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 기초연구/공동연구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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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AKSR2014-C09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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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정치영 | ||
공동연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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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기간 | 2014-03-28 ~ 2014-12-19 | 연구형태 | 공동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전통적으로 명승은 자연과 인문의 복합체로서, 생태적으로는 보존 가치가 뛰어난 자연경관이었고, 심미적으로는 아름다운 미학경관이었으며, 당대의 문화와 역사성이 스며있는 문화경관이었다. 빼어남과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는 시대성과 공간성을 갖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명승을 통해 그것을 주로 향유했던 당시 사람들의 자연관과 상징체계, 정체성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명승이 지닌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조선시대 명승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九曲’, ‘洞天’ 등 몇몇 단편적 사례 연구를 제외하면 전통 명승,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의 명승에 대해 종합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아직 없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본 연구는 명승을 ‘자연경관과 인문현상의 복합체’로서 개념화하고, 조선시대 명승이 갖는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짚어 보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떠한 경관이나 장소를 명승으로 인식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였으며, 이를 어떻게 문학적 회화적으로 형상화하여 향유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므로 지리학, 한문학, 미술사학 등의 자료와 방법론을 동원하여 학제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 본 연구는 아래와 같이 크게 3개 부분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조선시대 시기별 지리지의 내용을 분석하여 지역마다 어떤 장소들을 명승으로 인식했는지, 이러한 명승을 어떤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지역별로 얼마나 많은 어떤 유형의 명승이 어떻게 분포하였는지를 분석하였다. 또한 시기별 지리지를 이용하여 시간 흐름에 따른 명승의 변화 양상도 추적하였다. 둘째, 조선시대 명승 유람이 문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문인들이 명승의 유람을 통하여 체험한 내용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궁구하였다. 문인 개인의 명승체험 양상을 비롯하여 명승과 관련하여 문화적 지식과 의미가 축적된 방식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명승 유람의 배경, 명승 유람의 노정, 명승 체험 전후에 획득한 정보, 그리고 그러한 제반 요소들이 옛 시문에 반영된 방식 등을 분석하는 가운데 문인들이 명승을 문학적으로 향유한 방식과 명승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를 재구성하였다. 셋째, 조선후기 실경산수화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명승에 대한 인식과 그 시각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조선후기에 관료들은 부임지 주변의 명승을 그림으로 그려 宦遊의 기록으로 삼았고 문인사대부들은 명승지를 찾아 유람하고 그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명승유람의 풍류는 18세기에 절정에 달했으며 놀이에도 응용되었다. 즉, 우리나라 명승과 고적을 한 장의 놀이판 위에 담아 전국을 유람하는 ‘覽勝圖놀이’가 탄생하였다. ‘남승도놀이’의 놀이판에 쓰인 전국 각지의 명승지 명칭에는 당시 사람들의 명승에 대한 인식과 선호도 등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남승도놀이’의 놀이판에 적힌 명승지와 이를 시각화한 실경산수화를 결부시켜 고찰함으로써, 조선후기 지식인의 명승에 대한 인식과 놀이를 통한 향유 양상을 알아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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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방법 및 내용 | 조선시대 명승이 갖는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 본 연구팀은 지리학, 한문학, 미술사학이라는 각기 다른 학문적 시각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연구 자료의 활용이나, 공동 현장 답사 등 학제적인 연구를 지향하였다. 특히 연구과정에서 여러 차례의 토론을 통해 방법론과 자료를 공유하였는데, 본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활용된 자료는 조선시대 문헌과 그림이다. 명승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인 각종 지리지, 지도, 그리고 주관적인 기록인 시문 등 문학작품, 산수화 등이 폭넓게 활용되었다. 이러한 접근방법에 기초하여, 3명의 연구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연구방법과 내용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1) 地理誌로 본 조선시대 명승의 지역적 양상
일정한 지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기록인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명승과 관련된 내용이 적지 않다. 따라서 지리지는 각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명승을 일차적으로 추출하여 정리하는 데 가장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지리지는 당시 사람들이 명승을 어떻게 평가하고 이를 어떻게 향유하였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시기별 지리지에서 명승과 관련된 자료를 추출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이를 활용하여 당시 명승의 성격과 그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명승을 분류하고 유형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명승이라 간주한 경관의 성격을 밝혔다. 또한 전국, 그리고 도와 군현의 스케일에서 명승의 분포와 대표적인 명승지가 무엇이었는지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기별로 다른 지리지의 자료를 이용하여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명승에 어떤 변화가 진행되었는지 파악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먼저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輿地圖書????, ????大東地志???? 등 전국지리지에서 명승관련 내용을 추출하고, 기타 邑誌들도 참고하여 전국적인 명승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이를 이용해 계량적인 분석과 함께 정성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군현지도인 ????海東地圖????, ????廣輿圖????, ????1872년 地方地圖???? 등도 명승의 위치 비정과 경관 복원 등에 활용하였다.
2) 古詩文으로 본 조선시대 명승의 문학적 향유 양상
전통시대 문인들은 산수 유람을 통하여 명승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해당 명승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는 하였다. 그러므로 명승을 대상으로 창작된 시문들은 명승의 객관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명승 유람 당시 문인들이 저마다 어떤 방식으로 명승의 심미적․역사적 특성을 향유하였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명승 시문에 형상화된 문인들의 체험 양상이 주로 분석되었다. 명승 유람의 배경 및 명승 노정의 특징, 명승 체험에 동원되는 정보, 명승 체험의 공시적․통시적 맥락화 방식 등을 검토하였다. 특히, 서울 경기 지역 명승이 어떻게 시대별 문학적으로 향유되어 왔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현전하는 역사서, 지리지, 개별 문집 등에 수록된 문학 자료를 통하여 명승 유람의 성격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방식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여지도서???? 등 역사서 및 지리지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의 문집에 실린 다양한 관련 시문들을 통하여 명승이 향유되었던 양상과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어 이들 작품은 해당 명승에 대한 문학적 향유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중종 25)에 최종 증보되었으므로 이 시기까지의 시문만을 포괄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다루지 않은 조선 중기 이후의 시문들까지 검토하여 문인들의 명승 향유 양상을 폭넓게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와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문집들에 나타난 명승 유람 시문들을 분석하기 위해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문집들을 살펴보았다.
3) 實景山水畵(남승도)로 본 조선후기 명승에 대한 인식과 시각화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명승 중에 조선시대 실경산수화로서 作畵의 대상이 된 지역은 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문인관료들이 실제로 명승을 유람한 뒤에 모두 그 경험과 감상을 그림으로 남겼던 것은 아니며, 실제로 가보지 못했지만 동경의 대상이 되는 명승을 그려놓고 臥遊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만족하기도 했다. 특히 화가의 신분이나 시기를 막론하고 시각화의 대상으로서 유난히 인기 있었던 명승지가 분명 있었다. ‘남승도놀이’의 놀이판에 나타난 명승명소의 명칭은 당시 사람들에게 유람할만한 장소로 인식되거나 가보고 싶은 명승의 범위를 반영하고 있다. 현재 여러 소장처에는 <靑邱勝覽圖>, <八仙臥遊圖>, <朝鮮遊覽圖>, <覽勝圖> 등 각각 다른 이름으로 전하는 남승도놀이의 놀이판이 전하는데 이 놀이판에 나타난 조선 전국의 명승명소 명칭을 정리 분석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어 놀이판을 구성하고 있는 명승에 해당되는 실경산수화를 가능한 한 모두 조사한 뒤, 이를 화가의 신분, 제작 빈도, 제작 유형, 제작 목적과 용도 별로 수치화하여 사람들에게 선호되었던 명승이 시각화된 양상에 더 객관적으로 접근하였다. 남승도놀이는 紀行寫景이나 실경산수화의 제작 경험이 축적되고 명승 유람의 유행 분위기가 저변화된 이후에 나타난 놀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남승도놀이 놀이판의 구성을 실경산수화 제작 양상과 결부시켜 비교 고찰하는 것은 조선후기 상류층으로부터 중인층에 이르기까지 명승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척도를 가늠하고, 명승을 향유하는 층과 그들의 향유 방식이 다양하였음을 탐구하는 기회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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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
연구결과 |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地理誌로 본 조선시대 명승의 지역적 양상
이 연구는 조선시대 명승의 성격과 그 지역적 특성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는 명승을 추출해 유형 별로 분류하여 당시 사람들이 명승이라 간주한 경관의 성격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전국, 그리고 도와 군현의 스케일에서 명승의 분포와 대표적인 명승지가 무엇이었는지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의 명승을 비교하여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명승에 어떤 변화가 진행되었는지 살펴보았는데,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시대 명승을 추출하기 위하여 지리지 자료들을 검토하였다. 검토대상은 전국을 일관된 편찬체제로 서술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전국지리지였으며, 그 수록내용을 고려하여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주된 연구 자료로 삼고, 18세기의 ????여지도서????를 보조 자료로 사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山川, 宮室, 關防, 城郭, 樓亭, 學校, 驛院, 橋梁, 佛宇, 祠壇, 祠廟, 陵寢(陵墓), 古跡 등 모두 13개 항목에, ????여지도서????는 산천, 누정, 역원, 寺刹, 公廨, 궁실, 壇廟, 묘전, 능침, 고적, 교량, 題詠, 城池, 形勝, 溫泉, 關隘, 학교 등 모두 17개 항목에 명승이 수록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명승을 항목 별로 살펴보면, 가장 많은 명승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누정이었으며, 그 다음은 산천, 불우, 역원, 고적, 궁실, 사묘, 능묘, 성곽, 교량의 순이었다. 이 가운데 산천 항목에는 산, 하천, 계곡, 바위 등 자연경관뿐 아니라 나루와 포구, 마을, 지역 등 인문경관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고적 항목은 누정, 궁실, 사찰 등 다양한 유형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폐현과 농경지 등 특이한 유형도 있었다. 이와 같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수록항목에 따라 추출한 명승을 다시 유형 별로 재정리하였다. 유형 별 분류는 우선 자연사상과 인문사상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하였다. 그 결과, 전체 명승의 4/5 가량이 인문사상이었다. 그러나 인문사상은 자연이 완전히 배제된 것이 아니라, 자연이 포함되어 명승으로서의 가치가 인정된 곳이었다. 즉 조선시대 명승의 상당수가 인문경관과 자연경관의 복합체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경관을 명승으로 평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자연사상 가운데는 산이 가장 많았으며, 그 뒤를 하천, 고개, 바위, 못/호수, 섬이 이었다. 산과 하천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설이나 역사 등 인문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자연사상이 많았다. 인문사상 가운데는 누정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 다음은 사찰, 역원, 궁실 등의 순이었다. 누정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장소에 건립되어 자연을 향유하는 장소 역할을 하였으며, 사찰 역시 전망이 좋거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아 찾는 이가 많았다. 역원, 나루, 포구 등은 여행의 거점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시가 많이 지어졌고, 따라서 명승으로서의 가치는 다른 유형에 비해 저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조선시대 명승의 지역적 분포를 분석해 보았다. 도별로는 강원도, 경기도, 전라도, 황해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 충청도의 순으로 군현 당 평균 명승의 수가 많았다. 산과 바다의 경치가 뛰어난 강원도에 명승이 많이 분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와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는 좁은 지역인 데도 불구하고 많은 명승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명승의 유형 별로 도별 분포를 살펴보면,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자연사상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으며, 경기동,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는 자연사상의 비중이 낮은 편이었다. 자연사상의 유형이 가장 골고루 분포하는 곳은 강원도였다. 명승 중 산이 가장 많은 곳은 경상도였고, 그 다음은 전라도로 지형과의 관련성이 낮았다. 하천은 경상도와 평안도에 많이 분포하였다. 인문사상의 유형이 가장 고루 분포하는 곳은 경기도였으며, 이는 오랫동안 한반도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면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자원을 가지게 된 데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누정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경상도였으며, 남부지방과 강원도에 누정이 많고 북부지방에 적었는데, 이는 누정의 건축적 특징과 지역성과 관련이 있다. 사찰은 전라도, 경기도, 경상도 순으로 많이 분포하였다. 역원을 비롯한 교통과 관련된 사상들은 경기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군현 별 명승의 분포도 편차가 적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명승이 없는 군현이 약 40%에 달하였으며, 특히 충청도, 평안도에 명승이 없는 군현이 많았다. 명승이 가장 많은 군현은 개성부였으며, 그 뒤를 이어 평양부, 한성부, 장단도호부, 강릉대도호부 등이 자리하였다. 개성부, 평양부, 한성부는 고려, 고구려, 조선의 수도로서 많은 문화유산을 보유한 지역들이며, 개성부의 동쪽에 있는 장단도호부는 고려와 관련된 유적이 많은 곳이었다. 이 밖에 명승을 많이 보유한 군현들은 읍격이 높은 부, 목, 도호부인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인구가 많고 경제적 규모가 크며, 행정 ·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현이 명승의 숫자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강원도에 있는 군현이 명승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여러 군현에 걸쳐 고루 분포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평안도는 전체 명승 중 절반 이상이 평양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명승이 없는 군현이 많았다. 지역 별 주요 명승을 살펴본 결과, 한성부는 한강, 개성부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명승이 많이 분포하였으며, 경기도도 강변에 있는 장소들이 주요 명승이었다. 충청도와 경상도는 누정이 주를 차지하였으며, 전라도는 사찰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원도는 누정과 호수, 산과 사찰 등 주요 명승이 다양하였으며, 황해도는 역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함경도의 주요 명승은 객사와 관련된 누각이 많았으며, 평안도는 평양부에 집중되어 있었고 대동강, 압록강, 청천강 등 강이 주요 명승에 포함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약 270년의 시간차를 두고 편찬된 ????여지도서????의 명승 기록을 통해, 시간 흐름에 따른 변화상을 살펴보았다. 전체 명승 중 인문사상이 자연사상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세부 유형별로는 누정이 가장 높은 비중을 점한다는 데에는 변화가 없었다. 누정 다음으로는 사찰, 공해/궁실, 산, 역원, 사묘/사단, 바위, 나루/포구, 하천, 여울의 순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역원, 산, 궁실, 하천, 나루/포구, 고개, 바위, 사묘/사단의 순과 비교하면, 공해/궁실, 사묘/사단, 바위의 순위 및 비율이 상승하였고, 역원, 하천, 고개의 비중은 감소하였다. 그리고 집, 비석 등 16세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명승이 18세기에 나타났다.
2) 古詩文으로 본 조선시대 명승의 문학적 향유 양상 - 漢陽 名勝을 중심으로
漢陽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각광을 받게 된 도시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던 요지였지만, 고려 시대까지는 문화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고려 시대의 한양은 楊州에 속해 있던 곳으로 한때 남경으로 정해져 궁궐이 세워지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문화의 중심은 아니었다. 조선이 막 건국되었을 때 수도는 여전히 개경이었으며,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서 천도가 불가피하였다. 한양은 태조 3년(1394) 9월 정도전의 의견을 수용해서 새 도읍으로 선택되었다. 한양 천도를 결정한 후 새로운 수도에 대한 도시 계획안은 한양 지도 위에 그리게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도 건설 사업에 들어갔다. 조선의 건국 이후 한양은 조선 왕조의 도읍으로, 왕실과 관료들의 생활공간으로, 風流와 樂道의 장소로 한양의 공간은 새롭게 발견되고 名勝化되었다. 따라서 본고는 건국 초 정도전의 「신도팔영」의 시문을 살피고, 100년 후 서거정의 「한도십영」을 중심으로 한양의 장소들이 어떻게 명승화 되어 갔는지를 살펴보았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조선의 새로운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궁궐 및 제도를 만들어 갔다. 한양으로 천도가 끝난 후 태조는 1398년 좌의정 趙浚과 우의정 金士衡에게 「新都八景」의 병풍을 각각 나눠주었으며, 이에 정도전은 「進新都八景」 시를 지어 올렸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주체들이 개념화한 ‘八景’에 대한 의미를 「진신도팔경」을 통하여 문학적으로 강조하였다. 신도팔경 가운데 1경 <畿甸山河>, 2경 <都城宮苑>, 3경 <列署星拱>, 4경 <諸坊碁布>는 한양 도성 내부에서 상징성을 가지는 공간들로 이루어졌으며, 5경 <東門敎場>, 6경 <南渡行人>, 7경 <西江漕泊>, 8경 <北郊牧馬>는 한양 도성을 둘러싼 교외 공간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신도팔경」은 아직 한양이 도시로서의 완성된 면모를 갖추기 전의 상황이었기에 8경의 구성과 8경시의 내용이 구체적인 현실의 묘사보다는 머릿속에 그려진 바람직한 새 도읍으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설계가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실재적 한양 명승의 모습은 그려지지 못하였으며, 자연경관으로서의 명승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다만 한양이라는 도시를 계획하면서 이상적인 구조와 얼개를 제시하였을 뿐이다. 이후 한양이라는 도시가 제법 모습을 갖춘 서거정의 시대에는 한양의 명승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서거정의 「한도십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서거정은 한양의 명승지로 모두 열 곳을 뽑았다. <藏義尋僧>, <濟川玩月>, <盤松送客>, <楊花踏雪>, <木覓甞花>, <箭郊尋芳>, <麻浦泛舟>, <興德賞花>, <鐘街觀燈>, <入石釣魚>로 구체적인 한양의 명승지에 대한 장소가 분명하게 서술되었다. <장의심승>에 나오는 藏義寺는 洗劍亭 부근에 있으며, <반송송객>의 盤松亭은 獨立門 부근에 있었으며, <흥덕상련>의 興德寺는 東小門 - 혜화동에 있던 절로 예전 연꽃을 보던 곳이라고 한다. <종가관등>에서 鐘街는 종로이며, <전교심방>은 지금의 뚝섬 근처, <제천완월>은 한남동 부근에 있던 濟川亭, <입석조어>는 한강 두모포로 현재 금호동, <마포범주>는 지금의 잠두봉이 있는 지역이다. 서거정의 한양 10경은 의식주가 영위되는 삶의 일상이 아닌 고상한 풍류, 심미적인 지향을 포함한 미의 공간으로 형상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장의사, 제천정, 반송정, 양화진, 목멱산, 전교, 마포, 흥덕사, 입석은 한양 도성 내에서부터 한양 도성을 둘러싼 교외 공간으로 시인 또는 동류인들과의 풍류적의 행위가 함께 한 공간이었다. 시인과 동류인들은 이 10경에서 자연과 함께 하면서 한가로움과 여유를 즐기며, 이를 시로 그림으로 형상화하였다. 한양이라는 도시가 모습을 갖추고, 당시 조선의 문물이 번화하던 시기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였다. 따라서 10경은 한양의 주된 생활공간과 맞물려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서 명승의 의미가 확고해졌다. 한양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있어 한양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현실과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성현 또한 ????용재총화????에서 당시 한양에서 명승지로 일컬어지는 곳에 대해 하나하나 열거하며,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곳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는 한양 명승지가 일상생활 속에 녹아들었음을 보여준다. 시절에 따라 자연을 즐기고 자연의 변화에 대처한다는 의미를 갖는 세시풍속은 국가의 통치와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왕화의 상징체인 도성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중국의 예와 관련된 풍속을 본받아 각종 시속을 제도화하여, 3월 답청·4월 연등행사·6월의 물놀이·9월의 登高 등의 장소로 도성 안팎의 장소가 물색되었다.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명승이라고 일컬은 곳인 인왕산, 삼청동, 필운대 등 한양의 북쪽지역과 한강 유역이 바로 그러한 장소였다. 특히 인왕산 부근과 삼청동, 세검정, 청풍계 등과 한강 유역이 조선조 한양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많은 수의 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양반 사대부만이 아니라 중인계층의 시회장소가 되었고, 문화적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이곳은 조선 후기 정조의 「國都八詠」을 통해 한 번 더 집중적으로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한양의 명승은 조선 왕조의 수도이기에 부여된 여러 가지 조건과 관련되어 형성된 것이다. 한양의 명승은 대내외적으로 왕화를 자랑하고 칭송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塵世의 대명사인 서울을 떠날 수 없는 관료들에게는 ‘城市中山林’으로서 심신수양과 풍류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한양 명승은 자연 자체의 絶勝함보다는 인문적인 계기에 의해 형성된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궁에서 가까우며 시정을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높직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산이 깊어 세속에서 동떨어진 한취가 있는 북악산 인왕산 일대와 도성에서 가까우며 나루가 있어 인적이 잦으나 넓게 가로지른 한강이 명승지가 된 것이다.
3) 남승도와 조선후기 지식인의 명승에 대한 이해
놀이의 말판으로 사용되었던 남승도는 보존이나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두꺼운 장지에 만들어진다 해도 내구성이 약했다. 따라서 현전하는 남승도의 상태를 놓고 보면 이들은 여러차례 모사를 거친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 남승도는 그림 실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그릴 수 있으며, 꼼꼼하게 완성도를 높여야하는 그림이 아니었으므로 그 제작 수준도 낮은 편이다. <청구남승도>, <해동남승도>, <조선남승도>에 적힌 명승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일치한다. 이 유형의 남승도에 기록된 명승 120개는 한성부 9~10개, 경기 17~18개, 충청 15개, 전라 14개, 경상 16개, 강원 13개, 함경 12개, 평안 13개, 황해 10개로 이루어진다. 한성부와 경기도에서 1-2개 차이가 있을 뿐 나머지 지역에 각각 안배된 숫자는 동일하다. 한성부는 놀이의 출발과 도착지로서 중요하였을 뿐 유람을 위한 명승으로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경기지역이 17~18개로 가장 많고 황해도가 10개로 가장 적다. 지역별로 13개 안팎에서 골고루 안배하려고 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아무래도 남승도 놀이가 서울 경기 지역의 문인사대부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면 한성부와 경기 지역에 비중이 주어졌다고 생각되며 황해도의 명승 개발은 미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청구남승도>에만 나타나는 명승은 한성부의 관왕묘, 두모포의 유하정, 개성의 탁타교이다. <해동남승도>에만 나타나는 명승은 구례 화엄사이며, <조선남승도>에만 나타나는 명승은 도봉산의 천축사, 무주의 치상대, 강원도의 설악산, 회령의 오국성, 박천의 박천지, 해주의 신광사 등이다. 아마 하나의 남승도를 모본으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모가 거듭되고 제작자의 관심이 추가되면서 약간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네 개의 남승도 중에 <팔선와유도>는 나머지 세 개의 남승도와 명승 선택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여기에 실린 총 80개의 명승 중 무려 21개는 오직 <팔선와유도>에만 나타나는 곳이다. 예컨대 1711년에 완성된 양주의 북한산성, 혜화문 밖의 도화동, 흥인문, 양주의 수락산, 1796년에 완공된 수원의 화성, 양녕대군의 고사가 깃든 과천의 염주대, 개성의 서사정, 단양의 삼선암과 도담, 부안의 변산, 전주의 풍패관, 경주김씨 시조의 탄생설화가 서린 경주의 계림, 통영의 한산도, 동래 몰운대, 동래의 범어사, 오대산, 원주의 봉래각, 1791년 중건된 영월 자규루, 경원의 두만강, 옹진의 소강, 해주의 석담 등이다. <팔선와유도>의 명승에서 화성이나 자규루 같이 18세기 말에 새로 건축되거나 중수된 건물이 등장함은 <팔선와유도> 제작시기의 상한을 설정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여기에 유본정의 활동시기를 감안하면 <팔선와유도>는 19세기 중엽경에 제작되었다고 본다. <팔선와유도>에 나타난 명승의 또다른 특징은 정조의 주도로 건설된 화성이나 자규루는 물론이고 정조 대 규장각에 하사된 유하정, 정조가 수군 조련을 몸소 관람한 읍청루 등 정조의 업적과 관련된 곳이 많다는 점이다. <팔선와유도>를 제작한 유본정이 유득공의 조카인 점을 감안하면 <팔선와유도>에 정조와 관련된 곳이 많이 등장함은 일면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팔선와유도> 외에 나머지 세 남승도들이 원본으로 삼았던 말판이 처음 제작된 시기는 18세기 후반 이후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문인사대부들 사이에 산수유람 풍조가 급격히 확산되자 산수유람 문화는 일정한 형식으로 패턴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즉 여행자들 사이에 특정한 유람지와 경물들이 관람대상으로 유형화되고 여정을 포함하여 이들을 향유하는 방식도 하나의 정형이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산수유기(山水遊記)같은 여행기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고 현장답사 후에 제작된 실경산수화도 기여한 바 크다. 산수유기나 실경산수화를 통해 여행자들이 축적된 경험이 정보의 수단으로서 확산되었다. 다시 말하면 남승도 놀이는 사람들이 명승을 찾아 떠나는 여행문화가 자리잡은 18세기 후반경이 되어야 시작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추정은 <팔선와유도>를 제외한 세 남승도에 정조의 현륭원(顯隆園) 참배와 관련된 지지대 같은 명승이 나타나는 점에서도 가능하다. 남승도는 지금까지 조선팔도의 지리와 명승고적을 익히고 국토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서당에서 주로 어린의 교육자료로 사용되었다는 견해가 강하다. 남승도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가 교육학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였으므로 남승도의 응용과 활용방안의 결과로 그러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시각에서 남승도를 바라보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남승도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인 남자들의 놀이문화의 한가지였다. 윤목을 굴려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그 지역과 관련된 글 한편을 짓고 술 한 잔을 마시는 놀이였다. 또 놀이 참가자들은 짧은 시간 안에 수준 높은 시문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했다. 남승도 놀이는 술과 시문창작이 부수되는 성인 사대부들의 풍류놀이였다. 이는 명승명에 평양 기생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선연동이나 관기들이 모여 사는 마을인 영해의 연지계가 올라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남승도에 나타난 명승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산, 하천, 반도, 숲, 섬, 기암, 고개, 관문, 저수지 및 지당, 온천, 굴, 연못, 마을 등의 자연경관과 사묘, 누정, 사찰, 교량, 관우, 능묘 등의 인문경관이 두루 포진되어 있다. 자연경관은 외형적 아름다움과 즐길 거리를 갖춘 곳이 선택되었다. 기암괴석이 훌륭한 곳,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 복숭아꽃이나 연꽃 같은 꽃구경하기 좋은 곳, 선유하며 주변의 승경을 바라보기 좋은 곳, 시원하게 물구경하기 좋은 곳 등의 볼거리를 갖추어야 했다. 산수경관의 중심이 산과 하천이라면 남승도에 기재된 산 중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산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한양 삼각산, 충청 속리산, 전라 지리산, 제주 한라산, 경상 태백산, 강원 금강산, 함경 칠보산, 평안 묘향산, 황해 구월산 등이 남승도에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 하천은 충청도의 금강, 전라도의 적벽강과 채석강, 경상도의 낙동강, 강원도 소양강, 경상도 낙동강, 함경도 두만강, 황해도의 소강 등이 기록되었다. 하천이 등재되지 않은 지역도 있고 선택된 하천일지라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큰 강이 아닌 경우도 있다. 이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하천의 특성에 기인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남승도가 18세기 후반이후 여행객들이 실질적으로 많이 찾았던 명승처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경관이 좋은 곳 외에 역사적 의미가 깃들어 있는 곳이 많이 선택되었다. 또 전라도 무주 치상대(雉裳臺) 처럼 문헌 기록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곳도 있다. 남승도에는 156개의 명승명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에 인문경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80개로 50%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자연경관보다 수치상으로는 많다. 이는 누정이 차지하는 숫자가 40개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사실 누정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진 곳에 세워지며 주변의 산수와 함께 감상되므로 전적으로 인문경관으로만 볼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명승에서 누정은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준다. 인문경관의 비중이 커진 다른 한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회자되어 온 역사적 현장, 왕실의 사적지, 특별한 전승설화가 깃든 곳 등이 많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함경도의 경우 자연경관에 우선순위를 두기보다 관방지역으로서의 함경도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입되었음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사대부들의 산수유람은 승경을 탐방하는 것 외에 역사적 의미가 깃든 곳도 유람의 충분한 목적지가 되었다. 지식으로 개념화된 현장을 직접 확인하려는 욕구도 상당히 컸다고 생각된다. 한편 남승도에 나타난 명승 현황과 실경산수화의 제작 현황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18세기 실경산수화의 유행 배경에는 특별한 경관에 대한 선호가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곳이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관동팔경, 평양팔경, 단양팔경 등 오랜 시간에 걸쳐 명승으로 인정받은 곳이 그림으로도 많이 그려졌다. 황해도는 남승도에 명승명이 가장 적게 등재되었는데 실경산수화로도 많이 그려지지 않아 유람처로서의 황해도에 대한 인식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승도 안에서 전국을 유람하는 것은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 다른 사람을 통한 간접적인 경험, 그리고 듣고 배운 지식을 통한 상상이 교차하는 특별한 재미를 부여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 술과 시문창작의 실력을 겨룰 수 있는 놀이로서 조선말기 지식인들의 인기를 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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