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 기초연구/단독논문게재형과제 | ||
---|---|---|---|
과제코드 | 2008-18 | ||
연구과제명 |
|
||
연구책임자 | 권오영 | ||
공동연구자 |
|
||
연구기간 | 2008-04-17 ~ 2008-11-30 | 연구형태 | 개인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조선 후기 성리학사상의 사상사적 전개에 대해 낙론 학자의 사상을 우선 깊이 분석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앞으로 호론과 낙론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위해 우선 낙론에 한정하여 탐구하고자 한다. 심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가장 심화되었던 시기인 18세기에 서울·경기학계와 충청학계는 호락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이 논쟁은 16세기 천명과 성정에 대한 탐구시기를 지나 성과 심에 대한 보다 깊은 철학적 심화 연구 단계에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 논쟁은 당시 사상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해석될 수 있다. 이 논쟁은 조선 성리학사상의 난숙기에 이러한 학설논쟁으로 학술사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 우선 낙론학설과 그 학설의 사상사적 전개가 갖는 의미와 양상을 해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낙론학설은 북학파 실학자에게 전승되었을 뿐 아니라 19세기에 활동한 정치가인 김조순과 성리학자인 홍직필·임헌회·전우 등에게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조선 후기 이학사상의 실체와 정치적 학문적 동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
연구방법 및 내용 |
조선 후기 성리학은 크게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로 나누어져 발전하여 나갔다. 영남은 이황의 학설을 더욱 견고하게 지켜나간 반면, 기호지역은 이이 이후 다양한 학파와 학설이 존재하였다. 18세기 초 한원진과 이간의 호락학파 분열로, 이제 서울·경기학계에는 이재·김원행이 주도하여 나갔다. 이 낙론 학자의 학풍과 사상경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영조연간에 장차 낙론의 정치적 입지가 호론 학파와 길항관계를 겪으면서 확대되어 나가는 역정을 탐구한다. 18세기에 이어 송시열·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지는 기호의 정통 학맥에 속한 호론 학자들은 주자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心是氣, 心卽氣質을 표방하였다. 이에 반해 낙론의 대표적 학자인 이재와 김원행 등은 性卽理, 心本善의 학설을 고수하였다. 이재는 경기도 용인에 그 학문적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는 18세기 전반기에 기호학계에서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그는 한천서원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고 학문활동을 하였다. 그는 심곡서원 등 경기지역의 여러 서원의 강학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 정치적 영향은 매우 컸다. 그는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보았고 성인의 마음과 범인의 마음도 같다고 보았다. 이재가 단순히 권상하의 문인인 강문팔학사의 한 사람인 이간의 인물성동론을 이어 계승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 연구에서는 서울·경기학계의 학문적 연원과 전개과정을 통해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재의 뒤를 이어 김원행은 양주의 석실서원에서 강학과 학문활동을 하였다. 그 역시 인물성동론을 지지한 학자였다. 그는 영조 연간에 서울·경기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의 문하에는 홍대용·황윤석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의 학풍과 사상은 19세기에 안동김씨 세도정권 출현의 사상적 연원이 되었고 김조순을 통해 계승되어 나갔다. |
||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
연구결과 |
한천정사 등에서 강학했던 이재의 낙론학풍은 학문의 도에 대해 다만 사람이 되는 도를 배우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낙론은 성즉리, 심본선의 학설을 견지하면서 호론이 인의를 기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호론 학자인 윤봉구 등은 명덕이 분수가 있다고 보았고 심지어 송능상은 명덕을 기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호론은 이를 공공으로 이해하고 성을 기를 띤 이, 또는 기에 내재한 이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성즉리도 기 속에 나아가 본연의 이를 흩지게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기호학파의 심시기, 심즉기질설이 명덕을 기로 보는 학설로 변해나간 것이다. 이에 반해 낙론은 심은 기의 정상으로 보고 명덕에 분수가 없고 심의 본체는 선하다고 보아 인성과 물성이 같고 성인의 마음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는 학설을 구축하였다. 19세기에 낙론은 정계에는 김조순으로, 학계에는 홍직필·오희상 등으로 계승되었다. 반면 호론의 학맥은 사라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미 한원진 당대부터 일부 호론 학자의 사상적 일탈은, 19세기에 이르면 경주김씨 자체 내에서도 한원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심지어 송시열의 후손인 은진송씨 학자들의 경우도 낙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세도정치의 등장과 더불어 호론 학맥의 종언을 의미하며, 호론 학맥의 낙론으로의 사상적 정치적 동화를 통해 학계와 정계가 낙론의 일당 독주로 나아가는 바탕이 되었다. |
||
참고문헌 |
내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