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고 요약문

결과보고 요약문: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 기초연구/공동연구과제
과제코드 (AKSR2018-C05)
연구과제명
  • 국문 : 북한 정권수립 및 한국전쟁 자료집 편찬 - 하성문고 소장 사진 및 전단을 중심으로
  • 영문 : Establishment of North Korea and Korean War - Photographs and Bills of Haseong Collection -
연구책임자 이길상
공동연구자
  • 이완범 / 한국학중앙연구원 / 교수
  • 양창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석연구원
  • 성광동 / 한국학중앙연구원 / 책임연구원
  • 우평균 /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임연구원
  • 곽병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임연구원
연구기간 2018-04-04 ~ 2018-11-30 연구형태 공동연구
연구목적 및 배경

최근 방송 등에서 해방 전후 동영상들을 소개한 적도 있으나, 북한 정권이 직접 생산한 1차 사료를 활용 가능한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형태로 집중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한 사례는 매우 보기 힘듦.

이 연구의 대상 자료들은 거의 공개된 적이 없는 1차 자료들로서 정리된 자료를 인터넷으로 공개하여 연구자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함

자료 전문가, 디지털화 전문가들로 최적의 연구진을 구성하여 연구 성과 도출 및 확산에 기여하고자 함

연구방법 및 내용

하성문고 소장된 사진 자료들 중 본 연구와 관련 된 자료를 선별하여 정리

분류된 자료들의 목록을 정해진 형식으로 작성하고 자료의 내용과 의미를 설명하는 전체 해제 작성

자료들을 촬영 또는 스캔하여 고해상도 디지털 파일로 제작

개별 사진에 대한 설명문 작성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1. 하성문고 소장 북한 사진자료 해제

2. 사진자료

소련군정

5.1

경제산업

남북협상

선거

교육문화

예술체육

정부수립

국제협력

한국전쟁

전시선전

인물

3. 참고자료

연구결과

사진집 목록 작성 및 스캔 : 13

사진 정리 : 303

사진 설명 작성 : 353

참고문헌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한울아카데미, 2008.

김남식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5 북한편, 한길사, 1989.

김학준, 「한국전쟁 : 원인 과정 휴전 영향, 박영사, 2010.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

박갑동, 한국전쟁과 김일성, 바람과물결, 1990.

송남헌, 해방 3년사 1, 2, 까치, 1990.

이완범 등, 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이완범, 해방 직후 남한 좌우합작 평가 : 국제적 제약 요인과 관련하여, 1946-1947, 국제정치논총 47(4), 2007. 105-139.

이완범, 한국 해방 3년사 (1945-1948), 태학사, 2007.

이완범, 한국전쟁 : 국제전적 조망, 백산서당, 2000.

이완범, 한반도 분할의 역사-임진왜란에서 6.25전쟁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이철순, 이정식외, 남북한 정부수립 과정 비교 1945-1948, 인간사랑, 2010.

한국일보사, 證言 金日成을 말한다 : 兪成哲·李相朝가 밝힌 北韓政權實體, 한국일보社出版局, 199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북한해8년사 연구, 백산서당, 1999.

초록 요약

초록 요약: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세부과제별 요약( 세부과제1, 세부과제2, 세부과제3, 세부과제4, 세부과제5, 세부과제6, )으로 구성
전체 연구결과 요약(초록)

이 자료집에는 북한 정권 수립 및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 당국이 촬영한 사진 303점이 선별 수록되어 있다. 원래 이 자료집의 사진들은 하성(霞城) 이선근(李瑄根, 1905~1983) 박사가 한국전쟁 시기 국방부 정훈 국장으로 근무할 당시, 부산까지 밀렸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하여 평양을 점령한 후 북한 문화선전성(文化宣傳省)에 보관하던 것을 노획한 것이다. 이 후 이선근 박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精神文化硏究院)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고, 퇴임할 때 도서관에 하성문고를 설치하여 자신이 소장한 자료들을 기증하였다. 그리고 기증 자료들 중에서 이 사진들은 특수 자료로 분류하여 동 문고의 보존서고에 보관해 왔다.

사진첩 속표지에 단기 4283[서기 1950]1021일 평양에서 수집, 육군대위 임인환(林寅桓)”이라고 만년필로 분명하게 기록된 수집 경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하성문고라는 장서인을 통해서 현재 하성문고에 보관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세부과제별 요약
세부과제1

(소련군정)

소련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한반도 북부에 진입하여 3.8선 이북을 점령한 후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군정을 실시한 직후에 원산으로 귀국한 김일성을 앞세워 194510월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를 세우면서 권력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곧 이어 민족주의자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워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194510월 포고령을 발표하여 조선인 무장단체들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조선보안대 창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1945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고 조만식 등을 중심으로 반탁 운동이 확산되자, 반탁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사실상 반 소련 진영은 몰락하였다.

 

소련은 이미 19462월부터 토지 개혁법,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등을 제정하여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지원하였다. 이후 1947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단독 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19482월경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다. 19484월부터 시작된 남북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실패하면서 남북한에서 각각 독자 정부가 수립되었다. 양측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군과 소련군은 철수하였는데, 소련군은 T-34 전차와 Yak-3 전투기, 어뢰정을 비롯한 군수물자와 3,000명이 넘는 고문관을 남겨 한국전쟁 수행을 지원하였다.

세부과제2

(5.1절)

51일은 국제노동절(May day)이다. 188651일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일일 8시간 노동 권리 쟁취 시위가 유혈 사태로 확산된 사건 이후. 1889년 파리에서 프랑스대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사회주의 단체들이 '노동자의 날'로 규정했다.

 

이후 51일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191651일 독일의 1차 세계대전 반전 시위, 191751일 러시아 노동자 전국 시위, 1979년 이란의 팔레비왕조 타도 시위 등이 대표적이다. 북한에서도 이 날을 '5.1'이라 부르며, 북한 10대 명절 중의 하나로 부를 만큼 중요한 날이다. 북한 정권 수립 이전에는 가장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19485.1절은 기존의 5.1절과 달리 북한 정권 수립 직전의 군사 역량을 과시하기 위한 국가 행사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한 행사 보다는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북한 군대와 각종 무기를 선보임과 동시에 북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의지를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특이한 것은 군사 퍼레이드를 찍은 여러 사진을 보아도 보병 무기와 야포 및 고사포 등은 보이지만 전차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침 준비 등을 위해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정부 수립 이전의 5.1절을 기록한 각종 사진들을 통해 북한의 정권 수립과 남침 준비가 일정한 궤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세부과제3

(경제산업)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남쪽에서는 주로 농업, 식품제조, 섬유산업 등 농업과 경공업 중심으로 개발하고, 북위 38도 이북지역에서는 화학, 금속, 수력발전 등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다.

 

한반도 북부 지역이 광물자원도 다양하고 매장량도 풍부하여 광공업과 중화학 공업 발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광석, 니켈, 아연, 석회석, 마그네사이트, 우라늄 및 석탄 등 거의 모든 광물 매장량은 남한보다 절대적으로 많았다. 그 결과 해방 당시 산업구조는 공업부문의 생산물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북쪽은 중공업 비중이 80%, 경공업 비중은 20%인 반면, 남쪽은 그 반대였다.

 

따라서 해방 이후 북한은 중화학공업 분야 생산에서 남한에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기반으로 철도 총연장도 남한보다 길고 조밀했고, 전력 생산량도 6배 이상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당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휘말려 파괴되었지만,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집중 육성한 북한의 중화학공업 지역은 큰 피해 없이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여기에 정리된 사진들은 해방 직후 북한의 중화학 공업을 비롯한 산업 생산 기반이 매우 탄탄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 기반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세부과제4

(남북협상)

남북협상(南北協商)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全朝鮮諸政黨社會團體代表者連席會議)’, ‘남북 연석회의등으로 불린다.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남한이 실시하는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 민주국가 수립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1948419일부터 그리고 629일부터 2차에 걸쳐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회담이라고 정의된다. 하지만 이 회담은 레베데프 비망록에 나타났듯이 소련이 한반도 지배를 목표로 하여 기획한 회담이었다.

 

그런데 이 회의에는 김구, 김규식 등 남한 단독 총선에 반대하는 남한 일부 정파 대표들과, 북한의 권력을 장악해 가던 김일성, 최용건 및 김두봉 등이 참석하였지만, 상징적인 합의문 채택 외에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사실상 남북 분단은 완료되었다. 즉 회담에 참여한 인사들 중 일부는 남으로 돌아왔지만, 홍명희, 김원봉, 백남운, 이극로 등은 평양에 남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그대로 분단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여러 사진들을 보면 곳곳에 태극기가 등장한다. 남한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준비하고 있지만, 북한은 이 시점까지도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선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85.1절 행사를 촬영한 사진에서 보듯이 이미 북한은 오래 전부터 단독 정권 수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자체 군대와 정부 형태를 조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부과제5

(선거)

북한도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만큼 국가 지도자는 선거라는 형식을 거쳐서 선출한다. 이러한 전통은 북한 정권 출범 당시부터 이어져 왔다. 그러나 북한의 국가적 선거는 우리의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에 해당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거의 전부이다. 우리의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헌법에 정해진 권한들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데 반해,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당이 우선인 만큼 조선노동당이 결정한 정책을 의결하는 역할만 한다.

 

북한에서 선거는 1948825일에 실시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가 최초이다. 투표 방식은 당이 지정한 단일 입후보자에 대한 흑백 투표함 방식으로, 찬성자는 흰색 함에, 반대자는 검은색 함에 넣다가, 1962년부터는 단일함에 찬성의 경우에는 투표용지를 그대로 집어넣고, 반대하면 기표소에서 반대를 표시하여 넣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자유로운 입후보나 투표의 비밀 보장은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한편 우리의 선거제도는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어 왔으나 북한의 선거 제도는 변화가 거의 없다. 이는 북한의 선거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세부과제6

(교육문화)

교육은 사회제도를 공고하게 유지하고 후대에 전수하는 기본 수단이 된다. 북한도 공산주의적 혁명인재 양성이라는 교육목표 달성을 위해 교육제도를 확립하였다. 우선 엘리트 및 혁명가 유가족 자녀들을 위해 혁명가 유가족학원, 김일성대학 등을 건립하여 국가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별로 초중등학교를 건립하여 산업 인력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배우지 못한 성인들을 위한 각종 성인학교를 건립하여 한글 및 선거방법 등을 교육하여 공산주의 사상 교양을 위한 토대로 삼았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 북한의 학제는 인민학교 4, 고등중학교 6, 대학 4~7년으로 되었고, 유치원 높은 반 1년 과정과 인민학교 4, 고등중학교 6년 등 11년의 교육은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다.

 

여기 소개된 사진은 해방과 정부수립을 전후한 시기의 북한 교육 상황의 일면을 잘 보여 준다.

기타

기타: 내용으로 구성
내용

(예술체육)

북한의 예술은 문학을 비롯한 음악, 미술, 공연예술 등 모든 예술 장르를 포괄한다. 다만 북한의 예술은 근로대중을 정치사상적으로 교화하는 수단이자 온 사회를 혁명화, 노동계급화 하는 데 복무하는 수단으로 규정할 정도로 철저하게 실천적 목적을 가진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예술과는 관점을 달리 한다.

 

따라서 예술도 오로지 국가 정책으로 다루어져서 당국이 지향하는 이념 전달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된다. 즉 북한의 문학과 예술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가 발현된 창작보다 체제 유지를 위한 홍보와 선전 및 교육 기능을 중시하므로 개인의 창의를 중시하는 예술 가치는 배제되고 단순히 정치 도구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정부수립)

남한이 정부를 수립한 직후인 194899일 북한 정권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형식적으로는 남한보다 정부 수립이 늦었지만, 남한 정부 수립 후 한 달이 되지 않아서 바로 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을 정도로 북한도 정부의 형식이나 군대 조직 등을 이미 완료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나 북조선노동당 등은 다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 성격의 조직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상징으로 태극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는 행위들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북한은 정부 수립을 위해 크게 두 가지 절차를 진행하였다. 우선 북한 정권이 남북한 인민의 통일된 지지로 세워졌다는 형식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19488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남한지역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회의가 열렸다. 6월에 열린 제2차 남북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회의회에서 뽑힌 각 시도별 5~7명의 대표들이 해주에 모여 360명을 대의원으로 선출하였다. 다음으로 이들은 92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제1차 최고인민회의에 남측 대표 형식으로 참석하여 북측 대의원들과 같이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98일 사전 준비된 헌법 초안을 원안대로 비준했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내각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김책·홍명희를 공표했다. 다음 날인 99'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됐고 내각 명단이 확정됐다. 그리고 최고검찰소장 등 정부 요직의 임명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여기 소개된 사진들은 이러한 과정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국제협력)

북한은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국제 외교 협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후원으로 건국한 신생국이기 때문에 외교의 대상도 주로 소련의 영향 하에 있던 공산권 국가들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한 것은 냉전에 기초한 양대 진영의 대결이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19483월에 중국과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한 것을 시작으로 10월에 소련과 수교하고 이어서 몽골,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과 수교하였다. 특히 소련과는 군정시기부터 각종 민간 교류 협력도 병행하여 추진하였다.

 

이 외에도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서방세계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제3세계 신생 독립국가들과의 협력도 추진하였다. 제국주의의 침탈을 경험한 공동의 처지라는 인식과 남한과의 외교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료집에 제시된 사진들은 정부수립을 전후한 당시 북한 외교의 실상과 한계를 잘 보여준다.

 

(한국전쟁)

 

1950625일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625전쟁' 혹은 '한국전쟁(Korean War)'으로 부르는데,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한국전쟁은 과거에 영미권 언론과 학자들이 중립적 입장에서 규정한 명칭이었으나 최근 한국에서도 언론을 중심으로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전쟁에 대하여 북한은 미국과 이승만정부가 북한이 제시한 평화통일방안을 거부하고 불시에 침공하여 발발하였지만 1953727일 휴전을 이끌어냄으로써 북한의 위대한 승리로 끝난 조국해방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 전문가들의 오랜 연구 결과 박헌영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부추기고 김일성이 승리를 확신하며 내린 남침 결정을 스탈린이 승인하고 중국의 모택동이 지원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규정되고 있다.

 

여기 제시된 사진들도 북한은 일찍부터 대규모로 군대를 양성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검증된 최신 소련 무기를 확충하여 침략 전쟁을 준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은 이 사진 자료들에 보이는 걸출한 인물들이 몰락하고 김일성 일인 독재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시선전)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북한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심리전을 수행하였다. 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잡지, 전쟁을 독려하기 위한 포스터, 상대방의 전의를 꺾기 위한 삐라, 전쟁 포로를 동원한 전쟁 반대 시위 등 각종 선전선동 수단을 시행하였다.

 

선전선동은 총칼보다 더 위력적인 전쟁무기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전쟁기 내내 때로 전쟁의 향방을 가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북한의 선전 수단은 이 당시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 자료집에 담긴 사진 및 전단들은 당시에 북한이 수행했던 심리전의 일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전단의 시기적 변화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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