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방법
(1) 문헌을 수집하고 이를 편집한다.
(2) 한불관계 역사학자들의 공동 세미나를 개최한다.
(3) 문헌연구와 공동세미나를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료해제와 연구논문이 들어간 논문집을 발간한다.
○ 연구내용
연구는 문헌연구와 역사 연구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서 진행한다. 문헌연구는 병인양요에 관계되는 (1) 국내측 사료를 수집 · 정리 · 해제하는 작업을 진행하며 (2) 해외 특히 프랑스측 사료를 수집 · 정리 · 해제한다. 역사연구는 병인양요를 재조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부분으로 나누어서 연구한다.
(1) 병인양요의 前史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 천주교의 전래와 포교의 문제, 서세동점과 한국연안에서의 이양선의 출현 등의 문제를 점검하여 병인년의 천주교 박해와 그에 따른 양요의 전개 등을 논한다.
(2) 1866년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에 나타난 정신적 태도
조선의 유교문명과 프랑스의 근대문명의 조우, 천주교 신앙과 유교적 신앙의 조우, 국가 사이의 충돌, 정치의 교착 등의 문제를 연구한다.
(3) 천주교 박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대응과 병인양요
한국 천주교회와 프랑스 교회와의 접촉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로부터 시작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파견과 1836년 모방신부의 입국을 필두로 조선대목구에 프랑스선교사들을 지속적으로 파견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프랑스선교사들의 조선 파견은 곧 조선에로의 밀입국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사학(邪學)으로 규정되었던 천주교는 창립이후 조선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고 프랑스선교사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모방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에 일어난 1839년의 조선 정부의 탄압은 당시 입국하였던 세 선교사들의 죽음을 초래하였고 이후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 역시 같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에서의 천주교 탄압과 박해에 따른 프랑스선교사들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대응을 초래하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조선 정부와 프랑스 정부의 충돌의 문제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국외에서의 프랑스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었으며, 특히 아시아에서 프랑스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의 적극적 후원은 종종 프랑스 극동함대가 담당하곤 하였다. 따라서 조선 천주교의 탄압과 프랑스 선교사들의 죽음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개입은 프랑스 극동 함대의 활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아울러 1860년대 이후부터는 청(淸)과 일본에 진출하였던 프랑스 외교관들의 활동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게 된다. 이처럼 1886년 한불조약 체결 이전의 조선 천주교 박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대응은 먼저 극동함대를 통한 무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고, 비록 청과 일본에 주재하는 프랑스 외교관들의 외교적 시도가 있었다 할지라도, 아직 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조선 정부에게는 프랑스 극동함대의 무력행사가 더 손쉬운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프랑스선교사들의 조선대목구에로의 파견 이후 발생한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과 프랑스선교사들의 학살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어떠한 시도들을 해왔는가를 살펴보고, 병인양요의 과정과 결과들을 살펴보는 한편, 병인양요 이후의 프랑스 외교관 또는 선교사들의 시도들까지 살펴봄으로써 한불조약 체결 이전의 조선정부의 천주교 박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대응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병인양요는 당시 프랑스 정부의 대외정책과 아시아에서의 선교정책에 대한 후원이라는 배경 하에 발생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프랑스 극동함대에 의해 자행된 병인양요에 나타난 프랑스 정부의 조선 정부에 대한 입장과 태도,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조선정부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대외적 태도는 물론 아시아에서의 프랑스 대외정책의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4) 병인양요에 대한 조선측의 반응: 조선의 여론과 해방강화론
병인양요에 관한 연구사를 검토해보면 전쟁의 발생 배경과 전투의 진행 그리고 전쟁의 결과 등에 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기존의 논문에서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한 부분은 병인양요 당시 조선측의 반응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먼저 병인양요 발생 당시 조선측 관료들이나 재야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대해 드러내었던 반응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당시 朝野의 여론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이에 이어서 병인양요가 종료된 이후 병인양요에 대한 평가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검증하고, 이 당시 朝野의 여론이 척사위정론의 형성과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한편, 병인양요는 해안방어정책을 재검토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므로 당시 조정과 민간에서 전개되던 海防論과 병인양요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서 병인양요에 대한 조선왕조 말기의 인식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또 이 인식이 조선인의 對프랑스觀 형성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특정 인식을 밝힘으로써 오늘날 한국사회의 잠재의식 안에 존재하는 對西洋觀 내지는 프랑스에 대한 인식 자체를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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