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 기초연구/단독논문게재형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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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2005-28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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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이완우 | ||
공동연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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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기간 | 2005-04-22 ~ 2006-04-28 | 연구형태 | 개인 |
연구목적 및 배경 | |||
연구방법 및 내용 | 尤庵 宋時烈(1607-1689)이 노년에 은거했던 청주 華陽洞의 우암 유적을 통하여 거처 주변의 숭경을 九曲으로 명명하고 이를 南宋 朱熹의 武夷九曲에 비견하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은거사상과 그 양태를 연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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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Ⅰ. 머리말
Ⅱ. 武夷九曲과 조선문사의 구곡 1. 朱熹의 은거와 武夷九曲 2. 朝鮮時代 文士의 九曲 경영
Ⅲ. 宋時烈의 華陽洞 은거와 尤庵 事蹟 2. 精舍의 조영과 巖棲齋의 명명 3. 煥章閣 건립과 明皇御筆의 모각
Ⅳ. 宋時烈 사상의 계승과 전파 1. 華陽書院의 창설과 萬東廟의 설치 2. 華陽九曲의 정착과 전파
Ⅴ. 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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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
우암 송시열은 17세기 정치사와 관련하여 淸에 대한 復讐雪恥의 기치 아래 효종연간에 출사하여 계획했던 北伐이 수포로 돌아가자 화양동에 은거하여 行藏을 취하였다. 이에 그는 南宋 朱熹가 武夷山에 은거하여 武夷九曲을 탐승하던 행적을 추종하여 巖棲齋라는 精舍를 건립하고 주위의 勝景을 명명하는 등 자신의 심회를 풀어냈다. 아울러 그는 북벌의지를 전환시켜 주위 산천을 小中華主義的 상징물을 시각화함으로써 화양동을 性理學的 은거사상과 大明義理의 정치관으로 융화시켜 갔다. 특히 閔鼎重이 毅宗崇禎을 구해온 것을 계기로 화양구곡 제5곡 瞻星臺 암벽이 이를 모각하고, 神宗과 毅宗의 紙位를 모시고 제향하는 등 尊周之義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에 그가 사망한 뒤 權尙夏를 비롯한 그의 문도에 의해 우암의 은거사상과 대명의리는 華陽書院의 창설과 萬東廟의 건립으로 이어졌으며, 華陽九曲의 명명이 정착되면서 우암의 화양동은 조선 문사의 대표적 은거처로 전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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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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