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결과 개요 보고서

연구결과 개요 보고서: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기초연구 / 단독논문게재형과제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 국문 : (AKSR2022-R01) 근대이행기 퇴계학맥의「심통성정도」인식
  • 영문 : The Perception of Simtongseongjeongdo (Diagram of ‘The Mind Combines and Governs the Nature and Feelings’) in the School of Toegye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to Modern Times
연구책임자 권오영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20220408 ~ 20221216 연구형태 단독연구
연구목적 및 배경 19세기 조선 사회는 동서의 유교와 서교 문명의 교섭과 충돌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 후기 내내 이학(理學)을 최고의 학문으로 생각해오던 영남에서도 종교적·사상적으로 이 시기에 새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당시 영남 학계에는 이상정의 학통을 이은 유치명을 중심으로 퇴계학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퇴계학맥 내에서 사상적 분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안동을 중심으로 퇴계학설을 고수하려는 학맥과 이진상-곽종석을 중심으로 퇴계학설을 새롭게 해석하는 흐름이 있었다.
이황은 주자학을 연구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이란 조선 이학의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맥의 정통을 자처하는 측에서는 자신들이 속한 학통을 이황-김성일·유성룡-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으로 정립하였다. ‘심통성정(心統性情)’이란 학설은 장재(張載)의 주장이다. 정복심(程復心)은 이 장재의 설을 받아들여 「심통성정도」를 처음 그렸다. 이황은 성학십도에서 「심통성정도」를 그리면서 정복심(程復心)이 그린 「심통성정도」를 상도(上圖)라 하여 제시하였다. 그리고 성은 심의 체가 되고 정은 심의 용이 되는데 이황은 이 설을 부연하여 「심통성정도」중도(中圖)와 하도(下圖)를 제시하였다.
조선 후기 영남학계는 대체로 이황의 학문을 철저히 신봉하는 퇴계학맥(退溪學脈)이 면면히 이어졌다. 19세기까지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고 이황학설을 굳게 고수하려고 했던 유림은 안동의 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 학통이다. 이러한 이학의 전통에 대해 성주의 이진상(李震相)은 심(心)을 이(理)와 기(氣)의 합(合)으로 보는 이황의 심설는 달리 심즉리(心卽理)설을 주장하였다.
1860년대에 영남학계에는 이진상에 의해 주희와 이황의 이학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영남 학계의 새로운 상황 변화에 대응하여 이황 이학의 수호와 실천의 경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 연구에서는 이황의 심통성정도에 대해 견해룰 표명한 학자들의 문집자료를 중심으로 분석을 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및 내용 근대이행기에 퇴계의 학맥에서 이황의 심통성정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진상·허유·곽종석 등은 심즉리설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이황의 「심통성정도」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이기호발(理氣互發)로 이해한 후 오랜기간 동안 영남에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이 지배하였다. 특히 이이(李珥)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계에서 이발(理發)을 부정하고 기발(氣發)만을 주장하게 되자 영남지역에서는 시대가 흐를수록 이기(理氣)가 호발(互發)한다는 데서 한단계 나아가 이기는 각발(各發)한다는 견해까지 제출되었다.
이진상은 주희(朱熹)는 사단이발(四端理發), 칠정기발(七情氣發)의 설이 있었고, 황간(黃榦)은 기동이수(氣動理隨), 이동기협(理動氣挾)의 논이 있었는데, 이황이 결론을 내리어 말하기를 “사단이발이기수지(四端理發而氣隨之), 칠정기발이이승지(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논쟁을 마감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학문적 논변의 결론이 『성학십도』」의 「심통성정도」에 실리면서, 우리 유가(儒家)의 천고(千古)의 미결(未決)의 안(案)이 해결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이(李珥)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발(氣發)이라는 논을 제창하여 마침내 기(氣)를 이(理)로 인식하는 병에 흘러 들어갔으니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
이진상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이발(理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설은 우선 주희가 「악기(樂記)」의 칠정(七情)은 이 이(理)의 발(發)이라는 설과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심통성정도」의 중도에서 ‘본성(本性)이 발(發)한 바이다’라는 설에 근본을 한 것이었다.
이황이 「심통성정도」의 중도에서 바로 칠정(喜怒哀懼愛惡欲)을 썼는데 이상정이 척발(剔發)하여 이(理) 한 쪽을 말했다고 하였다. 그는 칠정에도 이발이 있다는 논이 과연 새로운 설이라서 분개(分開)의 뜻에 해가 있다면 자기의 설을 배척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지만 홑지게 칠정을 설명하는 곳에는 중도를 으뜸으로 삼아 이발이라고 이르고 사단을 상대하여 설명하는 곳에는 하도를 으뜸으로 삼아 기발이라고 이르는 것이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진상은 이황의 사단칠정론이 「심통성정도」 중도와 하도에서 결정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이가 기발을 힘껏 주장한 이후에 영남 학자들은 대체로 혼륜(渾淪)을 소략하게 하고 분개(分開)를 자세하게 주장하여 이와 기를 두 쪽으로 상대하여 설명을 하여 두 근본과 두 갈래의 의심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이진상은 이러한 영남학계에 이상정이 나와서 혼륜설과 분개설을 통해 비로소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설의 논란을 해결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Ⅰ. 머리말
Ⅱ. 「심통성정도」에 대한 이해의 전통
Ⅲ. 근대이행기 「심통성정도」의 이해
Ⅳ. 맺음말
연구결과 근대이행기에 퇴계학맥의 학자들은 왜 이황(李滉)의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지속적으로 강명(講明)했을까.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의 여섯 번째 도인 「심통성정도」는 이황 이학(理學)의 핵심을 담고 있는데, 바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심통성정도」에 대한 탐구와 해석은 이황을 이은 퇴계학맥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후기 이래 퇴계학맥에서는 이황의 학설을 완고하게 수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심통성정도」 중도(中圖)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칠정이발설(七情理發說)을 제출하였다.
18세기에 이상정(李象靖)은 이황 이학을 충실히 계승하여 이황의 학설을 집성한 학자였고 칠정이발설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상정의 문인인 정종로(鄭宗魯)는 칠정이발설을 선명하게 주장하였다. 정종로의 설은 이기호발설을 수호해온 영남학계에 쉽게 수용이 되지 않았으나 19세기에 이진상(李震相) 등이 이어받아 이황의 이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그 사상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사실 이황은 칠정기발은 말했지만 칠정이발을 말한 적은 없다. 따라서 18세기 이후 퇴계학맥의 칠정이발설은 이황의 본래 견해와는 무관하게 독자적 해석이 강한 것이었기에 이황 이학을 수호하는 학자들은 칠정이발설을 이단(異端), 사설(邪說)로 비판하였다.
근대이행기에 퇴계학맥에서는 「심통성정도」에 제시된 이기호발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더하여 「심통성정도」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 작업이 송인호와 송준필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송준필은 일제강점기에 「심통성정도」의 내용에 관한 자료를 종합 정리함으로써 이진상 등이 이황의 「심통성정도」 중도를 확대해석한 경향을 지양하고, 이황 이학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서 제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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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薰, 『舫山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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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요약문

연구요약문: 전체 연구결과 요약, 세부과제별 요약로 구성
전체 연구결과 요약
『성학십도』의 여섯 번째 도인 「심통성정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상도와 이황에 의해 개정된 중도 및 하도로 이루어지고, 여기에 심통성정도설을 덧붙였다. 근대이행기에 유학자들은 왜 심학을 강명하였는가. 그리고 그 내용은 무엇인가. 왜 퇴계학맥내에서도 각각 학설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가. 이에 대한 해명은 현대 한국사회의 심성을 이해하는데도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단칠정왕복논쟁의 결론을 「심통성정도」중도와 하도에 명료하게 제시하였다. 이황은 “사단이발이기수지(四端理發而氣隨之), 칠정기발이이승지(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사칠이기의 논쟁을 마감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퇴계학맥에서는 18세기에 정종로, 19세기에 이진상 등이 「심통성정도」 중도를 새롭게 해석하여 사단과 칠정이 모두 이발(理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조선 후기에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나갔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는 정종로, 이진상 등 대표적인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어 칠정이발설이 제창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 송준필과 송인호에 의해 『심통성정도삼도발휘』와 『심통성정도발휘』가 편찬되어 중국학자들의 학설 뿐만 아니라 이황 이후 퇴계학맥의 여러 학자의 논설이 집성되어 이황의 「심통성정도」에 대한 해석과 정리가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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