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 기초연구/공동연구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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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AKSR2019-C06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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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강재광 | ||
공동연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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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기간 | 2019-01-01 ~ 2019-12-16 | 연구형태 | 공동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 중국 소재 한국고대사 관련 금석문(묘지명) 분석을 통해 고대 한국 유이민의 당나라 이주 현황과 그들의 생애 및 생활상을 드러냄으로써 고대 동아시아 관점에서 한중관계사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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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방법 및 내용 | ○ 중국 당나라에 유이민으로 정착하였던 고대 한국인의 생애와 업적, 활동상, 시대인식 등을 심층적으로 조명 ○ 중국 소재 금석문에서 보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유이민의 在唐 생활상 분석 및 그들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의의 부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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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 연구결과물에서 세부 목차는 별도로 구분해 놓지 않았으며 총설과 4편의 논문을 배열하여 목차를 구성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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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 ○ 고구려·백제·신라 및 발해 유이민의 在唐 생활상 분석 및 역사적 성격에 대한 논문 4편 및 총평 완성 1. 「고구려 유이민(遺移民)의 삶과 죽음」(공동연구원 조범환) - 고구려 유이민 27명의 입당시기 및 번장(番將)으로의 출세 분석 - 고구려 유이민의 장안·낙양 사제(私第) 분석 및 혼인관계의 특성 분석 2. 「재당 백제 유민의 활동과 출세 배경」(공동연구원 김영관) - 백제 유민을 왕족(10명), 귀족(17명)으로 구분하여 재당 생활상 복원 - 백제 유민의 당에서의 출세배경을 4가지 측면에서 상세 분석 3. 「在唐 신라인의 삶과 죽음」(공동연구원 김희만) - 재당 신라인 묘지명 4점을 통해 신라인 이민의 생활상, 혼인관계 분석 - 재당 신라인 여성 3인의 생애과 죽음에 대한 생활사적 분석 4. 「在唐 渤海人의 삶과 시대 인식」(공동연구원 한준수) - ‘낙사계묘지명’을 통해 재당 발해인의 처우, 위상에 대한 분석 - ‘낙사계’의 재당 관직생활의 한계와 현실인식에 대한 분석 *「총평」: 논문 4편에 대한 총론(공동연구원 김창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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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拜根興, 「중국 소재 한국고대사 관련 금석문 자료의 현황과 전망」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3, 2002. 권덕영, 「한국고대사 관련 중국 금석문 조사 연구」 『사학연구』 97, 2010. 곽승훈 외, 『중국 소재 한국 고대 금석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5. |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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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 목적 이 연구는 중국에 소재한 묘지명 자료를 통해 당(唐)으로 이주하였던, 이른바 한인계(韓人系) 유이민(遺移民)의 삶을 살펴보고, 그 역사문화적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한편 이 연구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재당 한인계 유이민은, 시기적으로 중국의 당(唐) 왕조와 더불어 우리 역사상 고구려·백제 그리고 신라와 발해가 함께 하였던 시기였기에 당연히 여기 출신들을 대상으로 한다. 특히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까닭에, 망한 나라의 많은 수의 유민(遺民)이 발생하였고, 이들 유민의 상당수가 신라와 당으로 강제적으로 또는 스스로 이주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이유와 배경으로 당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들도 포함한 용어로서 재당 유이민(在唐遺移民)이라고 칭하겠다. 역사 연구에 있어 기본적 토대는 기록이며, 문자(文字)로 집약된 문헌 등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활용된다. 금석문(金石文)은 문헌사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역사적 재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문헌 자료가 2차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1차적 자료인 금석문이 현장감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금석문이 동시대에 만들어진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여 주는데, 문헌자료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한국 고대사의 경우 그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금석문은 한국에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으며, 특히 중국에는 수많은 한국 고대사 관련 금석문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당(唐) 시기 금석문이 대략 1만여 점 있으며, 그 가운데 276점 정도가 한국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17년 중국 고고학자 뤄전위(羅振玉)에 의해 한국 관련 묘지명(墓誌銘)이 소개된 이후 연구는 확대되고 있는데, 대체로 당사자와 관련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유이민의 시각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에 소재한 한국 관련 금석문을 조사·정리한 고찰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구명하고 중국 금석문을 활용한 한국 고대사 보완이 제시되어 관련 자료의 고찰에 있어서 한 단계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묘지명 자체에 대한 고찰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그 원인은 지극히 단편적이라는 자료의 특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유이민의 시각에 국한하여 제한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종합적인 고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當) 시기 한반도와 만주·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며 각 국이 전개했던 치열한 외교와 문물 교류가 함축하고 있는 시대상과 그들의 인식체계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파악하는데 미흡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묘지명에 대한 연구의 심화와 더불어 그 당사자가 삶을 영위하던 당시의 대내외적 상황을 시·공간적으로 시계열(時系列, Time series)하여 접근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전개되는 직관적 고찰을 넘어 묘지명에서 추출한 정보를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상을 분석·도출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당사자들이 민족적 혹은 국가적 정체성을 초월하여 존재했고, 다양한 사회적 네트워크(Net Work)를 구성하며 활동했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타국에서 민족적 소수자(National minority) 혹은 사회적 소수자(Social minority)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며 당당히 세계인으로서 자신과 가문(家門)의 삶을 영위하였던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이러한 배경 아래서 중국의 당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삶을 전개하고 그 자취를 묘지명에 남긴 한계 유이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추출하였다. 오늘날 세계화로 표현되는 국제적 교류가 현대 사회에 들어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 사회에서부터 역사적 시원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고찰을 통해 묘지명이 아카이브(Archive) 문화는 물론 디아스포라(Diaspora)와 글로벌 네트워크의 살아있는 역사적 화석(Historical fossil)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것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2. 연구 특성
묘지명에 대해 학계의 기존 연구는 기본 토대의 구축에 관심이 두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관련 분야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번역과 주석 작업이 심도 있게 진행되어 그 성과가 결실을 맺은 것은 매우 상징적인 성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유이민에 대해 이루어진 고찰들은 역주(譯註) 작업의 기초로서 혹은 결과물로서 작용하고 있다. 묘지명 관련 자료가 가장 풍부한 고구려 유이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며, 다음으로 백제 유이민에 대한 연구가 뒤를 잇고 있다. 삼국통일의 승자이자 주체인 신라는 상대적으로 자료에 비해 큰 진척은 없는 편이고, 발해 역시 아직까지는 자료가 빈곤한 편이어서 고찰이 활발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각 국가별 묘지명의 유이민 연구는 지속되고 있어 긍정적인 결과가 예상되고 있다. 사실 묘지명을 포함한 금석문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흔히 금석문 자료를 1차 사료라 하며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전하고 있으므로 일반적 인식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금석문 자료를 이용하는 과정에 있어 균형적 시각의 유지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금석문 자료는 역사적 사건의 발생 시점에 생성된다는 점에서 동시성(同時性)을 보이지만, 반면에 특정 시점에 발생한 사건·상황의 한 면을 전하는 경우가 있어 단편성(斷片性)도 지니기 때문이다.
<표-1> 한국 고대사 관련 중국 금석문 국가별 분포
<표-2> 한국 고대사 관련 중국내 묘지명 국가별 비중
현재 묘지명 관련 고찰은 고구려―백제―신라―발해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표-1>에서 확인되듯이 자료의 양적 분포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편차가 크다는 점은 분명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경우 성씨(姓氏)와 가계, 이주와 교류 등 고찰 영역이 확대되면서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발해의 경우 문헌 자료에 근거하여 대다수가 발해 멸망 이후 고려의 귀부과정을 살피거나 동양사 시각에서 요대(遼代)와 금대(金代) 발해 유민의 활동상을 고찰하고 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묘지명을 통한 당 거주 발해인의 모습을 고찰한 연구는 1편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당-발해의 교류나 대외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보다 활발한 접근이 매우 필요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표-2>에서 알 수 있듯이 금석문 중 묘지명 비중은 발해가 신라와 비슷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양적 비중이 질적 비중과 동일할 수 없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고찰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묘지명의 출토 지역에 따른 분석과 더불어 제작 시기에 대한 세밀한 분석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미세하지만 지역과 시간에 따라 지역 간, 세대 간 인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별에 따른 접근도 확대되어야 한다. 동시대인이었을 지라도 남성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지니는 사회적 위상과 그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덕목이 달랐음을 묘지명의 형식이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개별 연구를 심화하는 동시에 개별 연구를 융합한 새로운 고찰이 제시되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고 하겠다. 또한 묘지명의 출토지가 중국이라는 지역적 한계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중화패권주의 사관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역할도 인식해야 한다. 현재 중국학계의 연구경향은 유이민 자신의 삶과 정체성보다는 중국에 귀속·동화되어간 모습에 역사적 의의를 두고 강조하는 상황이다. 역사를 역사적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사회적 목적에 의해 편향된 접근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논리적 대응을 전개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까지의 묘지명 연구 경향은 관품(官品)이나 관직(官職) 등 중앙이나 지방의 통치체제를 이해하는 방향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제도적 측면의 접근으로서 시대상황을 파악하는데 근간으로서 작용하고 있지만 국가별로 편중되어 있고, 시기별, 지역별, 성별 분류에 따른 고찰은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즉 묘지명을 시기별, 지역별, 성별, 주제별로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여 당대 유이민이 그 시대와 사회 속에서 담당했던 역할과 기능이 재 정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반증한다. 타국의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보여준 사회적 적응 능력과 문화적 수용 자세를 도출해내야 하는 과제이다. 이에 이 공동연구는 금석문 가운데 묘지명을 중심으로 고구려-백제-신라-발해 각 국의 유이민에 대하여 특화된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하였다. ‘묘지명=금석문’의 단순한 시각에서 탈피하여 금석문의 한 분야로서 묘지명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한반도와 한민족에 뿌리를 둔 고대인의 삶과 정체성에 대해 묘지명을 매개로 하여 심층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묘지명이 금석문 가운데 당사자의 자기 서사적 성격이 강하다는 특징을 감안하면 타당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문헌 자료와 금석문 자료에 기인한 전문 연구역량의 비대칭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에 이 과제의 수행을 위해 금석문과 묘지명을 대상으로 연구 성과를 인정받은 전문가들로 구성하였으며, 특히 중국 소재 금석문 자료의 원활한 활용과 이해를 위해 현지 전문연구자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전공자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 연구 방법
이 연구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4가지 영역으로 묘지명을 통해서 본 ① 고구려 유이민의 삶과 죽음, ② 재당 백제 유민의 활동과 출세 배경, ③ 재당 신라인의 삶과 죽음, ④ 발해인의 삶과 시대인식 등이다. 현재 중국에는 약 1만 점에 가까운 당대 제작된 금석문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 중에 한국고대사 관련 금석문이 276점이 전하는데 이것은 전체의 3% 미만에 해당되지만, 사료의 부족에 허덕이는 고대사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연구는 문헌 분석, 현지 조사, 콜로키움 개최를 통한 전문가 자문, 연구결과 발표회 개최 그리고 연구 참여자들의 지식에 바탕을 둔 창의적 분석을 통하여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중국에 소재하는 당대 작성된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 발해인의 묘지명을 분석하여 나라의 멸망에 따른 유이민의 발생과 전개, 그리고 이들 후손들의 삶과 활동양상, 죽음과 그 후사(後嗣)로 이루어지는 생활사를 총체적으로 접근하여 한국 고대사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문헌자료의 분석과 현지조사를 위주로 하여 최대한 관련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해당 시대의 생활사를 재구성하는데 이를 학제간 융합하는 관점과 방법과 아울러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점과 방법으로 접근하여 한국 고대의 역사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1) 문헌기록의 정리와 내용분석 : 한반도에서 삼국통일전쟁이 발발한 660년부터 발해가 멸망한 시점인 926년 전후의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이와 관련된 문헌기록 및 금석문을 모두 수집, 정리하였다. 이들 자료에서는 당시대인의 생활상을 기초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정리, 분석함으로써 중국 소재 금석문에 보이는 해당 시기의 역사상을 복원하는데 활용하였다. (2) 현지답사 : 특히, 이번 과제는 현지답사를 통해 묘지명의 생명력을 확보해 보려고 하였다. 최근 중국에서는 시안(西安)·뤄양(洛陽)·양조우(揚州)·청두(成都) 등의 대도시와 그 주변 도시 그리고 동북(東北) 3성(省)에 대한 개발과 함께 발굴 작업을 통해 금석문 자료가 출토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시안(西安)과 뤄양(洛陽) 등지에서 다량의 묘지명이 출토된 관계로 이들 지역을 대상으로 현지답사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문헌자료에 의존하였던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였다. 또한 가능한 한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금석문 자료의 내용을 실제 상호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3) 학술회의 개최 : 중국 소재 금석문에 조예가 있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로부터 자문과 연구에 대한 평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문헌자료의 수집 및 분석, 현지답사를 통한 자료 수집 정보 및 추가 자료의 획득에 도움을 받았고, 또 한국고대사 탐구학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학술대회(2019.10.19. 토요일, 서강대학교 정하상관)에서 최종 연구결과물에 대하여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교시와 조언을 받아 보완과 수정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연구의 완성도를 더하였음을 밝혀둔다.
4. 연구 결과
① 고구려 유이민의 삶과 죽음 668년 고구려 왕조는 사라졌으나 그 영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생명을 이어가기 위하여 여러 곳으로 이동하였다. 그 중에서 당으로 이주한 ―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 유이민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한 고구려 멸망 전에 당에 자발적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묘지명도 적지 않게 발견되었는데, 그들이 남긴 그것을 통해서도 유이민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재당 고구려 유이민 가운데 일부는 묘지명을 통해 삶의 흔적을 남겼다. 즉 죽어서 묘지와 함께 묻혔는데 자신들 삶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살아 있을 때 그것을 스스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돌아간 후 자식 혹은 지인이나 당 정부에서 이들에 대한 묘지를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이것을 통해 고구려 유민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일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당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 가운데는 자발적으로 이주하거나 혹은 마지못해 이주한 경우 그리고 부모를 따라 이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당에서 정착하여 생활하면서 출사를 하였으며 데리고 간 자녀들은 당인들과 혼인을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들은 유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으며 특히 유민 1세대와 1.5세대의 경우는 자식들에게 음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무척이나 열심히 노력하였다.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인생의 후반부를 보냈다. 고구려 유민들 중 1.5세대 및 2세대의 경우 당나라 여인과 혼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들은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살기도 하였으나 점차로 이러한 인식은 퇴색하게 되었고 서서히 당나라 사람으로 동화되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당나라 사람과 혼인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고구려 유이민들 가운데 출사를 한 이들은 수도인 장안 그리고 낙양에 사저(私邸)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로부터 사여받은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노력해서 구입한 것으로 보아진다. 특히 장안의 동가에는 적잖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의 사저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마지막으로 유민들은 사저에서 죽음을 맞이한 다음 묻힌 곳도 밝혀져 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볼 때 고구려 유민 가운데는 비록 역사서에서는 이름을 찾을 수 없으나 묘지명을 통해 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결국 당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이민들은 당의 사회문화에 서서히 동화되어 갔으며, 그들이 가져간 고구려 생활문화는 당의 문화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② 재당 백제 유민의 활동과 출세 배경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많은 수의 백제인들이 적어도 4차례에 걸쳐 당으로 들어갔다. 문헌 기록에는 최대 20,000여 명의 백제인이 당으로 끌려갔다고 하였는데,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들이 포함되었지만, 대부분은 백성들이었다. 이들이 당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흔치않다. 그나마 왕족과 귀족들 중 일부에 대해서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기록을 통해 단편적으로 알 수가 있고, 일부는 사후에 제작되어 묻힌 묘지명이 발견되어 비교적 구체적인 삶의 여정을 알 수 있게 된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이들이 당에 들어가서 활동한 내용을 살펴본 후, 이들이 당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백제 멸망 당시와 부흥운동기 당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서 관직과 관등을 받고 장안과 낙양 등에 살면서 우대를 받은 경우가 있다. 예식진과 예군 형제들처럼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군에게 바치거나, 일찌감치 투항하여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기여한 진법자 가문,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여 부흥운동 세력을 약화시키거나 직접 토벌에 참여하여 항복시킨 백제 태자 부여융과 흑치상지, 사타상여 등이 그러하다. 둘째, 백제 유민들을 안무하여 백제 고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실현하고, 신라를 견제하고자 설치한 웅진도독부에서 활동하며 당의 이익을 실현하는데 기여한 경우이다. 웅진도독으로 활동했던 부여융과 웅진도독부의 관료로 활동했던 흑치상지, 예식진, 난원경의 조부 난한과 부친 난무 등이 있고, 법총과 사택손등과 같이 왜와의 외교에 종사했던 인물이 있다. 셋째,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당에 들어가서 돌궐이나 토번, 거란 등과의 전쟁에 참여해 군공을 세운 경우이다. 부여문선과 부여준과 같은 부여씨 왕족을 비롯하여 흑치상지와 흑치준 부자, 예식진과 예군의 후예, 난원경과 사타충의와 사타리 등 백제 귀족들은 대부분이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무장으로 활약하였다. 넷째, 당에서 지위를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서는 황실이나 유력한 귀족 가문과 혼인을 통해 인맥을 쌓거나 정치적 파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문을 유지하기도 하고 몰락하기도 하였다. 백제 멸망 당시와 당이 백제 고토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에서 기여한 공으로 당에서 출세한 이들은 백제에서 성장한 유민 1세대였다. 그리고 당에 들어가 군사적인 능력을 발휘해 무장으로 출세한 이들은 백제 유민 1세대 뿐만 아니라, 2~3세대 후손들도 있었다. 당에 들어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전세대를 이어 계속되었고, 그런 노력의 결과가 얼마 되지 않지만 문헌과 묘지명 등의 기록에 남아 전하는 것이다.
③ 재당 신라인의 삶과 죽음 최근 중국에서 한국 고대 관계 금석문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7세기 이후 재당 백제인과 고구려인 그리고 재당 신라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재당 신라인 관련 묘지명은 20개이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의 유민들은 아시다시피 국가의 멸망으로 인한 강제 이주의 성격이 강한 데 반해,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대등한 국제 교류 차원의 이민의 성격이 강하였다고 보이므로, 실제 강제적 이주는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재당 신라와 관련된 묘지명의 현황을 분석해서 그들의 생활사를 추적해 보고자 ㅎ였다. 비록 재당 신라인의 실제 삶과 죽음에 보다 더 접근하기 위해서 다루려고 하는 묘지명은,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이를 통해 그 전체상을 추출할 수는 있었다. 먼저, ‘재당 신라 관련 당인(唐人) 묘지명’으로는 16개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신라 관련 활동 내용에 따라서 파병, 사신, 불교로 대별할 수 있다. 이들 묘지명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파병 관련 묘지명은 673년부터 705년에 걸쳐서 제작된 것으로 파악이 되며, 이것은 나당전쟁 시기와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남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신 관련 묘지명은 811년부터 858년에 걸쳐서 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파병 관련 묘지명이 양국 간의 전쟁시기였던 7세기에 주로 제작되었던 것과 대비하여 사신 관련 묘지명은 양국 간의 평화공존시기였던 9세기에 제작되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다음으로, ‘재당 신라인 묘지명’으로는 4개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성에 해당하는 것이 설씨부인묘지, 청하현군김씨부인묘지, 경조김씨부인묘지이며, 남성에 해당하는 것이 김일성묘지이다. 이들 묘지명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연구 논문이 제출되어 있지만, 묘지명들에 대한 종합적 연구는 아직 찾아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4개 묘지명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당 사회에서 살아갔던 신라인들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7∼9세기 당에서 살아가야 했던 신라인들의 삶의 궤적을 엿보았다. 비록 당대 신라 관련 묘지명은 단지 그 숫자가 매우 적은 4개에 한정되지만, 이들을 통해 재당 신라인의 생활사의 한 부분이라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이들 묘지명에 보이는 그들의 가계와 출생, 삶과 죽음이라는 틀에서 한정적이지만, 그들의 타국에서의 생활사를 검토할 수 있다. 먼저, 부인의 묘지명에 보이는 결혼 관련 내용에 주목하였는데, 대체로 3인의 신라 여성들은 당의 명문가의 후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명문가와 혼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비록 이주민이었지만 이들 역시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추증 관계기사가 찾아진다. 청하현군의 경우 현군은 청하 사람으로, 그 선조는 삼한의 귀한 자손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그녀의 아버지는 태복경으로 연주도독에 추증되었다. 이 역시 고인에 대한 예우이면서 동시에 고인의 자손에 대한 예우의 차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이들의 부임지는 장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적응하기 힘든 지역이었다. 이러한 환경은 이들의 건강이나 수명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④ 재당 발해인의 삶과 시대 인식 「낙사계묘지명」은 8세기 재당 발해인의 삶과 활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 낙사계와 관련된 연구가 활발한 것은 아니지만, 낙사계를 백제의 유민으로 잘못 이해한 오류를 바로 잡아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관련 연구는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대수령(大首領)”이라는 표현인데, 낙사계의 실체를 확인하는데 있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낙사계가 대수령으로 칭해졌던 것은 이러한 발해의 지방통치 현실과 무관치 않았다. 발해의 지방 통치와 인명 분석을 토대로 할 때, 낙사계는 발해의 부여부 지역을 정치적 배경으로 존재했던 말갈계 재지세력이었으며, 개인적 인연이 매개가 되어 대문예와 함께 당에 망명하였다가,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귀국이 불가능해져 재당 발해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의 관료질서 속에 존재함으로써 외형상 삶의 안정은 찾을 수 있었겠지만, 정치적 망명의 선택처인 타국에서 민족적 소수자(National minority)로서의 한계나, 외부자라는 사회적 소수자(Social minority)의 편견을 뛰어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 수제(首題)에 당 황제가 하사한 이름 “노정빈” 대신에 “고투항수령낙사계”라고 한 것은 그러한 상황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 자신이 발해 출신으로서 발해의 후예였다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해 왔음을 보여준 증거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낙사계가 발해 왕족은 아니었더라도 고위 관료였고 당에서 전공(戰功)도 있었으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발해인으로서 가지는 내면적 고민과는 별개로 현실 세계에서의 그는 귀족 관료로서 위치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사저(私邸)는 황도(皇都) 내에 고관대작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5. 기대 효과
최근 중국의 경제적 발전에 따라 중국에서는 시안(西安)·뤄양(洛陽)·양조우(揚州)·청두(成都) 등의 대도시 및 그 주변 도시 그리고 동북의 3성에 대한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당 이전 시기에 수도 혹은 부도심권이거나 대외적으로 중요한 항구도시 또는 여러 민족이 잡거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는 향후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금석문 자료가 출토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는 각 지역마다 모두 문물고고(文物考古) 업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되어 해당 지역의 문물 조사와 발굴·연구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들 기관과의 유기적인 관계나 현지답사를 통해 관련 유적이나 유물의 확인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연구를 통해 중국 소재 금석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았던 과거 우리 선조들의 삶과 죽음 등에 대한 접근으로 생활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앞으로 발굴되는 많은 금석문 연구에 초석을 놓았다고 하겠다. 또한 기존 사서(史書)에서 주로 정치·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역사를 구성하였던데 반해, 이 연구에서는 다양한 연유로 인해 당인으로 탈바꿈한 인물들에 대한 생활사를 반영해서 당시 사회를 살아간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복원해 보았다. 이 연구결과물은 문화적으로는 생활사 복원사업, 사회적으로는 후학양성, 시민들에게는 흥미로운 인식을 파생시킬 것이다. 국내 소재 문헌자료와 더불어 이번 연구는 생활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새로이 출토되고 있는 금석문 자료에 대한 연구자의 관심과 활용의 필요성을 제고할 것이다. 결국 이 연구는 제한적, 부분적 연구에서 탈피하여 보다 폭넓고 다양한 사실들을 수집 정리함으로써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알기 쉽게 분석하여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활용 방안을 모색코자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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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과제별 요약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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