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보고 요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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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구분 한국학 기초연구/단독논문게재형과제
과제코드 2008-19
연구과제명
  • 국문 : 고려시대 기로회 연구
  • 영문 : A Study on Kirohoe in Koryeo
연구책임자 김건곤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2008-04-22 ~ 2008-11-30 연구형태 개인연구
연구목적 및 배경

 

1) 우리의 선인들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耆老會 혹은 耆英會를 조직하여 飮酒賦詩했다. 고려시대에는 崔謹의 해동기로회, 庾資諒의 기로회, 琴儀의 기로회, 李瑱의 해동후기로회, 蔡洪哲의 기영회, 元巖七老會 등이 있었다.

2) 본 연구에서는 우선 중국 唐나라 白樂天의 香由九老會, 宋나라 文彦博의 洛陽耆英會의 조직과 운영을 일별하고, 위에서 언급한 고려시대의 기로회를 통시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3) 고려시대 기로회의 회칙과 운영, 기로회에 참석하여 지은 시문을 분석하는 한편, 고려 한문학에 미친 영향도 구명할 것이다.

 
연구방법 및 내용

 

1) 연구방법

  ○ 문헌 연구에 의함

  ○ 한중 비교문학적 방법으로 접근함

2) 연구내용

  ○ 당대 백락천의 향산구로회의 구성과 운영 등에 대해 고찰함

  ○ 송대 문언박의 낙양기영회, 司馬光의 眞率會를 고찰하고 특히 후대의 각종 기로희에 영향을 미친 그 회칙에 주목함

  ○ 고려시대 최당의 해동기로회를 고찰함

    - 회원, 회칙 및 운영

    - 시문 분석

  ○ 고려시대 제가의 기로회로 유자량 금의, 이진, 채홍철 등이 개최한 각종 기로회(기영회)와 원함칠로회 등을 통시적으로 일별함

  ○ 기로회가 고려 한문학 발전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1) 최초의 기로회는 當 白樂天의 香由九老會이다. 그는 致仕한 후 관직에서 은퇴한 70세 이상의 기로들과 모임을 갖고 한적생활을 즐겼는데, 벼슬보다 나이를 우선으로 하였다. 그래서 尙齒會라고도 한다. 모임에서는 70세 미만의 현직에 있는 狄兼謀와 盧貞도 참여시켰던 바, 이는 후대의 기로회에 연소자가 참여하는 선례가 되었으며, 또 耆老會를 그려 세상에 전함으로써 기로도의 전통도 만들어졌다.

 

2) 宋代에는 至道~元豐年間에 기로회가 가장 성하였는데, 文彦博의 洛陽耆英會와 司馬光의 眞率會가 대표적이다. 문언박은 백락천의 향산구로회를 사모하여 70세 이상의 老退者 現職者 13인과 耆英會를 열었으며, 그 말석에 64세의 사마광을 참석시켜 서문을 쓰게 하였다. 사마광의 참여는 적겸모와 노정의 전례에 따른 것이다. 또 13인의 상을 그려 기로도를 제작하고, 특히 모임을 보다 조직적이고 규모 있게 운영하기 위해 會約을 만들었다. 이 회약은 후대에 열린 각종 기로회에 거의 준용되다시피 하였다.

 

3) 낙양기영회의 말석에 참석하였던 司馬光도 기로 7인과 함께 眞率會를 열었는데, 여기에 문언박은 끼지 못하였다. 진솔회에서는 음식을 검소하게 준비하게 모임을 소략하게 운영한다는 취지에서 3개조의 회약을 만들었다. 사마광이 낙양기영회와 진솔회에 모두 참여한 것 때문에 두 모임을 혼용하는 예가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4) 한편 고려시대에는 백락천의 향산구로회와 문언박의 낙양기영회를 추숭하여, 무신집권기에 崔讜에 의해 海東耆老會가 처음으로 열렸다. 前賢職 高官者 9인이 최당의 집 雙明齋에서 기로회를 열고, 해동기로도를 제작하고, 문언박의 낙양기영회 회칙에 따라 모임을 운영하였다. 李仁老가 적겸모, 노정, 사마광의 예에 따라 그 말석에 참석하였으며, 기로회에서 지어진 서문들을 모아 『雙明齋集』을 편찬하고 그 서문을 썼다.

 

5) 이후 庾資諒, 琴儀, 李瑱, 蔡洪哲 등이 기로회를 열었는데, 유자량의 기로회와 채홍철의 기영회는 부처를 섬기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채홍철의 경우 집에 승려를 들여놓기까지 해서 후인들로부터 기로회의 성격이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여다. 또 그가 지은 <紫霞洞>은 기로돌을 中和堂에 초치하여 즐기는 모습을 읊은 것으로, 매우 향락적이고 심지어 퇴영적이기까지 하다. 李瑱의 海東後耆老會의 서문은 당시 34세의 崔瀣가 썼던 바, 이 또한 사마광과 李仁老의 예에 따른 것이다.

 

6) 元巖七老會는 홍건적의 난 때 恭愍王을 扈從한 國老 7인이 元巖驛에서 燕集唱和한 일을 말하는데, 그 시문을 엮어 책으로 낼 때 李穡이 서문을 썼다. 이후 元巖盛會에 참여했던 廉悌臣과 尹桓이 중심이 되어 國老와 現職의 高官들이 자주 기로회를 열었으며, 이색이 연소자로서 그 말석에 참석하였다. 여기에서는 기로회의 風流 외에 國事를 생각하는 원로로서의 역할에 대한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다.

 

7) 한문학 발전과 관련하여 기로회에 新進文士들을 참여시켜 文才를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은 주목되는 점이다. 이인로가 최당의 해동기로회 말석에 참여하여 시문 100여수를 짓고 기로회에서 오고 간 글들을 모아서 雙明齋集을 편찬하였고, 崔瀣는 해동후기로회에 참여하여 그 서문을 지었으며, 李穡 또한 기로회의 말석에 자주 참석하였다. 곧 이들은 기로회를 통하여 원로 문사들의 인정을 받고 일시에 文名이 높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로회는 참여자들의 문학활동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생활화됨으로써 당대의 문학을 더욱 살찌우는 한편, 後進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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