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고 요약문

결과보고 요약문: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 기초연구/공동연구과제
과제코드 (AKSR2018-C07)
연구과제명
  • 국문 : 近代期 외국인의 한국미술 컬렉션 연구
  • 영문 : A Study on Korean Art Collections of Foreigners in Modern Period
연구책임자 박정혜
공동연구자
  • 제송희 / 국외소재문화재재단 / 가회고문서연구소 연구원
  • 신선영 / 문화재청 / 문화재감정위원
  • 김예진 / 국립현대미술관 / 학예연구사
연구기간 2018-04-04 ~ 2018-11-30 연구형태 공동연구
연구목적 및 배경

본 연구는 근대기 한국미술품의 수장 관점에서 근대기 외국인의 한국미술 컬렉션이 서구 본국과 조선에 끼친 영향과 의의를 당대 문화 교섭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으로 미술사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주제의 연구이다. 이 시기 조선의 미술품 유통 방식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한 편이며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미술품 반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조선의 문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수집해 갔는지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조선이 이국(異國)에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각인시켜 갔는가를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본 연구는 문화 교섭사적인 측면에서 근대기 외국인의 한국미술품 수장의 적극적인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연구방법 및 내용

조선에서 한국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외국인 가운데 컬렉션의 전형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4종을 정하여 그 형성 과정과 내용, 의미를 찾아보았다.

첫째, 미 해군성의 미국국립박물관(USNM, U. S. National Musuem) 건립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선의 지질 및 풍속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미국 해군 장교 버나도(J. B. Bernadou, 1858~1908)의 컬렉션이다.

둘째, 개항기 13년 동안 조선에 살며 조선에 대한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개방적인 컬렉션을 확보한 프랑스 외교관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의 컬렉션이다.

셋째, YMCA 평신도 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나름의 한국 문화에 대한 신뢰 속에 한국문화재를 소장한 미국 장로교회 목사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의 컬렉션으로 캐나다 로얄온타리오박물관(The Royal Ontario Museum)에 일괄 기증되어 있다.

넷째, 1904년에 한국에 와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 후광 아래 골동시장에 뛰어들어 다양한 장르에 걸쳐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컬렉션을 형성한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이다.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존 버나도의 한국 미술품 컬렉션

. 프랑스 외교관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한국 미술품 컬렉션

. 미국 장로교회 목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의 한국 미술품 컬렉션

. 오구라컬렉션의 형성과정과 일본의 고적조사사업

연구결과

미주, 유럽,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미술 컬렉터들의 수집 경위와 소장품의 성격을 조명함으로써 근대미술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고 보며, 미술사 분야에서는 이러한 주제로 처음 시도된 연구로서 후속 연구 촉발에 상당히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아울러 역사·국제정치·경제사 등 관련 분야의 연구에도 기여하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사료

고종실록

독립신문

皇城新聞

조선고적도보

조선총독부관보

 

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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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를로 로제티, 1996,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 나무.

민경배, 2004,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샤를 바라·샤이에 롱 지음, 성귀수 옮김, 2001, 조선 기행: 백여 년 전에 조선을 다녀간 두 외국인의 여행기, 눈빛.

제임스 S. 게일, 김인수 역, 2009,????제임스 S. 게일 목사의 선교편지????, 쿰란출판사.

조현범, 2002, ????문명과 야만-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 책세상.

조르주 뒤크로 저, 최미경 역, 2001,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 눈빛.

????캐나다 로열온타리오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2018,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캐나다 선교사가 본 한국·한국인????, 2013, 독립기념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2005, 국립문화재연구소.

 

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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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엽, 2014, 경성의 미술시장과 일본인 수장가, 한국근현대미술사학27,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pp. 155~175

김용민, 1999,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조사경위 및 경과,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국립문화재연구소.

류대영, 1998, 한말 미국의 대한 정책과 선교사업????, ????한국기독교와 역사???? 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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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외국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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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chins, Chang-su Cho, 2004, An Ethnography of the hermit Kingdom-The J. B. Bernadou Korean Collection(1884~1885), Asian Cultural History Program Smithsonian Instit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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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요약

초록 요약: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세부과제별 요약( 세부과제1, 세부과제2, 세부과제3, 세부과제4, )으로 구성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각 연구자들은 미국 해군장교 버나도, 프랑스 외교관 플랑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게일, 일본인 사업가 오구라의 한국 미술품 수집의 목적과 수집 활동, 수집품의 내용과 특징, 컬렉션의 의의 등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로 살펴 본 버나도는 미 해군성의 프로젝트였던 USNM(U.S.National Museum) 프로그램의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교육을 받고 조선에 파견된 미국 해군이다. 스미소니언박물관은 미국의 국립박물관의 성격을 가졌고 당시 박물관 자료 수집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전 세계의 과학적 탐사를 위한 USNM 프로그램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미국 정부 측에서도 조선의 개항 직후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을 파악할 필요성을 가졌고 경제적정치적전략적 선점을 위해 기초 조사가 필요했으므로 스미소니언박물관의 도움으로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파견된 버나도는 한국어를 배워 조사에 나설 정도로 열정적으로 물품을 수집했고 자신이 수집한 품목을 노트에 꼼꼼히 기록하였다. 버나도는 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집한 물품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수집한 물품은 19세기 말 조선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회화 부문에서 거리 시장이 존재했다는 점, 서민들이 구입하였던 그림의 종류, 거리 시장에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 등 주류가 아닌 서민들을 위한 미술 시장의 존재를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버나도가 조선의 그림을 수집한 목적은 조선 미술의 존재와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 아니었고 자신이 수집한 물품들, 특히 복식, 즉 입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신분에 따라 종류가 많은 조선 여성과 남성의 옷과 모자 등을 설명하기 위해 수집한 것이었다. 또 조선인들의 풍속이나 조선 서민들의 실내 장식을 보여주고자 풍속화와 민화, 조선의 동식물을 보여주는 영모도, 어해도 등을 수집하였다. 즉 버나도는 회화 역시 조선의 물질문화를 가늠하는 물품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학문인 민족학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살펴 본 프랑스 외교관 플랑시는 개항기 두 차례에 걸쳐 총 13년간 조선에서 근무하며, 조선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에 따라 프랑스의 문화와 산업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을 조선에 심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였다. 첫 번째 부임기(1888~1891)에는 주로 프랑스 박물관을 위한 문화기획자로서 활약하였다. 세브르 박물관의 조선 도자기 수집과 트로카데로 민속학박물관-기메박물관의 조선문화재 수집을 주도하였고 이를 위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였다. 또한 수집·기증에만 머무르지 않고 카르노 대통령에게 보낸 고종의 고려자기 소장처로 세브르박물관을 지정한다거나 고종이 하사한 정리의궤등 서적의 소장처로 프랑스국립도서관·동양어학교 등을 지정하여 보내는 등 문화 기획자로서 활약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 기획자로서의 그의 활약상은 모리스 쿠랑으로 하여금 한국 서지발간 작업을 진행시킨 데서 가장 큰 빛을 발한다. 그 결과, 동양 삼국 중 가장 먼저, 유럽 최초로 조선 문헌 종합 해제집이 발간될 수 있었고 이로써 프랑스의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나아가 미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문화 기획자 업무가 곧 그의 외교관 업무였다는 점을 간과하고 세브르박물관과 기메박물관에 500점이 넘는 방대한 조선 도자기를 기증한 콜렉터로서만 보아서는 부분적 이해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개인 소장품 목록에서 조선 도자류가 빠져 있다는 점은 그의 도자기 수집 활동이 공무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지 사적 감상이나 판매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방증해주기 때문이다.

한편 두 번째로 부임하는 1896년 이후에는 1900년 만국박람회의 프로모터로서 박람회 준비와 진행 전과정을 지휘하였으며 본인 스스로도 소장품을 출품하였다. 만국박람회는 프랑스 문화와 그의 개인 소장품은 서적류·공예류·회화류로 크게 대별된다. 그중 서적류는 일찍이 모리스 쿠랑이 언급한 대로 인쇄술에서는 중국과 일본보다 앞선다는 인식 아래 조선의 전적에 대한 상당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세기 이후 화원들이 제작한 수준 높은 그림들이 포함된 어정류(御定類) 서적들이나 고려시대 이래 강한 전통성을 지녀온 불교서, 유교철학과 관련한 도설이 포함된 수준 높은 고서들을 개인 소장품으로 남겼다.

다른 한편 공예류는 나전칠기류 등 고급 공예품이나 용문 돗자리 등 왕실 관련 생활용품들을 중심으로 일본 취향이 가미된 가께수리까지 다양하게 소장하였다. 또한 방대한 조선 회화류 컬렉션은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정해진찬도병, 일본의 역사고사도금병풍, 자수 역사고사도병풍, 진품으로 추정되는 관료들의 공필 채색초상화 등 왕실 주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작품들이 단연 눈에 띈다. 그리고 미인도에서는 플랑시 나름의 미적 취향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 그의 소장품에는 개항기 외국인에게 인기 있었던 겸재 정선·김홍도·신윤복·윤두서 등의 작품은 확인되지 않아 조선 전통 회화에 대한 특정한 취향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왕실 중심의 최고급 미술품 수집은 그의 활동 및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는 조선에 대한 프랑스 외교정책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친러적 경향으로 일관하였고 국내에서는 반일 친러 경향의 근왕적 세력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왕실 주변에서 많은 정보를 얻고 그 과정에서 미술품들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그의 개인 소장품 목록집인 컬렉션과 수기로 쓰인 경매목록에 대한 기본 정보를 파악한 점도 성과로 꼽을 수 있겠다.

세 번째 연구는 캐나다인이지만 미국 장로교 소속으로 한국에서 일한 제임스 스카스 게일의 컬렉션에 관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선교사들 가운데 유달리 조선 역사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한 그가 한국 선교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한 가지는 기독교의 조선화 혹은 한국적 기독교의 정착이었다. 게일은 성서를 번역할 때 기독교의 유일신(God)하나님(Hananim)’이라는 순수한 조선의 말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여 마침내 1906년 공인역본을 낼 때 하ᄂᆞ님으로 통일한 데에 절대적으로 기여하였고, 1899년 조선인이 부르는 찬양은 서양인의 것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여 경기도 민요 양산도 가락에 가사를 붙인 꽃과 새를 보라를 직접 짓기도 했다. ????텬로력뎡????의 삽화가 서양식 인물이 아니라 두루마기를 입은 예수나 한복을 입은 천사로 표현된 것은 김준근의 창의적 표현이라기보다 조선화 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게일의 주문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게일의 컬렉션에는 <능행도>처럼 판권에 의해 입수 경위를 거의 확실하게 상정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백동자도> 병풍처럼 다른 회화 작품들과는 현격하게 차별되는 궁중풍의 수준과 화격(畫格)을 가진 그림도 있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게일의 회화 컬렉션의 의의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첫째는 고사인물도가 시사하는 점이다. 누군가에게서 선사 받았다기 보다는 게일이 직접 구매했을 가능성이 큰 그림들이다. 게일이 한국에서 활동한 시기 서울에는 그림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책이나 종이를 파는 가게, 혹은 서화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수준의 그림들로서 20세기 초 서울의 그림을 취급하는 가게에서 판매하는 그림의 종류와 수준을 가늠 해 볼 수 있다. <죽립칠현도><선동취적도>는 김홍도의 관서를 흉내 낸 위작이며, <서원아집도>는 신윤복의 그림처럼 관서하고 인장 찍은 위작이고, <위숙경도>는 유숙의 그림이라 관서한 위작이다. 이미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김홍도와 신윤복 등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흉내낸 시정의 화가들에 의한 위작이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성적도>, 일련의 무속화, <조수전도> 등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게일의 수집 경향의 일단이다. 게일은 기독교의 교리를 어떻게 조선화하여 선교할 것인가에 주력하였던 인물이다. <성적도>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비교되는 공자의 일생과 행적을 그린 그림이며 무속화 역시 평범한 기층민들의 토착신앙과 연관되어 있는 그림이다. 한편 게일 회화 컬렉션 중에는 인물화가 많은데, 예컨대 <옥황상제도>, <용신도>, <별상신도>, <관우도> 같은 단독의 인물상은 기독교 미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예수제자상이나 성녀상, 성인상 등의 기독교 성화 이미지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상상의 동물들로 이루어진 <조수전도> 역시 서양의 신화에 나오는 동물과 비교할 수 있겠다. 게일은 그림의 내용 보다는 서양미술에서 친숙했던 도상(圖像, Icon) 위주의 인물화에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내용과 도상 위주로 그림을 감상했다면 게일에게 그림의 화풍이나 예술적 수준은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게일의 회화 컬렉션은 서양 종교인으로서 그의 선교활동에 도움이 되는 그림 위주로 수집되었던 것이라 판단된다.

 

마지막 연구는 오구라의 고미술품 수집 과정을 경주와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미술시장의 형성, 고고유적의 발굴과 고미술품의 유통 상황 등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오구라의 고미술품 수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고, 일제의 식민지 문화재 정책에 맞추어 오구라의 수집품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오구라의 고미술품 수집의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인 관료와 학자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컬렉션을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20세기 한국에서 고미술, 특히 고고유물의 유통은 고대 고분의 발굴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고분발굴은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에 따라 관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따라서 초기 고고유물의 유통 및 일본 반출과정에서 고위관료와 고고학자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오구라가 문화재수집을 시작한 초창기부터 중요문화재급의 고고유물을 대거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경제력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경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관료 및 학자들과 폭넓은 인적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둘째, 오구라가 경주지역의 고고유물과 불교유물을 집중적으로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관제 학술연구와 발굴조사의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오구라의 컬렉션에 경주지역 신라 및 가야고분의 발굴품과 불교미술품이 출토지별 일괄유물로 전하는 것은, 오구라 고미술 수집을 시작하던 1920년대 경주지역 대규모 고분의 발굴과 일제의 불교유적조사가 진행되던 상황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임나일본부의 물증을 찾고자했던 일본학자들의 경주에 대한 관심과 한국 고적에 대한 관리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했던 관료들의 불교유적 정비사업 등이 일본인 오구라의 개인적 관심과 일치하면서 초기 수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오구라의 문화재수집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수량에서 다른 수집가들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의 전시를 통해 자신의 컬렉션을 과시하고 문화재 지정 신청을 통해 수집품의 위상을 높여나갔다는 사실이다. 오구라는 대규모 발굴이 뜸해지는 1930년대 후반에도 골동상과 경매 등을 통해 컬렉션을 확장해 나가는 한편 수집품의 내용과 질을 정비하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오구라가 자신의 컬렉션을 단순한 재화적 가치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일치시키면서 수집에 열을 올렸던 것은 일본 수집가 그룹들과의 교류와 경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오구라와 일본의 컬렉터들과의 교류, 일본 고미술시장에서의 한국 고미술품의 가치 등을 검토하면서 오구라컬렉션을 좀더 폭넓은 시야에서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세부과제별 요약
세부과제1

존 버나도(John Baptiste Bernadou, 1858~1908)1880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82USNM(U.S.National Musuem)의 프로그램에 선발되었고 그 프로젝트를 위탁받은 스미소니언재단(Smithsonian Institution)에서 표본 수집을 위한 특별 훈련을 받았다. 이후 버나도는 스미소니언재단의 연구원으로 18843월부터 18854월까지 약 1년 동안 조선의 지질 및 풍속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를 파견했던 스미소니언재단은 미국의 국립기관의 성격을 가졌고 당시 설립하고 있는 박물관 자료 수집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전 세계의 과학적 탐사를 위한 USNM 프로그램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미국 정부 측에서도 조선의 개항 직후 미지의 나라였던 조선을 파악할 필요성을 가졌고 경제적정치적전략적 선점을 위해 기초 조사가 필요했으므로 스미소니언박물관의 도움으로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 파견된 버나도는 한국어를 배워 조사에 나설 정도로 열정적으로 물품을 수집했고 자신이 수집한 품목을 노트에 꼼꼼히 기록하였다. 버나도는 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집한 물품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수집한 물품은 19세기 말 조선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히 회화 부문에서 거리 시장이 존재했다는 점, 서민들이 구입하였던 그림의 종류, 거리 시장에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 등 주류가 아닌 서민들을 위한 미술 시장의 존재를 구체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버나도가 조선의 그림을 수집한 목적은 조선 미술의 존재와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 아니었고 자신이 수집한 물품들, 특히 복식, 즉 입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신분에 따라 종류가 많은 조선 여성과 남성의 옷과 모자 등을 설명하기 위해 수집한 것이었다. 또 조선인들의 풍속이나 조선 서민들의 실내 장식을 보여주고자 풍속화와 민화, 조선의 동식물을 보여주는 영모도, 어해도 등을 수집하였다. 즉 버나도는 회화 역시 조선의 물질문화를 가늠하는 물품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학문인 민족학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세부과제2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 한국명 葛林德)19세기말~20세기 초에 걸쳐 13년 간 조선에서 근무한 프랑스 외교관이다. 모교인 파리 동양어학교에 약 630, 1450여 권의 조선 고서를 수집하여 보냈고, 프랑스 공사관 서기관이던 모리스 쿠랑에게 한국서지작업을 진행시켜 유럽 최초로 조선 문헌 종합 해제집이 발간될 수 있도록 하였다. 나아가 그 시기 불모지나 다름없던 조선 도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세브르박물관과 기메박물관에 500점이 넘는 방대한 조선 도자기를 수집 기증하여 이 시기 프랑스의 한국 문화재 컬렉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오늘날 이들 컬렉션이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의 관련 유물을 보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플랑시 개인의 열정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플랑시의 조선 관련 활동을 당대 프랑스의 국가적 요청에 부응한 문화 기획가로서의 활동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플랑시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등 희귀본 서적류 외에 공예·회화작품 등 245건 정도의 개인 소장품을 남겼다. 공예류는 나전칠기류 등 고급 공예품이나 용문 돗자리 등 왕실 관련 생활용품들을 중심으로 일본 취향이 가미된 가께수리까지 다양하게 소장하였다. 또한 정해진찬도병》 《자수 역사고사도병풍, 진품으로 추정되는 관료들의 공필 채색초상화 등 왕실 주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조선 회화류 컬렉션은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논문에서는 이들 공예 및 회화작품의 내역을 확인함으로써 그간 서적류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던 플랑시의 개인 소장품의 전모를 확인하였다. 이들 개인 소장품은 친러 성향의 왕실 인사들과의 친분관계를 통해 수집된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차후 이 소장품들의 유전(流傳)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세부과제3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한국명 奇一)은 캐나다 출신의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였지만 선교 활동 외에 한국의 역사, 문학 방면에도 큰 업적을 남긴 다소 이례적인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게일은 그림에도 취미가 있었고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지만 아들 조지 게일이 아버지를 추모하며 기증한 게일의 수집품을 보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수집을 하였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선교활동에 필요했던 것,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것, 선사받은 것 위주로 모아진 것이라 판단된다. 어떤 경위로 게일의 수중에 입수되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유품이 된 미술품이 아들에 의해 일괄 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점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일은 자신의 일상과 행적에 대한 기록을 매우 꼼꼼히 남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매우 소중히 간직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이는 적지 않은 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술품도 잘 수습하여 그대로 캐나다로 귀국할 때 가져갔다고 보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 파송될 때 서양의 일부 한국미술 컬렉터처럼 박물관과 조직적으로 연계되어 박물관 측의 수집 목적이나 취향에 부합하는 수집 활동을 벌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게일의 컬렉션은 수준 높은 미술품이나 명품 위주는 아니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미술품 시장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당시 미술시장에서 유통되었던 미술품의 일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세부과제4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는 한국문화재를 수집한 대표적인 일본인 수장가이다. 1,110건에 이르는 유물 중 절반 이상이 고고유물, 그중에서도 가야와 신라 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오구라의 수집이 일제의 고적조사 사업, 문화재 관리 정책과 어떠한 관련을 맺으면서 이루어졌는가 살펴보고, 1930년대 이후 오구라의 수집품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먼저 장에서는 오구라가 조선으로 이주하는 1904년부터 문화재 수집을 시작하는 1920년대 초까지 골동시장의 형성과정과 고적조사사업의 흐름을 살펴보고, 오구라가 경주고적보존회 활동을 통해 문화재 수집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장에서는 1920년대 오구라가 경주를 중심으로 유물을 수집하는 과정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1930년대 이후 주요 전시회와 중요문화재 지정 제도를 통해 수집품의 가치를 높여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일제의 조선고적조사사업이 일본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할 물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중요문화재 지정도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본고는 오구라의 고고유물 수집은 바로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과 방향을 같이 하면서, 일본의 관제 고고학자들과의 긴밀한 교류와 협조 속에서 컬렉션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드러내었다. 이를 통해 일본에 반출된 문화재는 일제가 약탈해 간 식민지 문화재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탈피하고, 일제의 조선고적조사 사업, 고적 출토품의 유통과 거래, 문화재의 지정과 관리 등 20세기 초 문화재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 속에서 오구라의 컬렉션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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