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기초연구 / 공동연구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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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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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오강원 | ||
공동연구자 | 김일규, 이양수, 김도헌, 허준양 | ||
연구기간 | 20230101 ~ 20231216 | 연구형태 | 공동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이 공동연구는 진․변한지역 목관묘기의 대표 유구이자 중요 유물이 다수 출토된 양지리 1호묘의 집중적 분석을 통해, 양지리 1호묘의 유구 성격, 연대, 청동기, 철기, 토기, 외래계유물 등과 관련한 세부적인 분석과 이를 통해 양지리를 넘어서는 주변 지역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 ||
연구방법 및 내용 | 진․변한지역의 목관묘기는 기원전 1세기 4/4분기~기원후 1세기 1/4분기 그 전 시기와는 다른 수준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세부적인 변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다호리 1호묘와 최근 조사된 양지리 1호묘이다. 이 가운데 다호리 1호묘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사되었기에 그간 많은 연구자들이 충분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에 비해 양지리 1호묘는 최근 조사되었기에 아직까지는 전문연구자들의 집중적인 연구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양지리 1호묘 또한 다호리 1호와 마찬가지로 대형의 통나무관이 조사되었고, 봉토, 충전토, 묘광 벽면, 묘광 바닥, 요갱, 관내에서 주머니호와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 등의 각종 와질토기, 동검, 동모, 성운문경, 명대경, 마형식, 호형대구 등의 각종 청동기, 철모, 주조철부, 판상철부 등의 철기, 검초, 과초, 부채손잡이 등의 칠기, 유리경식 등이 도합 106점 출토되었다. 양지리 1호묘의 통나무관은 앞선 시기의 통나무관과는 달리 관 내부에 격벽을 설치하여 놓은 특이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미 성숙한 철기사회이지만 검모를 중심으로 한 주요 청동기의 위세성이 정점에 이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아울러 한경이 3매나 부장되어 있고, 다량의 철부가 공헌품과 부장유물로 부장되어 있다. 더욱이 양지리 1호묘는 전기 목관묘기의 중심지인 대구와 경산 일원의 최고 수장층 무덤이 생생하게 조사된 사례에 속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 공동연구에서는 유구, 청동기, 한경과 한식문물, 철기를 특화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되, 양지리 1호묘를 통해 분석되는 진․변한-내외 무덤문화의 공유와 변용, 기술혁신과 확산, 생산과 유통 등의 문제를 부각시켜 살펴보고자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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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양지리 1호묘 유구와 유물의 연대와 성격(오강원) I. 머리말 II. 유구와 유물 분석 III. 편년과 성격 IV. 맺음말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의 철부 생산과 유통(김도헌) I. 머리말 II. 양지리 1호 묘 철부 검토 III. 진변한의 철부 자료 검토 IV. 진변한의 철부 생산과 유통 V. 맺음말 양지리 1호묘 전한경을 통해 본 진.변한과 동아시아(이양수) I. 머리말 II. 양지리 1호묘 출토 전한경의 검토 III. 동아시아의 지배자와 동경 출토사례 IV. 동아시아 분묘에서 동경 부장과 의미 V. 맺음말 양지리 1호묘 청동무기의 제작과 교류 거점(허준양) I. 머리말 II. 양지리 1호묘 청동무기의 제작법 III. 청동무기 제작법의 변천 IV. 양지리 1호묘 청동무기로 본 교류 거점 V. 맺음말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 무덤 출토 한식 문물의 성격(김일규) I. 머리말 II. 진·변한 무덤 출토 한식 문물 III. 한식 문물의 전개와 의의 IV. 맺음말 *목차는 장제목까지만 예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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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 오강원의 「양지리 1호묘 유구와 유물의 연대와 성격」에서는 양지리 II-5구역 1호묘의 통나무관의 관내 분할 구조가 낙랑 정백동유형의 장방형 단곽 목곽묘의 부장칸을 상징적으로 모방한 것이라는 점, 양지리 1호묘의 판상철부 부장유형이 해당연구자 분류의 대구-경산 일대 목관묘기 판상철부 부장유형 도합 5개 유형 가운데 네 번째 유형에 속한다는 점, 양지리 1호묘의 다호리-양지리식 성운문경의 중국에서의 제작 중심지와 시기가 산동 임치지역과 기원전 1세기 중엽과 그 이후라는 점, 대구-경북지역 주머니호의 속성 배열상 사라리 130호묘의 두 번째 단계 전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여 양지리 1호묘의 연대를 기원후 1세기 3/4분기로 편년하였다. 또한 양지리 1호묘가 철부를 묘광과 관내 바닥 및 모서리에 다수 부장하여 놓는다든지, 청동기 등의 장식성이 다호리 1호묘기보다 더욱 극대화되어 있다든지 하는 점에서, 전통문화 기반의 수장권, 경제능력, 군사능력 등이 충분히 현시되어 있는 수장묘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성운문경에서 소명경에 이르는 누층적인 시간성을 보이고 있는 한경의 집적(또는 복수 부장)은 외부의 강력한 정치체(서한, 낙랑군)에게까지 인정받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수단이었고, 이 과정에 통나무관에 분할 구획이 상징적으로 남게 된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무덤 영역을 1인의 수장이 독점하였다는 점에서 이전은 물론 같은 시기 집단묘를 이루고 있던 수장층과도 뚜렷하게 대비된다고 보았다. 김도헌의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의 철부 생산과 유통」에서는 해당연구자 분류의 철부 II기에 진.변한지역에서 단조철기가 직접 생산되기 시작하나 이 시기까지는 대규모 제작되었다기 보다 외부에서 철소재를 들여와 소규모 제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점은 이 시기 단조철기의 부장이 제한적인 것을 통해서 입증된다고 보았다. 본격적인 생산은 철부 III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이 시점에 진․변한지역에 철이 대량 생산되어 각지에 공급된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이러한 양상은 주조철기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데, 주조와 단조철기 모두에서 기종과 수량이 소규모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기 철기 생산의 단계성을 잘 보여주는 물질 양상이라 해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양지리 1호묘를 조망하면, 양지리 1호묘는 해당연구자 획기의 철부 III기, 즉 기원전 1세기 후반~2세기 전반에 속하는 유구이다. 이 시기 진․변한지역 내의 여러 읍락이 철 소재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단조철기를 제작하는 시기라고 보았다. 다만 철 생산과 주조철기의 제작은 철광산을 장악한 읍락과 대읍락에 연결되어 있는 일부 소수의 읍락에서만 생산했던 것으로 보았다. 다만 철부 II기부터 철부 III기까지 진․변한 전체 기준 상위의 중심무덤이 지속되는 곳이 없는 것을 통해 철 생산부터 모든 철기를 자체 생산한 읍락은 없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환경은 결국 교역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고, 양지리 1호묘 또한 그러한 분위기 속에 위치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양수의 「양지리 1호묘 전한경을 통해 본 진․변한과 동아시아」에서는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지역의 전한경을 부장 양상에 주목하여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물론 멀리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의 부장 양상과 비교하여 그 지역적 특징을 밝히고자 하였다. 각 지역의 한경 부장 대표 유적과 비교한 결과 진한은 전한경을 지배자의 상징이자 제의용품으로 사용한 것이 다른 지역과 대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이와 같은 부장 양상이 잘 드러나 있는 진한의 대표적 수장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양지리 1호묘라고 보았다. 부장 방식은 동경을 파쇄하여 부장한 영천 용전리를 예외로 하면, 모두 완형을 부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고 한다. 한편 진.변한지역에서는 양지리 1호묘기 전한경 외에 해당연구자 정의의 삼한경이 사용되는데, 영천 어은동, 대구 평리동, 포항 성곡리 등에서 개시된 것으로 보았다. 삼한경은 첫째 와문 중심의 독창적인 문양, 둘째 전한경을 모방한 문양-문자와 서수, 셋째 직경 6cm 이하의 소형, 넷째 경의의 사용 가능성, 다섯째 중국의 동경 제도 기술 이해, 여섯째 동경의 다수 부장, 일곱째 전한경과 삼한경의 동반 등이 특징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볼 때, 진한의 동경문화는 중국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면서 주변 제민족, 즉 흉노, 월지, 왜 등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이는데, 주변 제 민족 사이에서도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허준양의 「양지리 1호묘 청동무기의 제작과 교류 거점」에서는 양지리 1호묘 부장 동검, 동모의 제작기법 분석과 비교를 통해 제작 및 교류 거점과 네트워크에 대해 시론적으로 분석하였다. 먼저 동검의 경우, 경부 평면의 중앙부 일부만 마연되어 있지 않고 오목하게 만입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일반적인 동검과는 달리 탕구의 직경이 원래 매우 작은 직경의 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이와 유사한 현상이 확인되는 강진 현산리 1호묘 무혈구동과 또한 이와 같은 탕구 구조를 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비 일상적 방식의 용탕법의 원류는 중국의 철겸 거푸집 가운데 유사하게 보이는 탕구와 탕도가 일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철겸 주조기법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다. 또한 양지리 1호묘 동모의 신하부에 모신부 양측은 물론 등대에까지 미세하게 횡선마연대가 있는 것이 관찰된다는 것을 근거로 일본 후쿠오카 일대에서 확인된 복수 분절된 광형동모 거푸집 사례를 들어 그와 같은 분절된 거푸집(해당 연구자 명칭 : 연결식주형)으로 주조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였다. 이러한 추측을 근거로 같은 제작기법이 대구와 경주를 잇는 구간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으로 보았다. 대구-경주선에서 출현한 특정 제작기법은 마산 가포동을 중간 거점으로 하여 일본으로 이어졌고, 또 같은 노선을 따라 일본의 기법 또한 전달된 것으로 보았다. 제작기법과 제작흔 등에서 입증되지 않는 점들이 많은 것이 문제이나, 청동기의 관찰을 통해 새로운 인문적 해석을 제기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김일규의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 무덤 출토 한식 문물의 성격」에서는 기존의 여러 연구자들이 제기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호리 1호묘와 양지리 1호묘에 다수의 한식 문물이 부장되어 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초기 철기시대 전후 남한지역의 통나무관을 최근 오강원이 제기한 서남한 유래의 자체 기원의 것들과 특정 시점 중국에서 요갱과 함께 들어온 통나무관으로 이분류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의하면 진․변한지역의 경우 대구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서남한 기원의 통나무관이 조성되었으되, 낙동강 하구역, 특히 창원과 김해 등지에는 사천분지 기원의 통나무관이 장강유역을 통해 따로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 아울러 양지리 1호묘에서 편년과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한경과 칠초동과의 오수전이 있다고 하면서, 양지리에 부장되어 있는 성운문경, 소명경, 군망망경이 서한 후기는 물론 동한 초기까지 부장된 사례가 적지 않게 확인되므로 반드시 이러한 동경이 출현하였다고 해서 중국에서의 출현 시점을 기준으로 편년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은 칠초동과의 오수전을 통해서도 입증된다고 보았는데, 칠초동과의 칠초 겉면에 장식되어 있는 오수전 가운데 무제전, 소제전, 선제전의 서한시대 오수전 외에 동한 광무제 건무 16년에 주행한 오수전이 관찰된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유물들의 편년을 고려할 때, 양지리 1호묘의 연대는 기원후 1세기대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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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생략 | ||
연구결과물 |
연구결과 개요보고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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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연구결과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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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동연구는 진․변한지역 목관묘기의 대표 유구이자 중요 유물이 다수 출토된 양지리 1호묘의 집중적 분석을 통해, 양지리 1호묘의 유구 성격, 연대, 청동기, 철기, 토기, 외래계유물 등과 관련한 세부적인 분석과 이를 통해 양지리를 넘어서는 주변 지역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위 목적을 유효하게 실현시키기 위해 이번 공동연구팀에서는 공동연구과제의 대주제를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의 물질문화’로 기획한 뒤, 공동연구자별 세부 연구주제를 「양지리 1호묘 유구와 유물의 연대와 성격」,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의 철부 생산과 유통」, 「양지리 1호묘 전한경을 통해 본 진․변한과 동아시아」, 「양지리 1호묘 청동무기의 제작과 교류 거점」,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 무덤 출토 한식 문물의 성격」 5개로 나누어 연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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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과제별 요약 | |
「양지리 1호묘 유구와 유물의 연대와 성격」(오강원) 양지리 II-5구역 1호묘의 통나무관의 관내 분할 구조가 낙랑 정백동유형의 장방형 단곽 목곽묘의 부장칸을 상징적으로 모방한 것이라는 점, 양지리 1호묘의 판상철부 부장유형이 해당연구자 분류의 대구-경산 일대 목관묘기 판상철부 부장유형 도합 5개 유형 가운데 네 번째 유형에 속한다는 점, 양지리 1호묘의 다호리-양지리식 성운문경의 중국에서의 제작 중심지와 시기가 산동 임치지역과 기원전 1세기 중엽과 그 이후라는 점, 대구-경북지역 주머니호의 속성 배열상 사라리 130호묘의 두 번째 단계 전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여 양지리 1호묘의 연대를 기원후 1세기 3/4분기로 편년하였다. 무덤 성격은 전통 물질문화에 기반하면서 낙랑 등과의 교류선을 강조하는 교역 주재 수장무덤으로 보았다.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의 철부 생산과 유통」(김도헌) 양지리 1호묘를 철부 조합을 통해 해당연구자 획기의 철부 III기, 즉 기원전 1세기 후반~2세기 전반에 속하는 유구로 보았다. 이 시기 진․변한지역 내의 여러 읍락이 철 소재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단조철기를 제작하는 시기라고 보았다. 다만 철 생산과 주조철기의 제작은 철광산을 장악한 읍락과 대읍락에 연결되어 있는 일부 소수의 읍락에서만 생산했던 것으로 보았다. 다만 철부 II기부터 철부 III기까지 진․변한 전체 기준 상위의 중심무덤이 지속되는 곳이 없는 것을 통해 철 생산부터 모든 철기를 자체 생산한 읍락은 없었던 것으로 보았다. 「양지리 1호묘 전한경을 통해 본 진․변한과 동아시아」(이양수) 에서는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지역의 전한경을 부장 양상에 주목하여 동아시아는 물론 멀리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의 부장 양상과 비교하여 그 지역적 특징을 밝히고자 하였다. 각 지역의 한경 부장 대표 유적과 비교한 결과 진한은 전한경을 지배자의 상징이자 제의용품으로 사용한 것이 다른 지역과 대비되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이와 같은 부장 양상이 잘 드러나 있는 진한의 대표적 수장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양지리 1호묘라고 보았다. 부장 방식은 동경을 파쇄하여 부장한 영천 용전리를 예외로 하면, 모두 완형을 부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경 부장 양상을 통해 진한의 동경문화는 중국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면서 주변 제민족, 즉 흉노, 월지, 왜 등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동경 부장 양상은 주변 제 민족 사이에서도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양지리 1호묘 청동무기의 제작과 교류 거점」(허준양) 양지리 1호묘 부장 동검, 동모의 제작기법 분석과 비교를 통해 제작 및 교류 거점과 네트워크에 대해 시론적으로 분석하였다. 동검의 경우, 경부 평면의 중앙부 일부만 마연되어 있지 않고 오목하게 만입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일반적인 동검과는 달리 탕구의 직경이 원래 매우 작은 직경의 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이러한 용탕법의 원류가 중국의 철겸 주조기법인 것으로 보았다. 동모는 일본 후쿠오카 일대에서 확인된 복수 분절된 광형동모 거푸집 사례를 들어 그와 같은 분절된 거푸집으로 추정하였고, 이러한 추론을 기초로 이와 같은 제작기법이 대구와 경주를 잇는 구간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으로 보았다. 「양지리 1호묘와 진․변한 무덤 출토 한식 문물의 성격」(김일규) 다호리 1호묘와 양지리 1호묘에 다수의 한식 문물이 부장되어 있다는 점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초기 철기시대 전후 남한지역의 통나무관을 최근 오강원이 제기한 서남한 유래의 자체 기원의 것들과 특정 시점 중국에서 요갱과 함께 들어온 통나무관으로 이분류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는 점과 칠초동과의 오수전에 무제전, 소제전, 선제전의 서한시대 것 외에 동한 광무제 건무 16년 주행한 오수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제기한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