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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고 요약문: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 기초연구/공동연구과제
과제코드 AKSR2019-C08
연구과제명
  • 국문 : 조선후기 제주와 제주문화 : 한국문화로서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접근
  • 영문 :
연구책임자 김학수
공동연구자
  • 이욱 / 한국학중앙연구원 / 연구원
  • 정수환 / 한국학중앙연구원 / 책임연구원
  • 한도현 / 한국학중앙연구원 / 교수
  • 이창일 / 한국학중앙연구원 / 책임연구원
  • 이남옥 /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임연구원
  • 김소희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선임연구원
  • 정치영 / 한국학중앙연구원 / 교수
  • 정은주 /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임연구원
  • 박용만 / 한국학중앙연구원 / 책임연구원
  • 강문종 / 제주대학교 / 조교수
  • 김호 / 경인교대 / 교수
  • 이민주 /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임연구원
연구기간 2019-01-01 ~ 2019-12-16 연구형태 공동연구
연구목적 및 배경

. 도서(島嶼)라는 자연 및 인문지리적 환경에서 기인한 특수성에 대한 학제적 분석

지형, 지질, 기후, 토양, 식생 등으로 구성되는 자연지리적 환경과 인구와 취락 등으로 구성되는 인문지리적 환경은 지역의 문화와 사회 형성의 기초로 작용한다. 제주는 화산섬이며 국토의 남단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독특한 자연 및 인문지리적 환경을 지니고 있다.

주는 조선의 강역에 있으면서도 육지와 다른 생활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보편적 문화로서의 공통점을 지니는 동시에 제주만의 독특한 정서가 포함되어 육지와는 차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 특성은 인문지리, 서사, 문학, 음식, 의료, 생활, 문화 등의 각 측면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제주신화 중 일반신본풀이 당신본풀이 조상신본풀이 등을 대상으로 그 내용 속에 담긴 일상의 모습은 제주만의 독특한 정서를 담고 있으며 문헌설화의 형태로 전해진 여러 종류의 신화들과 비교하면 제주신화 속에 나타난 일상의 모습들은 비교적 풍부하고 다양한 편이다.

제주는 국가에 공납하는 공마(貢馬) 목장이 분포한 지역이자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도 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관찬된 제주지도에는 국가의 지방 지배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국가의 통치력과 공마 목장의 운영과 같은 경제적 요소가 상세히 반영되었다. 또한 제주목사가 주축이 되어 제작한 기록화와 실경도는 국가 정책과 통치행위를 적극 반영하여 조선후기 제주를 연구하는데 매우 의미 있는 사료이다.

제주는 한반도의 육지와 달리 독특한 식재료의 생산 환경을 지닌 곳이다. 첫째 이라는 지리환경은 바다로부터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수심이 깊은 바다를 사방에 두고 있어 먼 바다의 어로를 통해서 식재료를 확보하기가 어려웠고, 이에 따라 바다에서 밀려온 해초와 잠수를 통해서 수산물을 확보하였다. 둘째, ‘화산섬이라는 지형적 조건은 조선후기 육지에서 재배가 확장되고 있던 벼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조선후기 제주도 사람들의 주식은 쌀이 아니라 조·보리·메밀·콩 등이었다. 셋째, 태풍과 폭우 등으로 인한 심각한 자연재해와 대기근이 일어나 산위(山葦산죽실(山竹實상실(橡實, 도토리) 등의 구황식물의 소비를 촉진시켰다. 넷째, 조선후기 제주에는 육지에서 생산되지 않는 유자와 각종 감귤 등이 났다. 이러한 점은 제주 음식 문화 연구에서 특수성으로 부각된다.

. 중앙집권적 행정구조의 작동 및 학자·관료그룹의 유배에서 영향을 받은 사회문화적 융합성에 대한 탐색

제주는 국토 남단에 위치한 섬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한 특수성이 존재하지만, 중앙 정치 행정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역으로써 조선 후기 사회 문화의 보편성이 나타난다. 또한 중앙 정치가와 사상가 등이 여러 이유로 유배를 오면서 조선의 상층 문화가 제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학술, 사상, 출판, 사회, 문화 등의 각 측면에서 두루 나타난다. 이에 대한 특징으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조선후기 제주의 학술과 사상은 육지에서 제주로 부임해 오거나 유배 온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당대 학술과 사상의 조류나 지식인의 관심사를 비롯해 정치사의 흐름까지도 제주의 학술과 사상에 영향을 주게 된다. 관료나 유배인으로 제주에 들어온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제주를 중앙에 비해 학술과 사상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수준 낮게 평가하고 이들을 교화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교화 정책이 제주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그 결과 제주 지역에서 변화하게 된 학술과 사상의 측면은 무엇인지 연구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제주지역의 간행물과 간행양상을 통해 출판 인쇄 문화의 보편성을 살펴보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인쇄물과 인쇄문화의 특수성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제주의 사회 문화를 중앙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중앙 정부의 사전 체제 속에 제주도가 어떻게 존재했으며 이를 위한 제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는 중앙 집권적이고 일원적인 사전제도(祀典制度)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지방에 위치한 제주는 사전의 운영에 필요한 희생과 제물을 공급하는 곳일 뿐 아니라 국가 사전에 포함된 한라산 치제를 담당하였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제주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다.

연구방법 및 내용

. 연구 내용

조선후기 제주와 제주문화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역사지리문학 등 단일 분과 학문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본 연구는 지리적 배경 위에서 역사학 방법론을 적용하고 역사적 배경 위에 서지학 방법론으로 고문서 배경 위에 민속학 방법론을 적용하는 등 학제간 연구를 지향하여 제주가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에 역점을 두고 인문정신문화를 조명하고자 한다.

집필의 주요 범주

타자와의 지적 대화를 통한 자의식의 확립과 확대

자연과 인문의 접합

일상과 민속

사회문화적 다양성과 독창성

. 연구 방법

• ????고문서집성???? 108, 110, 114책과 ????탐라순력도????, ????탐라록????, ????탐라지???? 및 기타 일기나 문집 등의 자료에서 한국문화로서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검토할 수 있는 제주와 제주문화의 사례를 발굴하고 공유한다.

역사학, 문학, 서지학, 지리학, 미술사학, 종교학 등 여러 전공의 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학제간 공동연구를 통해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조선후기 제주와 제주 문화에 대해 한국 문화로서의 특수성과 보편성 측면에서 크게 네 가지 주제로 연구를 수행한다. 4개 주제는 1) 타자와의 지적 대화를 통한 자의식의 확립과 확대, 2) 자연과 인문의 접합, 3) 일상과 민속, 4) 사회문화적 다양성과 독창성이다.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대주제 1 : 타자와의 지적 대화를 통한 자의식의 확립과 확대

- 논문 1 : 제주 지식 문화의 갈래와 조선후기 제주학풍

- 논문 2 : 제주 도학자 일재(一齋) 변경붕(邊景鵬)의 철학사상

- 논문 3 : 제주 목사의 제주 인식과 교화론

- 논문 4 : 조선후기 제주의 인쇄·출판 문화

 

대주제 2 : 자연과 인문의 접합

- 논문 1 : 조선후기 제주의 자연 및 인문지리적 환경

- 논문 2 : 조선후기 지도(地圖)와 실경도(實景圖)에 반영된 제주(濟州)

- 논문 3 : 신광수(申光洙)탐라록(耽羅錄)에 나타난 제주에 대한 인식과 정서

 

대주제 3 : 일상과 민속

- 논문 1 : 제주 신화, 생활상을 만나다!

- 논문 2 : 조선시대 제주의 주변성과 의료문화

 

대주제 4 : 사회문화적 다양성과 독창성

- 논문 1 : 제주복식의 다름과 습합(習合)

- 논문 2 : 조선시대 국가 제사와 제주도 흑우

- 논문 3 : 조선후기 제주도의 토지소유와 토지매매

- 연구 : 향약의 이념과 실천: 제주 가시리 마을의 마을 만들기 사례

연구결과

대주제 1 “타자와의 지적 대화를 통한 자의식의 확립과 확대” : 4개 소주제

대주제 2 “자연과 인문의 접합” : 3개 소주제

대주제 3 “일상과 민속” : 2개 소주제

대주제 4 “사회문화적 다양성과 독창성” : 4개 소주제

1, 13개 주제, 554, 2,029.1

조선후기 제주문화에 대한 13개 주제 연구 논문 집필(계획서 12개 주제 대비 108% 초과 달성) 554쪽 단행본 1책 원고 완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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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요약

초록 요약: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세부과제별 요약( )으로 구성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대주제 1 : 타자와의 지적 대화를 통한 자의식의 확립과 확대

1. 제주 도학자 일재(一齋) 변경붕(邊景鵬)의 철학사상

이 글은 영조 연간에서 순조 연간까지 살았던 제주 출신의 유학자 일재 변경붕(1756~1823)의 철학사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은 변경붕의 철학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론을 구성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필자의 저술에 따르면 변경붕은 자신의 철학사상을 본격적으로 저술한 것이 거의 없거나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철학사상을 살핀다는 것은 문헌의 제한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채록을 통해 남긴 글에는 기호학파의 주자학 이해를 보여준 율곡의 글을 중심으로 주자학의 철학사상이 담겨 있다. 비록 자신의 글은 아니고, 채록한 글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도 없지만, 채록 그 자체가 특정한 인식과 의도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그가 동의하고 수용하려는 철학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공식적인 철학사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변경붕은 과거를 통해서 출사를 한 도학자이지, 오직 학문으로 산림에 머문 인물은 아니다. 그가 채록한 글을 보면, 율곡학의 핵심 내용을 잘 선별하고 있으며, 주자학의 너른 분야를 섭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채록이 곧 인식의 향상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은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진학(進學)을 위해 더 진전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만드는 학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그의 근원적인 태도로 보면, 요리와 건축은 이미 그것대로 완성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전에 실린 성인의 글에 뭘 더할 것이 있었겠는가? 주자학을 체인한 것이 그의 삶이었으니, 그는 제주의 도학자이다.

2. 제주목사의 제주 인식과 교화론-이형상의 교화 정책과 폐정 걔혁안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濟州牧使賦稅 징수, 訴訟 처리, 軍馬 관리, 왜구 방비 등 濟州와 관련된 행정을 담당하는 정3품의 외관직 관리로, 濟州牧뿐만 아니라 大靜縣旌義縣을 통합하여 관리하는 제주 지역의 실질적 관리자로, 그동안 조선시대 제주에 대한 인식과 영향은 대체로 제주에 유배 온 金淨(1486~1521), 鄭蘊(1569~1641), 宋時烈(1607~1689), 金正喜(1786~1856), 崔益鉉(1833~1906) 등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본고는 1701(숙종 27) 1111일에 濟州牧使에 제수된 이형상의 교화 정책과 폐정 개혁안을 중심으로 저술하였다.

그는 제주의 풍습인 동성 및 가까운 친척 간의 혼인, 혼례 때 교배하지 않거나 처가 있는데 다시 처를 취하는 것, 남녀가 함께 목욕하고 여자가 나체로 있는 것 등을 陋俗으로 규정하고 이를 금하였다. 또한 17021220일에는 각종 폐해를 일으키는 神堂 129곳과 사찰 5곳을 훼철하였고 巫覡 285명을 귀농시켰다.

이형상의 풍속 교화 정책과 폐정 개혁안은 기본적으로 곤궁한 제주민의 생활을 개선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일환으로 제주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음사 철폐와 관련해서는 일부 제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신당 철폐와 관련된 제주 지역 설화에서 이형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형상이 철폐한 風雲雷雨壇1719(숙종 45)철폐 이후 기근과 역병이 돌게 되었으므로 풍운뢰우단을 다시 설치해달라는 제주민들의 호소에 의해 다시 설치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형상의 음사 철폐는 제주 지역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풍속 교화의 차원에서 접근한 유학적 교화 정책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3. 제주 지식 문화의 갈래와 조선후기 제주학풍

조선시대의 제주는 목사로 파견된 관료의 문교정책은 유배 지식인들과의 지식문화적 교유를 통해 유교문화를 숙성시켜 나갔다. 이른바 오현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중후기의 석학이나 이원진, 이형상 등 주자학적 소양이 뛰어났던 관료들의 역할은 제주의 학술문화적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다. 이계손, 이언적, 김식, 조호익, 류치명 등이 관서·관동지역에 지방관 또는 적거하는 과정에서 문인을 육성하며 유풍을 진작시킨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제주 또한 조선유학사의 영역 속으로 적극적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주 유교문화의 보급과 정착을 견인한 존재는 목사로 지칭되는 관인과 유배지식인이었다. 이런 흐름은 15세기 이후 사림파의 성장과 더불어 더욱 가속화된 양상을 보였는데, 1470년부터 1473년까지 목사로 재임하며 주자학적 치도 기반을 조성했던 이약동의 역할은 제주지역 유교문화의 확산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519년의 기묘사화는 사림의 시련이자 새로운 성장의 에너지를 확충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영향은 제주에까지 미쳤는데, 1520년 김정의 제주 유배가 그것이었다. 정통 사림파 학자이자 관료였던 김정은 1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주의 문교 및 예교 진작에 크게 기여했고, 그가 육성했던 문인들은 내재적 자산으로 남아 제주 유학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게 된다. 이약동김정을 통해 기반을 다진 제주의 유학은 송인수심연원 등의 관인을 통해 더욱 진전을 보게 된다. 이들은 사림파 학통의 정통 계승자였으며, 특히 김안국의 문인이었던 심연원은 모재학(慕齋學)’을 비롯하여 최부의 금남학풍까지 이식함으로써 제주의 학문적 풍토를 보다 풍부하게 했다. 본고에선 원우에 기준할 때, 5현을 제향한 귤림서원이 서인 기호학파의 주도성이 강한 공간이었다면 정온의 주향처인 송죽서원(松竹書院)과 이약동(李約東)이괴(李襘)이형상(李衡祥)김정(金政)김진용(金晉鏞)의 제향처인 상현사(象賢祠)는 남인 퇴계학파의 영향이 큰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구조에서 볼 때, 향후 제주지역의 학풍은 크게 귤림학풍송죽상현학풍으로 대별하여 파악해 볼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저술하였다.

4. 조선후기 제주의 인쇄·출판 문화

제주도에서 발행했던 대부분의 서적은 관 주도의 인쇄물인데 1946년에 전라도에서 분리되기까지 제주도는 조선시대 내내 전라도의 행정 체계에 속했기 때문에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라도관찰사의 지시나 상부 보고를 통해 서적을 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라는 제주도가 지닌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해 중앙에서 지방에 서적간행의 명을 내릴 적에 전라도관찰사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제주목사에게 명을 내려 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목사나 제주판관이 전라도관찰사에게 별도로 보고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서적을 간행하기도 했다. 본고는 제주지역 간행물의 현황과 특징을 통해 제주지역 인쇄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확인하고자 했다.

먼저 보편성에 있어서 관 주도의 출판과 그에 따른 간행물의 성격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타 지역의 경우 관을 비롯해서 서원과 사찰 및 서점이 중요한 간행 공간으로서 지역 사회의 정보와 문화를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주도의 경우에는 주로 제주목의 주도 하에 공적인 간행이 이루어졌고, 부수적으로 향교가 출판 업무를 보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수성으로는 제주지역의 지리적인 특성상 군사서적, 외국어서적, 수의서적의 간행에 있어서 특수성을 지닌다.

대주제 2 : 자연과 인문의 접합

1. 조선후기 제주의 자연 및 인문지리적 환경

본고는 지리지와 기행문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조선후기 제주의 자연 및 인문지리적 환경을 복원하였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주도는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화산섬이므로, 대부분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무암은 물이 잘 빠지기 때문에 물을 구하기가 어려운 중산간지역보다는 샘이 솟아나는 해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천은 건천인 경우가 많아 이를 이용해 농사를 짓기가 힘들었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이 주목한 지형경관은 오름이었으며, 오름은 농경지 개간에 불리하지만, 목초와 땔감을 얻는 장소, 봉수대로 활용되었다. 대부분 거친 현무암으로 이루진 해안은 선박 운행과 소금 생산에 악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조선후기 사람들은 육지에 비해 따뜻하고 변화가 극심한 것을 제주 기후의 특징으로 인식하였으며, 이러한 기후가 의 주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육지에서 건너간 당시 사람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제주의 토양이었다. 화산회토로 이루어진 토양은 가볍고 건조하며, 돌이 많이 섞여 있고 척박한 편이다. 제주 농민들은 이러한 농업에 불리한 토양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진압농법 등의 농업기술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된땅이 드물고 뜬땅이 대부분이어서 집을 짓거나 벼농사를 영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기후와 토양의 영향으로 식생도 육지와 매우 달랐다. ‘이라 부르는 무성한 숲은 먹거리와 목재의 공급처뿐 아니라 유사시에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한라산은 고도에 따라 다양한 식물들이 자랐고, 이러한 식물에서 유래한 귀한 약재와 목재는 조선후기 제주의 중요한 특산물이었다.

자료의 한계로, 조선후기 제주의 인구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우나, 마을 이름을 통해 촌락의 확장과정을 살필 수 있었고, 이로 미루어 보아 18-19세기 사이에 인구가 증가하였음을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제주 인구의 특징으로는 남자에 비해 여자가 많다는 것과 장수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지형, 토양 등 자연조건 때문에 육지에 비해 제주의 농업은 활발한 편은 못되었다. 그러나 불리한 자연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특유의 농법을 개발, 사용하였다. 공납의 목적이 강했지만, 과수 재배와 목축이 제주의 중요한 경제활동이었으며, 이를 위한 국영 과수원과 목장이 운영되었다. 조선후기 제주의 산물은 농산물은 물론이고, 산과 바다에서 나오는 축산물, 임산물, 수산물 등으로 구성되어 육지의 어느 곳보다 다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산물들은 대부분 공납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2. 조선후기 地圖實景圖에 반영된 濟州

본문에서는 조선시대 제주도 지도와 地志, 실경도를 분석하여 그 시기별 특성과 변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당시 제주도에 대한 인식변화를 파악하려 하였다. 첫째, ????조선방역지도????, ????동국지도????, ????대동여지도???? 등과 같이 조선전도 속에 묘사된 제주도의 모습은 전도 속 일부로서 그 위치와 지형의 변화를 살필 수 있었다. 둘째,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해동지도???? 제주삼현도와 같은 군현지도와 1709년에 제작된 ????耽羅地圖幷序????의 목판본 탐라지도와 같이 제주도를 단독으로 그린 지도에는 세부 지명은 물론 행정의 중심이 된 관아, 군사적 목적의 관방, 경제적 측면의 목장, 과원 등 주요 인문정보를 반영하여 시기별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이다. 또한 특수 지도인 ????목장지도????17세기 제주목장의 분포와 입지 조건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먼저 조선전도 속에 묘사된 제주도의 모습은 전도 속 일부로서 그 위치와 지형의 변화를 살필 수 있으며, 제주도를 단독으로 그린 지도에는 세부 지명은 물론 행정의 중심이 된 관아, 군사적 목적의 관방, 경제적 측면의 목장 등 주요 인문정보를 반영하여 시기별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목장지도????와 같이 특수 지도인 17세기 제주목장의 분포와 입지 조건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또한 제주도에 대한 실경을 그린 작품 중 1694년 제주목사 李益泰가 제작한 ????탐라십경도????가 기록으로 전하며, 1702년부터 1703년에 걸쳐 제주목사 李衡祥이 제작한 ????탐라순력도????가 현존한다. ????탐라십경도????는 조천관, 별방소, 성산, 서귀포, 백록담, 영곡, 천지연, 산방, 명월소, 취병담 등 제주의 절경을 그린 것으로, 17세기 말 산수 유람과 명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제주목사 이익태가 십경을 직접 선택한 점에서 주목된다. 이후 부임한 이형상은 명승지에 그치지 않고 제주목의 주요 행사나 가을 순력 등 제주목사의 공적인 활동과 제주의 특산물, 풍속 등을 묘사하여 기록 이상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탐라순력도????에 나타난 행사기록화는 순력의 목표인 방어를 위한 군사 시설과 형지를 파악하고, 제주인의 풍속을 각 지방관들과 함께 살피는 것이 대다수이다. 목장이나 말의 점마 외에도 제주목사의 순력 동안 중요한 행사는 감귤의 봉진, 사냥, 군사훈련과 試射, 성균관 문과 초시,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베푼 양로연 등을 들 수 있다. 본문에서는 문헌 자료 중심의 제주 연구에서 외연을 확장하여 지도와 기록화, 실경도 등과 같은 시각적 사료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문헌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사각지대를 보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 신광수(申光洙)탐라록(耽羅錄)에 나타난 제주에 대한 인식과 정서

조선이면서도 바다 가운데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탐라는 조선 후기 사대부에게 미지의 공간이었다. 三聖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 瀛洲라는 신선이 사는 전설상의 공간, 그럼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뱃길을 통해서 다가갈 수 있는 絶島 등의 이미지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탐라를 더욱 신비로운 공간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제주를 바라보는 육지인의 이해는 직접적인 경험이 부족했기에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였다. 쉽게 왕래할 수 없었기에 실제 제주를 경험한 이들은 유배를 오거나 관리로 파견된 이들로 한정되며, 또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제주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제주에 대한 인식은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노인성이 보이는 신선이 사는 공간으로 이해하여 관념적 동경의 공간이거나 절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가기 싫은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반된 인식은 실제 경험을 통하지 않은 관념적인 인식이었다. 또한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국왕의 덕화가 미치지 못하는 낙후된 공간적 인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비해 신광수의 사례에서 보듯 제주를 실제 경험한 인식의 태도는 매우 현실적이다. 그들에게 제주는 절도, 곧 자기 의지와 무관한 孤立無援의 공간이었다. 더구나 체류 내내 운무에 가려 멀리서도 볼 수 없었던 한라산은 선계가 아니라 답답함을 자아내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사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육지의 가족과 소식을 전할 주고받을 수 없는 제주는 말 그대로 갇힌 공간이었다. 운신할 수 없다는 답답함,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혹시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복합되어 병이 나는 갇힌 공간이라는 인식하였다. 의지에 따른 체류가 아니라 갇혀 지내며 유일한 소일거리가 시를 짓는 것이었지만, 그들의 시편에 사신으로서 또는 큰 바다를 바라보는 장대한 기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문학작품에서는 言表보다 기술의 의도, 내재된 사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한시가 지어지는 근저에는 작가의 현실인식과 문학사상이 반드시 자리한다. 이러한 인식과 사상 속에서 다른 사람과 변별되는 자기만의 작품을 창작하게 된다. 문학사에서 18세기는 개성주의 문학사상이 확고하게 자리하던 시기였다. 그들의 문학사상은 바로 현실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럼 점에서 신광수의 제주 경험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인식은 18세기 문학을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대주제 3 : 일상과 민속

1. 제주 신화, 생활상을 만나다!

이 연구는 현용준현승환의 역주본 중 일반신본풀이와 당신본풀이를 대상으로 그 내용 속에 담긴 일상의 모습을 정리하여 제주신화의 일상성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용준은 제주도 신화의 수수께끼에서 제주신화의 일상성을 어느 정도 검토하기도 하였다. 특히 쌀과 음식을 먹는 신과 돼지고기를 먹는 신’, ‘돼지고기를 먹고 일곱 아기를 낳는 것은’, ‘신화가 먼저인가 사회관습이 먼저인가등은 제주의 일상생활과 신화의 연결고리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의식주를 중심으로 하고 가정생활과 나이에 대한 인식 및 신들의 사랑과 불륜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첫째, 신들의 주거공간은 어릴 때의 안식처로 석함이 등장하고 안식처로서는 오름과 그 주변으로 나타난다. 즉 특정한 형태의 신전이나 사당과 같은 양식의 건물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둘째, 신들의 옷 역시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셋째, 신들의 음식은 매우 다양하게 등장하며,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인 경우에도 메밥, 각종 나물무침, , 계란요리, 과일, 해산물 등 매우 자세히 등장한다.

넷째, 가정불화인 경우 부부갈등과 부자갈등이 주로 나타난다. 다섯째, 15세라는 나이가 매우 강조되었다. 수명의 최소 단위 및 생명 연장의 단위,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나이, 혼인할 수 있는 나이, 부모 도움 없이 혼자 놀 수 있는 나이,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나이 그리고 여성의 생리가 시작되는 나이 등으로 등장한다. 대개 15세 이후 성인의 자격을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섯째, 농경신으로 좌정하는 과정에서 사랑이 주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농경과 목축에서는 풍요와 다산이 중요하므로 이는 자연스러운 연결로 볼 수 있다. 일곱째, 공동체의 분리와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를 불륜에 의한 가족과 거주 공간의 분리로 다루고 있는 점 역시 매우 흥미롭다. 궁극적으로는 제주신화의 일상성의 총체적은 모습을 검토하고 정리하기 위해서는 일상성을 구성하는 다양하고 풍부한 지표를 개발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주신화 전체를 대상으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 이는 이후 과제로 남겨둔다.

2. 조선시대 제주의 주변성과 의료문화

제주는 고려 이래 일종의 藩國으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남방의 섬이라는 자연환경 특성 때문에 본토에서는 구할 수 없는 다양한 약재나 토산물의 進貢을 기대하는 지역이었다. 선초부터 제주도에 심약을 파견하고 의학교수를 두어 지역에서 활동할 의생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의생은 사족 자제들 가운데 학식이 있는 이들을 의사로 키우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들은 지역의 의료를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주요 진상 약재의 채취나 품질 관리 등을 관리하기도 했다.

조선 정부는 주요 약재 산지에 약국이나 의국을 설치하고 해당 지역의 약재를 중앙으로 수집하고 이를 다시 지방의 의국을 통해 재분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곳에는 혜민서의 의원인 심약이 파견되어 진상 약재의 품질을 감독하고, 해당 지방관을 도와 중앙으로 원활하게 공급되도록 관리했다.

심약이나 지방관처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만으로 의국의 운영을 제대로 보장하기 어려웠다. 의국에서는 계절에 따라 늘 약재를 채취할 뿐 아니라 말리거나 찌고 볶는 등 약재를 진상하기 위해 일정한 제조과정을 거쳐야했다. 이러한 일들을 심약 혼자 모두 관리하기는 불가능했기에 따로 지방의 鄕所에서 활동하는 향촌의 품관사족들에게 의국의 운영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의국 운영에는 기본적으로 직역으로 동원된 藥漢이나 약재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한 자들, 아울러 약재를 무역하는 역할 등 다양한 지위의 인원이 필요했고 이를 관리감독하기 위해 사족들의 자율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각 지방의 의국은 서원이나 향교처럼 국가에서 제공한 둔전을 바탕으로 존본취리의 자율적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1년에 한번 지방관의 심사를 거치는 정도였다. 의국에는 단지 관리자 이외에도 의술에 밝은 사족들 이른바 儒醫라 불리른 이들이 참여하여 진상 약재의 품질을 관리할 뿐 아니라 지역민들을 위한 약재의 무역 그리고 약물 제조 등 다양한 일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들 사족들은 藥契醫局契를 결성하여 의국을 운영했으며, 의국을 통한 진상약재의 관리 뿐 아니라 지방 의료 혜택의 확산은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새로운 대안으로 구체화되기도 했다. 사족들은 기본원금을 유지하면서 약재를 무역하고 제조하여 매매하는 방법으로 식리 행위에 나서고, 이익을 해당 지역의 향교나 서원 혹은 향소의 운영비로 환원하기도 했다. 이른바 사족들의 자발주의는 지방관과 무관하게 사족들만의 자치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의 협응 속에서 더욱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가능케 하려면 이른바 爲己之學[성리학]의 확산과 더불어 공공을 표방하는 사족들의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한마디로 제주는 성리학의 더딘 확산과 이로 인한 사족 형성의 지체 현상, 사회적 자본의 결여가 제주 의국의 지속적인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제주의 주변화는 이러한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어려운 상태를 의미했고 의국에서 관리자나 유의로 활동할 만한 사족들의 성장이 불가능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결국 제주에 부임하는 지방관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잠시 의국이 운영되었다가 곧 폐지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17세기 말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의국 운영에 뜻있는 제주목사들은 의국의 자본금을 마련하여 제주민에게 다양한 의료 혜택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방관의 체직과 더불어 의국의 운영이 지속되기 어려웠던 것이 역사적 현실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과 그 기원이 같다고 할 수 있는 의 강력한 위세도 중요한한 몫을 담당 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대부분의 재앙에 대해 인간은 귀신에게 빌거나 무당을 섬겨왔다. 하지만 역사의 발전에 따라 합리적인 해결책을 마련했고 이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역할이 에서 로 변화해온 역사로부터 증명되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제주의 음사와 무당들의 위력은 제주의 품관사족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목사가 아무리 神堂을 불태우고 억압해도 이들은 들불같이 되살아났다. 제주사람들도 약을 먹기보다 귀신을 선호했다.

두창의 치료제로 알려진 玳瑁(거북껍질)는 제주 지식인의 의서에 등장하기보다 제주 해녀의 신비한 이야기로 둔갑되어 전할 뿐이다. 의술이나 본초 정보가 공개적인 지식의 으로 나오지 못하고 은유의 형식으로 묻히는 데는 의 투쟁 과정에서 의 우위를 상징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필자는 이를 제주의 주변화와 그로 인한 의료문화의 특성이라고 정리하고자 한다.

대주제 4 : 사회문화적 다양성과 독창성

1. 제주복식의 다름과 습합(習合)

제주의 복식은 육지의 복식과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기에 이 본고의 목적은 제주의 복식이 육지의 복식과 다르다라는 명제를 기저로 왜 달랐으며, 어떤 것이 달랐는지 구체적인 복식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다름 속에서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이 조선의 갓 문화를 어떻게 이끌었으며,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저술되었다.

그 특징으로는 첫째, 제주의 기후와 그들의 생활기반인 목축과 바닷가에서의 생활이 복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제주복식의 다름도 그들의 자연·지리적 생활환경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 대표적인 복식은 생활복이면서 노동복인 갈옷, 목자옷, 해녀옷 등이 제주지역의 고유양식으로 발전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셋째, 갈옷, 목자옷, 해녀옷 중에서 육지의 복식과 가장 빠르게 습합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들의 의관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갓이다. 제주는 말총으로 만든 망건, 양태, 총모자, 탕건 등을 육지로 운반할 수 있는 항구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유통의 최대의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넷째, 제주에서 만들어진 말총은 결국 육지로 유통되어 조선의 갓문화를 만들었으며, 지금까지도 제주의 독특한 모자문화를 생산하고 있다. 끝으로 제주의 총모자와 양태를 만들 수 있는 원천기술을 통해 현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모자문화로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2. 조선시대 국가 제사와 제주도 흑우

본 연구는 조선시대 제주도의 사회 문화를 중앙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종묘와 사직 제향에 올려지는 흑우의 존재에 대해서 살펴보면 먼저 줄어들거나 폐지되는 다른 진상품들과 달리 제주 흑우의 진상 숫자가 계속 증가하는 원인에 대함이다. 태조와 4대의 선왕을 모신 오묘제(五廟制)로 시작한 종묘의 신실이 후대에 갈수록 증가하는 상황이 흑우의 수량을 증가시키는 일차 원인이었다. 이는 세대의 자연적인 증가가 아니라 불천지위의 세실(世室)이 수가 증가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제주 흑우의 진공 수가 증가한 또 다른 요인은 친행 기우제의 증가였다. 현종대에서 영조대 사이에는 연속된 가뭄과 흉년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우제의 횟수가 많아졌고, 그와 더불어 국왕이 직접 기우제를 거행하는 빈도수도 늘어났다. 남단에서만 거행하던 친행 기우제는 북교, 우사단에서도 거행하였다. 그리고 종묘와 사직에서도 국왕의 친행 기우제가 늘어났다. 이러한 국왕의 친행 기우제에는 소를 희생으로 사용함에 따라 흑우의 수요가 증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직 기곡제의 정례화 역시 1년에 소비되는 흑우의 수를 증가시켰다.

한편, 조선후기 우역의 발생은 흑우의 사육과 우송을 어렵게 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서울 인근의 경기 지역이나 충청도 지역에서 흑우를 키우려고 하였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안면도의 흑우 목장화였다. 그러나 삼림의 훼손으로 이 사업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제향에 소용되는 흑우의 생산은 제주도와 거제도에 한정되었다. 거제도에는 5마리로 고정되었지만 제주도에서는 20마리에서 계속 증가하여 1867(고종 4)에는 제주도 전체 흑우수가 47마리로 증가하였고, 대한제국기에는 49마리까지 이르렀다.

제주도 목장에서 흑우를 기르던 곳은 제주목의 일소장, 육소장, 정의현의 십소장, 대정현의 모동장, 가파도 등이었다. 지역별로 흑우 진상 수효를 살펴보면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순서로 많았다. 철종대에는 제주목에 20마리, 정의현에 14마리, 대정현에 8마리였고, 1867(고종4)에는 제주목에 22마리, 대정군 10마리, 정의군 15마리였다. 이들 흑우는 제주목에 모아져 두 배로 나뉘어 육지로 운송되었다. 생후 3년이 지난 소들이 주로 진상되었다. 출송되는 시기는 상황에 따라 달랐지만 4월이 가장 많이 나타났다. 화북포에서 옮겨진 흑우들은 호남과 호서 지역에서 일정 정도 양육되었다가 서울의 전생서로 옮겨져 3개월 정도 있다가 제향에 바쳐졌다. 전생서 관원이 제향 전날 종묘로 데려오면 상태를 점검받은 후 도살처로 옮겨졌다. 1745(영조 21) 영조가 제정한 친림성생의(親臨省牲儀)는 국왕이 직접 희생의 상태를 점검하는 의식이었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 진상되는 소의 상태나 전생서에서 돌보는 정도가 더욱 섬세해졌다. 제향 때면 종묘는 하나의 도살장이 되었다. 3, 4마리의 소를 비롯하여 양과 염소가 도살되고 분해되었다. 흑우는 모혈(毛血)과 간료, 머리와 네 다리의 생고기, 숙육(熟肉)으로 구분되어 바쳐졌다. 이러한 흑우의 희생을 통해서 신에 대한 공궤의 정성이 드러나고 국왕과 백성의 기원이 흠향되었다.

3. 조선후기 제주도의 토지소유와 토지매매

이 연구는 조선후기 제주지역의 토지매매의 특징을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이를 위해 토지 소유와 관련한 쟁송 및 매매 문서를 분석 한다. 분석을 위한 중요 자료는 제주 어도 진주강씨 강익진 후손가 고문서이다. 토지를 둘러싼 쟁송에 있어 토지 매매명문의 역할이 중요했으나 소유 확인 및 매매 경위와 관련한 문중, 동중의 개입이 있었다. 매매자 사이의 분쟁과 매매 확인에 있어 제주 지역 洞里門中의 강한 연결, 행정 망과 동리의 연계 속에서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일면 괜당이라는 제주 지역 사회와 마을의 특징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매매명문이 19세기 중엽 이후 매득자에 대한 미기재 현상의 하나로 마을 구성원 상이의 상호 소유증명 현상이 나타나는 현실을 설명 할 수 있는 사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매매명문에는 매매토지의 위치에 대한 표기에 있어서도 사표를 중요한 요소로 수록하고 있다. 이는 田畓, 특히 위주로 구성된 제주지역 토지의 현실 그리고 토지의 제한으로 인한 분쟁의 요소를 차단하기 위한 대응이었다. 대체로 양안의 기재요소를 매매명문에 반영하여 매매 후 쟁송과 소유권 확보를 담보하는 양상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토지매매 사유로 조상전래로 상징되는 분재가 대두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18세기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분재가 주요 토지 확보 사유로 등장하면서도 19세기 이후 매득이 증대되는 것은 제주지역 사회의 변화요소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분재의 경우에도 처변’, ‘모변유래를 19세기 후반까지 기재하고 있음은 제주지역 분재관행의 보수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따른 위상을 반영한 결과로 분석 할 수 있다.

4. 향약의 이념과 실천: 제주 가시리 마을의 마을 만들기 사례

제주도의 마을 사람들은 향약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제주도의 가시리 마을 향약을 구해서 보았을 때 마을만들기의 주요 내용이 향약에 기술되어 있다는 데서도 다시 놀랐다. 향약은 공허한 슬로건이나 서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과 마을운영에 이용되고 있는 마을 헌법이었다. 이 향약은 가()의 논리의 연장선이 아니다. 가의 네포티즘 논리는 이 향약에서 극복되고 있다.

가시리의 향약은 주민들이 자치와 민주를 통해 만들고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구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어떤 향약도 이렇게 구체적 실천을 담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시리의 향약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시리의 향약은 마을이라는 좁은 세계, 주민들의 이익 수호하는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했다. 가시리의 향약은 마을주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자원(오름,억새, 쫄븐갑마장길 등)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으며 유채꽃축제, 트레일 러닝, 전시 등을 무료로 제공하여 커머닝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의 축제 나아가 대한민국의 대표 축제가 된 제주 유채꽃 축제는 서귀포시 주관으로 가시리에서 가시리의 땅에서 개최된다. 가시리 마을의 조랑말체험공원, 유채꽃광장, 조랑말 박물관, 녹산로 등 가시리 주민들이 가꿔온 땅, 즉 총유의 땅에서 전개된다. 자신의 것을 공동의 재산으로 만들어 여러 가지 사업을 개발하여 수익을 창출하면서도 마을바깥의 모든 사람들에게 마을의 공유재산, 자연을 마음껏 누리도록 한다는 점에서 작은 한 마을의 주민들이 대한민국의 스승이 된 것이다. 더욱이 이 가시리 마을은 마을주민들의 후손들도 영원히 이 마을의 자산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 데서 미래세대에 대한 현 세대의 책임, 미래세대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했다는 점에서 세계적 의미도 갖고 있다.

세부과제별 요약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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