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 기초연구/공동연구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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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AKSR2019-C05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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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전경목 | ||
공동연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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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기간 | 2019-01-01 ~ 2019-12-16 | 연구형태 | 공동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정원용의 『수향편』 완역(2018.12)을 계기로, 저술에 나타난 조선후기의 문화적·제도적 특징들을 학술적으로 재조명하여, 관각문인들의 문화 활동을 비롯하여 제도 및 의례의 시행 양상 등에 대하여 체계적인 검토를 수행하고자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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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방법 및 내용 | 19세기 관각문인들의 문학적 실상과 문화 활동, 그리고 국정의 제도적 맥락에 관련된 출판·의례·과거제 등의 기사들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는 정원용의 『수향편』을 중심으로, 문학, 예술, 서지학, 종교학, 제도사 등의 맥락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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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1. 정원용의 관각 활동과 문학적 교유 양상 2. 정원용의 연행 체험과 관련 기록의 특징 3. 19세기 관각문인 정원용의 서화 인식과 향유 양상 4. 『수향편』에 나타나는 인쇄 출판 관련 기록과 그 의미 5. 19세기 국장(國葬) 속 왕과 관리의 모습 6. 『수향편』을 통해서 본 과거제의 실제 모습과 그에 대한 정원용의 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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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 우선 정원용의 문학적 교유 양상 및 관각문인들의 문학 활동, 19세기 연행 문화에서 정원용의 연행(燕行)이 지니는 의미 등을 논하였다. 미술사적 측면에서는 정원용이 관각문인으로서 향유했던 서화(書畫) 문화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조선후기 제도의 모습과 관련하여, 19세기 인쇄 및 출판에 대한 정원용의 꼼꼼한 기록을 바탕으로 그 의미를 분석하고, 왕실의 상례(喪禮)가 구현된 모습을 살펴보았다. 과거제도 시행에 대한 정원용의 사적(史的) 기술 또한 구체적이므로, 이를 통해 조선후기 과거제도의 시행 양상과 의미를 논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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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정원용 저, 신익철 외 역, 『수향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8. 鄭元容, 『經山集』,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 DB.(http://db.itkc.or.kr/) 鄭元容, 『燕槎錄』, 『연행록총간』, KRpia, 2016. 『東省校餘集』, 『규장각』 11, 1988, 73-158쪽. 奎章閣 編, 『奎章閣志』, 丁酉字本. 奎章閣 編, 「板堂考」, 『書物同好會會報』, 11號 (昭和 16). 정옥자, 「『동성교여집』에 대하여」, 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刊行準備委員 편, 『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서울: 知識産業社, 1983. 김종진, 「鄭元容의 『燕槎錄(詩)』 小考」, 『한국어문학연구』 제42집,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04. 허경진·천금매, 「『燕槎錄』을 통해본 鄭元容과 淸朝 文士들의 문화교류」, 『동북아문화연구』 제19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9. 허경진, 「연세대학교 소장 고서의 문헌적 가치: 13종 저술을 통해본 관인 정원용의 기록태도」, 『동방학지』 146, 2009, 89~121쪽. 황정연, 「金祖淳을 통해 본 19세기 安東金門의 골동서화애호와 감상 풍조」, 『대동한문학』 제43집, 2015, 61~94쪽. 金斗鍾, 「近世 朝鮮後期 活字印本에 관한 종합적 고찰」, 『大東文化硏究』 제4집, 1976. 尹炳泰, 『朝鮮後期의 活字와 冊』, 범우사, 1991. 이욱,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 민속원, 2017. 이현진, 「조선후기 수빈 박씨의 상장 의례와 성격」, 『조선시대사학보』 76, 2016. 전경목, 「김병황의 과거 응시 전략과 그 함의」, 『일기의 행간에서 조선의 삶과 문화 깊이 읽기』, 새물결, 2018.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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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용이 19세기에 7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으며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수향편』을 중심으로 조선후기의 문화 및 제도의 주요 국면들을 고찰하였다. 문학, 예술, 인쇄 및 출판 문화, 왕실의 상례(喪禮), 과거제 운영 등의 특징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검토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정원용의 관각 활동과 문학적 교유 양상 정원용의 문학적 궤적을 통하여 순조대 이후 관각에서 형성된 인적 교유의 맥락을 살펴보았다. 정원용은 1813년 규장각 각료로서 ????홍재전서???? 편찬에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김조순, 이만수, 심상규, 남공철 등 중견 관각 문인들과 각별한 유대를 형성했으며, 당시의 세도가인 김조순의 별서 옥호정사, 도성 인근의 유하정 등을 배경으로 이들의 문학적 교유가 지속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정원용은 평안도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심상규와 묘향산을 함께 유람하였고, 이를 통해 김조순, 심상규, 김이교 등과 기존의 문학적 인연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정원용이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던 1840년에 남공철이 사망하였고, 정원용은 남공철의 간곡한 부탁에 응하여 그를 위해 묘지명을 써주었는데, 이와 같이 정원용과 기존의 중견 관각문인들 사이의 인연은 30년 가까이 진지하게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2) 정원용의 연행 체험과 관련 기록의 특징 19세기 연행의 맥락에서 정원용의 연행 체험과 관련 기록이 보여주는 특징적인 면모를 고찰하였다. 정원용은 당대 조정의 유력 인사들이나 문장으로서 이름난 이들과 시를 수창하면서 그들과의 유대감을 강하게 표현하여, 관계를 중시했던 그의 성향을 드러내었다. 본 논의에서는 정원용과 청나라 문인들의 교유 과정에서 그의 가문의식이 부각되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정원용은 정태화 등 선대의 연행에서 이루어진 청나라 문사와의 교유가 정원용 자신에게까지 이어졌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정원용의 연행 기록 중 청나라 현실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철저하게 사실 중심으로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그의 서술 태도를 확인하였다. 고위 관료로서 민감한 사안의 기록에 대하여 신중한 자세를 취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19세기 관각문인 정원용의 서화 인식과 향유 양상 정원용은 관각의 주요 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면서 서화 감평과 같은 아회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본 논의에서는 정원용이 같은 당색인 소론 명필가들의 글씨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더 나아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는 시문 수창과 아울러 글씨나 발문을 써주는 한묵(翰墨) 교류에도 적극적이어서 오늘날까지 <선면> 아회도가 전해질 수 있었음을 논하였다. 정원용은 김조순을 위해 <묘향산도>를 제작하고, 중부에게 <십승도>를 선물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감성적 지향에 문인화의 기풍이 깃들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초상화 제작에 적극성을 보였던 정원용에게서는 후대에 자신의 참모습을 남겨주고자 했던 강한 의지를 확인하였다. 4) 『수향편』에 나타나는 인쇄 출판 관련 기록과 그 의미 『수향편』에 수록된 기사 중에 우리나라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식, 정원용이 저술하고 편찬·교정한 책들, 주자소 화재로 소실된 금속활자를 다시 주조한 일, 주조한 활자로 책을 인쇄하고 반사한 일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수향편』이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인쇄문화의 변모 양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자료임을 확인하였다. 『수향편』의 기록 중에 주자소 관련내용은 주자소화재 이후 19세기 후반 중앙기구의 인쇄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요컨대, 본 연구에서는 전통방식의 금속활자 인쇄의 빈도가 줄고 민간에서 제작한 활자에 의한 인쇄가 급격히 늘어나는 과정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위해 『수향편』이 중요한 근거 자료로 기능하고 있음을 구명하였다. 5) 19세기 국장(國葬) 속 왕과 관리의 모습 『수향편』을 중심으로 19세기 국상의 주요 단면을 살펴보았다. 정순왕후, 혜경궁, 가순궁, 효현왕후의 상례를 논의의 중심에 두고 복제가 적용된 방식에 대하여 논하였다. 군신 간에 똑같이 복제를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방법을 택하는지 주목하였다. 정조의 생모이지만 왕후의 자리에 있지 않았던 혜경궁의 상에는 신하들도 주군인 국왕이 어떻게 하는가를 따르는 ‘종상(從上)의 의리’에 입각하여 임금인 순조를 만날 때는 천담복을 입어 예를 갖추도록 하였다. 또한 순조는 생모인 가순궁의 상을 당했을 때 가순궁이 왕후가 아니기 때문에 오복(五服)의 제도 중에서 가장 낮은 시마삼월복을 따랐는데, 3개월의 상기를 마치고도 백립(白笠)을 쓰고 신하들을 만났다. ‘심상(心喪)의 복제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헌종의 비 효현왕후의 상에는 왕후가 국왕보다 먼저 승하한 ‘내상재선(內喪在先)’의 상황이 적용되었는데, 왕은 신하들과 복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백포과립 대신에 흑포과립을 따랐다. 정원용의 기록을 통해 본 19세기 복제 문제에서는 상복을 입는 사람간의 관계, 특히 군신간의 차별화와 일치가 주요 관건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6) 『수향편』을 통해서 본 과거제의 실제 모습과 그에 대한 정원용의 인식 이 연구에서는 『수향편』에서 과거에 관련된 기록들만 선별하여 사료적인 면에서 그 정확성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서 과거제도에 대한 그의 인식을 점검해 보았다. 정원용은 특히 특별시험이라 할 수 있는 기로과 및 등준시의 설행과 그 연혁 등에 대하여 기존의 사서에 나오지 않은 것들을 기록하였는데, 이를 통해 『수향편』의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수향편』에는 과거제도의 폐해나 개혁안에 대한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조선시대 과거제 시행의 사적 조망에 필요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사적 의의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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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과제별 요약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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