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결과 개요 보고서

연구결과 개요 보고서: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연구결과물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기초연구 / 단독논문게재형과제
과제코드 (AKSR2024-R02)
연구과제명
  • 국문 : (AKSR2024-R02) 조선 후기 서산계 승려 문중의 진영 조성과 봉안 연구 西山·四溟眞影과 壬亂三和尙眞影을 중심으로
  • 영문 :
연구책임자 이용윤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20240417 ~ 20241216 연구형태 단독연구
연구목적 및 배경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 승려의 초상화인 진영은 사자상승의 상징물이자 신앙의 대상이다. 우리나라에 진영은 통일신라 말 선종의 유입과 함께 본격적으로 제작되었고, 구산선문의 개산조와 선사를 비롯해 국사, 왕사 등 저명한 승려들을 기리기 위해 왕실이나 제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오랜 진영의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찰에 현전하는 진영 대다수는 18세기~19세기에 활동한 승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사찰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전기에 활동한 의상, 원효, 자장, 도선, 보조, 나옹과 같은 저명한 고승을 창건주·중창주로 삼아 진영을 제작해 모셨으나 조선 후기에 활동한 승려 진영과 연결할 만한 역사성이나 사자상승의 정통성은 찾아볼 수 없다. 창건주·중창주를 그린 진영과 조선 후기에 활동한 승려를 대상으로 한 진영 사이에 나타나는 역사적 공백과 불연속성을 연결하고 조선 후기 진영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주목되는 진영이 서산(西山)으로 유명한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사명(四溟)으로 알려진 송운유정(松雲惟政, 1544~1610)의 진영이다.
본 연구에서는 사찰에 봉안된 서산진영과 사명진영을 중심으로 그 시작과 변화를 고찰하고자 한다. 서산과 사명의 입적 후 단독으로 제작된 진영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동시에 제작되어 봉안되다가 서산·사명·기허로 구성되는 삼대사(三大師)진영으로 변모해 갔는지 그 변화 과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서산과 사명의 입적 전후로 제작된 진영에 관한 기록을 소개하고, 처음 조성된 진영과 후대 진영의 전승과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을 중심으로 <동화사 사명진영>, <해인사 홍제암 삼대사진영>, <보경사 사명진영>를 비교 검토하고자 한다. 이어서 18세기 서산진영과 사명진영의 체재와 상징성에 영향을 미친 삼대사진영의 형성 과정을 표충사 건립 과정과 연결해 살펴보고, <표충사 삼대사진영> 제작설을 검토하면서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과 구별되는 표충사 사명진영만의 고유한 표현은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한다.
연구방법 및 내용 본 연구에서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서산진영과 사명진영을 역사적 맥락에서 원형을 추정해 보고 진영의 형식 전승, 변화, 확산을 승려 문중의 인식, 문중 간의 성쇠에 따른 경쟁과 공존이란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본 연구에서는 서산휴정과 사명유정의 처음 제작되는 시점부터 시기별로 제작된 진영에 반영된 시각적 특징과 다른 진영과의 조합,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반영된 문중 의식과 시대적 경향을 분석하였고 그 변화의 요소로 표충사 사액과 삼대사진영 등장에 주목해 보았다.
서산휴정과 사명유정이 입적하던 시기에 진영은 묘향산 보현사 내원암과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 모셔졌다. 두 진영 중 원형과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진영은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진영이다. 이 진영은 1671년 사건으로 진본은 사라졌지만, 기억을 통한 모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 중에 화승의 화풍이 반영되었지만, 의좌상에 가부좌한 자세, 양손으로 불자를 든 고유한 표현은 사명문중의 세거사찰에 봉안된 <동화사 사명진영>(17세기 말), 삼대사진영 체재로 제작된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18세기), <보경사 사명진영>(18세기 후반)을 통해 전승되었다. 보경사는 <사명진영>을 스승인 <서산진영>과 보경사 창건주 <원진국사진영>과 함께 제작해 역사와 사명문중의 법통을 세우는 동시에 사명유정을 <보경사 삼장보살도>에 호법신으로 표현해 신격화하였다. 표충사는 초기에 사우를 짓고 사명진영을 모시고 춘추 제향하는 방식에서 시작하여 1738년에 태허남붕이 추진한 표충사 불사로 서산진영과 기허진영이 합향되면서 삼대사진영이 완성되었다. <표충사사명진영>에는 1773년에 장황을 개조한 기록이 적혀 있으며, 화풍과 표현기법으로 보아<사명진영>은 177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삼대사진영>은 사승 관계와 상관없이 <사명진영>을 중앙에 두고 <서산진영>은 측면에 두어 제자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사명진영>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한 손은 불자를 쥐고 다른 손은 손잡이에 걸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는 <서산진영>과 <기허진영>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표충사 사명진영>에서 나타나는 이 고유한 표현은 편양파 출신인 월암지한이 봉안한 <봉정사 사명진영>(1768)에서 확인되며, 이후 <용추사 사명진영>(1781), <통도사 사명진영>(19세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서산진영과 사명진영, 삼대사진영은 불교계와 사회의 변화에 반응하며 변화하였다. 그 변화의 방식은 때로는 문중의 정체성과 실리적 목적에 따른 전승이었으며 그 속에서는 진영을 조성 봉안한 주체들만이 공유했던 고유한 표현이 존재하였다.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Ⅰ. 머리말
Ⅱ. 서산·사명의 입적과 진영의 조성과 봉안
Ⅲ.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의 전승과 변화
1.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의 전승과 변화
2.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의 계승과 정체성의 표현
Ⅳ. 표충사 삼대사진영의 정립과 확산
Ⅴ. 맺음말
연구결과 서산진영과 사명진영에 관한 연구는 교단의 스승이자 의승장이란 행적을 진영에 표현된 얼굴과 연결해 인상을 분석하고, 앉은 자세인 의좌상, 평좌상에 따라 형식을 나누고 자세가 내포하는 상징성을 해석하였다. 또한 현전하는 상태에 따라 단독 진영, 동시 조성 진영, 두 진영과 기허영규 진영이 결합한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서산진영, 사명진영, 기허진영이 결합한 유형인 삼대사진영은 호국의 관점에서 임진왜란 당시 활동한 의승장의 행적을 강조하였고 단독, 동시 조성 진영까지도 같은 맥락에서 조성 배경과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진영 형식과 유형, 제작자와 화풍 중심이었던 기존의 연구 방법론에 역사적 사실과 각종 기록 자료 등을 접목하여 조선 후기 진영 연구에 있어 새로운 형식 분류 방식을 제시하고 진영의 상징적 의미를 문중의 정체성과 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해석하였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형식 분석 중심인 한국 고승 진영 연구에 있어 해석의 확장성과 다양성을 부여할 것이며 조선 후기 사찰별, 문중별로 형성했던 불교문화의 독자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미술사만이 아니라 불교사 연구에도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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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연구결과물 학술지 게재 논문(AKSR2024-R02).pdf

연구요약문

연구요약문: 전체 연구결과 요약, 세부과제별 요약로 구성
전체 연구결과 요약
이 글에서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서산진영과 사명진영을 역사적 맥락에서 원형을 추정해 보고 진영의 형식 전승, 변화, 확산을 승려 문중의 인식, 문중 간의 성쇠에 따른 경쟁과 공존이란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그리고 변화의 요소로 표충사 사액과 삼대사진영 등장에 주목하였다. 서산휴정과 사명유정이 입적하던 시기에 진영은 묘향산 보현사 내원암과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 모셔졌다. 두 진영 중 원형과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진영은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진영이다. 이 진영은 1671년 사건으로 진본은 사라졌지만, 기억을 통한 모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 중에 화승의 화풍이 반영되었지만, 의좌상에 가부좌한 자세, 양손으로 불자를 든 고유한 표현은 사명문중의 세거 사찰에 봉안된 <동화사 사명진영>(17세기 말), 삼대사진영 체재로 제작된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18세기), <보경사 사명진 영>(18세기 후반)을 통해 전승되었다. 보경사는 <사명진영>을 스승인 <서산진영>과 보경사 창건주 <원진국사진영>과 함께 제작해 역사와 사명문중의 법통을 세우는 동시에 사명유정을 <보경사 삼장보살도>에 호법신으로 표현해 신격화하였다. 표충사는 초기에 사우를 짓고 사명진영을 모시고 춘추 제향하는 방식에서 시작하여 1738년에 태허남붕이 추진한 표충사 불사로 서산진영과 기허진영이 합향되면서 삼대사진영이 완성되었다. <표충사사명진영>에는 1773년에 장황을 개조한 기록이 적혀 있으며, 화풍과 표현기법으로 보아 <사명진영>은 177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삼대사진영>은 사승 관계와 상관없이 <사명진영>을 중앙에 두고 <서산진영>은 측면에 두어 제자를 바라보는 방식 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사명진영>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한 손은 불자를
쥐고 다른 손은 손잡이에 걸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는 <서산진영>과 <기허진영>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표충사 사명진영>에서 나타나는 이 고유한 표현은 편양파 출신인 월암지한이 봉안한 <봉정사 사명진영>(1768)에서 확인되며, 이후 <용추사 사명진영>(1781), <통도사 사명진영>(19세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서산진영과 사명진영, 삼대사진영은 불교계와 사회의 변화에 반응하며 변화하였다. 그 변화의 방식은 때로는 문중의 정체성과 실리적 목적에 따른 전승이었으며 그 속에서는 진영을 조성 봉안한 주체들만이 공유했던 고유한 표현이 존재하였다.
세부과제별 요약
Ⅱ. 서산·사명의 입적과 진영의 조성과 봉안
서산휴정과 사명유정 입적 전후의 정황과 진영 조성 및 봉안처를 밝히고, 사명유정의 입적처이자 진영 봉안처인 해인사 홍제암을 중심으로 입적 후 봉안된 진영에 일어난 변화와 세거 문중의 변화를 고찰하였다. .

Ⅲ.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의 전승과 변화
1.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의 전승과 변화
현전하는 사명진영 중 <동화사 사명진영>을 통해 사명유정이 입적 후 제작된 진본 진영의 특정 형상과 고유한 표현을 분석하고 이러한 고유한 표현이 18세기 표충사 사액과 삼대사진영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해인사 홍제암 삼대사진영> 중 <사명진영>에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를 밝히고 전승의 주체가 사명문중임을 제시하였다.
2.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의 계승과 정체성의 표현
불교계에 사명문중의 세력이 약회되는 과정 중 보경사에 세거한 사명문중이 진영과 불화를 통해 불가 고유의 진영 봉안방식을 유지하고 표현하였는지를 규명하였으며,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보경사 진영으로 <원진국사진영>, <서산진영>, <사명진영>을 사례로 설명하고 불화로는 <보경사 삼장보살도>에 표현된 사명유정을 주목하였다.
Ⅳ. 표충사 삼대사진영의 정립과 확산
조선후기 서산진영과 사명진영 조형성에 영향을 미친 <표충사 삼대사진영>의 형성 과정과 변화를 고찰하였다. 사명진영만 봉안했던 유교식 사우인 표충사가 태허남붕의 사명 현창불사의 일환으로 삼대사진영을 변형되고 사액 사우인 표충사로 발전하면서 <표충사 삼대사진영>의 고유한 표현의 전승과 영향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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