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고 요약문

결과보고 요약문: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 기초연구/단독논문게재형과제
과제코드 2008-32
연구과제명
  • 국문 : 서울 팔경시 연구
  • 영문 : A study of Seoul’s eight views in chinese poetry
연구책임자 안장리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2008-05-30 ~ 2009-05-31 연구형태 단독
연구목적 및 배경

서울 팔경시에 대한 연구는 다각도로 이루어졌다. 정양완(1989)는 ‘삼각산’과 ‘한강’을 서울의 대표적 공간으로 삼았고, 서울을 읊은 한시로 서거정의 《한도십영》을 꼽았으며 《한도십영》의 대상이 되었던 장소가 조선후기 後四家는 물론 김택영까지도 경승으로 가송하였음을 밝혔다. 이혜순(1994)은 《신도팔경》, 《한도십영》, 정내교의 《漢陽八詠》 등을 조선조 한양을 읊은 대표적 한시로 소개하였다. 이들이 서울 전체를 대상으로 한 팔경시 소개에 그친데 반해 최기수는 《신도팔경》, 《한도십영》외에 정조의 《國都八詠》을 비롯하여 정이오의 《남산팔경》, 정선의 《장동팔경도》, 조선후기 중인의 《옥계십영》, 이수광의 《비우당팔경》, 이색의 《용산팔경》, 《마포팔경》, 서명응의 《서호십경》, 《파릉팔경》, 《양천팔경》, 《규장각팔경》, 《황학정팔경》 등 서울 각 지역 및 누정의 팔경을 소개하여 서울팔경의 개별적 양상까지 제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료는 지방지 및 지리지에 소개된 2차 자료이며 여전히 실제 창작된 자료량에 비해서는 적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14세기에서 18세기까지 조선조에 창작된 서울팔경시를 대상으로 대표적인 경관의 변화양상을 살펴보는 한편 시대에 따른 향유층 및 미의식의 변화양상을 살핌으로써 서울의 문학적 아름다움은 물론 이를 향유했던 조선시대 문인층의 미의시을 밝히는데 일조할 것이다.

연구방법 및 내용

서울을 대상으로 한 팔경시는 정도전에서 정조까지 50명 이상의 작가가 100여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이들 각각이 8수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적어도 800수 이상이 되는 셈이다.

이 서울 팔경시를 연구하는 방법은 작품의 내용에 따른 범주를 나누어 살피는 방법과 시대순으로 고찰하는 방법이 있다. 작품의 내용에 따른 범주 설정 방법에 의하면 지역을 대상으로 지역 내의 여덟 개 경관을 선정하는 폐쇄적 유형과 거처나 누정을 중심으로 거처에서 조망되는 여덟 개 경관을 선정하는 개방적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전자에서 선정되는 팔경이 지역내로 한정되므로 ‘폐쇄형’으로 명명하고, 후자에서 선정되는 팔경은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거처에서 조망되는데가지 나아가기 때문에 ‘개방형’으로 명명하였다.

팔경시는 기본적으로 전체경관을 아우르는 대표제와 팔경 각각에 대한 소표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울 팔경시의 존재양상은 대개 다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신도팔경》처럼 한양을 표제로 하는 경우로 이 표제에 선정된 소표제 지명은 한양을 대표하는 명승인 셈이다. 둘째는 《담담정십이영》처럼 거처를 중심으로 주변 경관을 팔경대상으로 삼는 경우로 주변 경관이 명승이 된다.

첫째 유형은 폐쇄적 유형으로 작가가 지역단위의 의식을 지니고 사고한다는 점에서 공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서울의 경우 조선의 도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둘째 유형은 개방형 유형으로 자신이나 동료의 거처를 중심으로 주변 경관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사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팔경을 통해 서울의 명승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첫째 유형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수가 적어 조선시대 전체의 서울에 대한 명승의식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대개 동일한 제목으로 차운한 경우가 많아 시대별 서울명승의 변천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먼저 14세기 조선건국에서 18세기까지 창작된 팔경시 중에 서울을 대상으로 한 팔경시를 시대순으로 고찰하도록 하겠다. 이어서 폐쇄형과 개방형으로 나누어 서울팔경시의 미의식의 양상을 점검해 보기로 하겠다.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본고에서는 서울 팔경시를 폐쇄형과 개방형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지역 중심의 폐쇄형은 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좋긴 하나 지역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하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개방형 팔경시에 비해 많이 지어지지도 않았으며, 조선 전기에 창작된 팔경시를 차운하는데 그쳤다. 조선후기에 지어진 폐쇄형 팔경시는 정내교의 《한양팔경》처럼 구체적 장소 선정보다 이념적 내용 제시에 그치거나 《국도팔영》처럼 조선후기 개방형 팔경시의 하나인 김상현의 《근가팔영》을 답습하는데 그쳤다. 이는 폐쇄형 팔경시가 지역을 대표하는 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조선전기 정도전, 서거정 등은 서울의 대표성을 드러낼 필요와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면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개방형 팔경시를 통해 이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었으며, 서울을 대표할 팔경시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 정내교와 정조 같은 새로운 계층에 의해 지어졌으나 조선전기 폐쇄형 팔경시처럼 당대에 영향력을 미칠 수도 없었다.

거처 중심의 개방형 팔경시는 안평대군같은 왕족의 호사취미로 시작되지만 성시산림의 실현은 사대부들의 오랜 꿈으로 16세기에는 치사후 또는 현직에서도 산림 속에 거처를 마련하거나 성시속의 거처에서 산림을 조망하는 방법으로 사대부들이 직접 성시산림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는 현량과라는 제도의 마련과 함께 종남첩경을 꿈꾸는 사대부들에 의해 더욱 확대되어 팔경시 창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 팔경의 대상은 북쪽으로 도봉산, 동쪽으로 아차산, 남쪽으로 관악산, 서쪽으로 안산에 이르기까지 폭을 넓혀 서울에 팔경 아닌 곳이 없게 된다. 17세기는 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청풍계 모임이 활성화되는 한편, 종남첩경과 관계없는 위향인들이 시사활동을 통해 성시산림의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18세기는 이런 시사활동이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영조, 정조 등 왕족의 팔경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서울팔경시 연구를 통해 팔경시 창작이 폐쇄형 중심이 아닌 개방형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공간의 확대와 계층의 확대에 따라 명승 아닌 곳이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팔경 없는 곳이 없다는 인식을 지니게 되었음을 밝혔다.

아울러 조선전기 서울팔경이 서거정이 설정한 한강변 중심으로 이루어졌듯 조선후기 서울팔경은 시사활동이 활발히 일어난 궁궐 중심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양상은 본래 자연명승을 대상으로 했던 팔경 선정이 한강변에서 궁궐 중심으로 바뀌는 이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궁궐에서도 성시 산림을 이룰 수 있다는 개방형 팔경시의 전통 확립으로 가능한 일임을 밝혔다.

참고문헌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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