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 기초연구/단독논문게재형과제 | ||
---|---|---|---|
과제코드 | 2007-29 | ||
연구과제명 |
|
||
연구책임자 | 권희영 | ||
공동연구자 |
|
||
연구기간 | 2007-05-31 ~ 2008-05-31 | 연구형태 | 개인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20세기 초에 동아시아의 사상계에서는 세대구분을 중심으로 하는 감각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이었다. 동아시아 사회가 다소간에 유교적 전통에 따라 長幼有序를 윤리적 덕목으로 간주하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이는 놀라울 만한 감각적 변화였다. 이 변화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 변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는 한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 변화의 과정과 의미를 추적하여 보려고 한다. 20세기초 새롭게 독자적인 감각을 가지고 등장하는 소년의 역사적 의미를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남선에 의하여 잡지의 표제로 사용된 소년이라는 용어가 아동, 청년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근대적 변혁과 감각의 혁신에 관계되는 개념이었음을 밝힌다. |
||
연구방법 및 내용 | 현대적으로 정리된 세대개념에 입각하기보다는 최남선 당시의 시대적 개념에 충실히 "소년"의 용례를 분석하고 그것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고 나아가서 그 시대의 소년이 가진 정체성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여 보려한다.
소년은 러일전쟁 무렵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이며 국민, 희망찬 미래, 근대적 문명이라는 새로운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기호가 되었다. 최남선은 이 기호를 수용하여 그가 창간한 잡지의 제목으로 삼았다. 애국계몽운동 시기 수많은 학회지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少年』이 주목받는 이유는 몇 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이 잡지는 과감하게 한문투 문어체를 포기하고 일상어를 바탕으로 하는 문체를 사용하였다. 그럼으로써 한글이라는 일상어를 사용하는 국민을 위한 본격적인 잡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둘째 소년이라는 용어를 일반화시키고 여기에 혁신적이고 근대적인 의미를 부가함으로써 젊은이로서의 소년이 특별한 사회적 관심을 받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셋째 『少年』을 통하여 근대적 문명을 과감하게 소개하고 애국적 정신을 고취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역사를 환기시켜 현실의 부정적 모습을 극복할 수 있는 진취적 능력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는 것이다. |
||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
연구결과 | 소년은 러일전쟁 무렵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이며 국민, 희망찬 미래, 근대적 문명이라는 새로운 요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기호가 되었다. 최남선의 『少年』은 20세기 초 소년의 정체성을 새로운 방향에서 주조하였다. 몰락하는 조선의 정신이었던 유교윤리 대신 정성과 실행을 강조한 양명학이 윤리적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정신이 大皇祖로서의 단군의 정신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주어진 우리의 지리적 조건은 몰락이라기보다는 비약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설득하려 하였다. 최남선이 스펀지처럼 흡수한 모든 서양과 일본의 근대문명은 이같은 국민정신 속에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이같이 하여 『少年』은 국민주의를 통한 국민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다른 잡지들보다도 그 내용을 보다 국민적으로 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평민적이며 젊은 세대의 반란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지만 잡지가 취한 방향은 선진적이었으며 이후에 전개될 시대적 흐름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少年』에 의하여 표상된 소년은 존재의 현실보다는 당위를 나타내었다. 그것은 서구나 일본 같은 문명국으로서의 타자를 거울상으로 받아들이며 그를 닮으려는 욕망의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국민형성이라는 『少年』의 기획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목적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정작 소년의 세대로서의 독자성과 개성 발휘의 측면은 간과된 측면이 있다. 모호하게 아동-소년-청년의 구분이 이루어지던 시기의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결국 『少年』지의 소년이란 1920년대 이후의 어린이를 의미하기보다는 청년에 근접하는 연령층이었으며 보다 정확히는 오늘날의 청소년에 가까운 연령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년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모호함에서 어린이라는 세대가 분명한 모습으로 독립하는 것은 1920년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
||
참고문헌 |
내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