학자들의 명제나 질문 대부분은 우리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데서 발생한다. . . . 가장 심오한 문제가 사실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T. 4.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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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
연구결과 | 비트겐시타인이 이런 철학의 종언 논의에서 의미있는 이유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그 자신속에서 이와 같은 양극적인 철학방식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플라톤에 의해서 시작된 서양철학은 니체에서 그 한 주기를 마감한다. 니체에게서 신의 죽음이 선포되었을 때 형이상학의 보루인 보편적 진리의 궁극적 보증자는 사라졌다. 소위 객관적으로 실재에 관하여 이야기를 한다는 형이상학은 이때 그 오랜 수명을 마친 것이다. 객관화된 대상세계의 모든 가능성이 기술문명의 형태로 성취되어 형이상학은 그 가능성을 완전히 소진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추구하였던 본질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본질은 과학주의 또는 언어의 객관화라는 옷을 입고 이십세기에 다시 등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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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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