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결과 개요 보고서

연구결과 개요 보고서: 과제구분,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자, 연구기간, 연구형태, 연구목적 및 배경, 연구방법 및 내용,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연구결과, 참고문헌, 연구결과물로 구성
과제구분 한국학기초연구 / 공동연구과제
과제코드
연구과제명
  • 국문 : (AKSR2022-C12) 조계산 송광사의 고승진영과 불교문화
  • 영문 :
연구책임자 이용윤
공동연구자 이경미, 이종수, 김종진
연구기간 20220101 ~ 20221216 연구형태 공동연구
연구목적 및 배경 고승진영의 제작·봉안·추모 과정에는 사찰에 세거하는 승려들의 문중인식이 투영되어 있다. 본 연구에서는 고승진영이라는 매개를 통해, 보조지눌 이래로 다수의 국사와 걸출한 승려를 배출하여 승보종찰로 인식되어 온 송광사의 불교문화 고찰을 시도하였다. 불교사와 불교미술사, 불교문학, 불교건축 연구자들이 국사전과 풍암영각이라는 두 공간을 중심으로 전승된 송광사 조사신앙을 살펴봄으로써,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승보종찰 개념의 성립과 변천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연구방법 및 내용 불교사 분야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불교계에서 송광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보고, 16국사와 승보사찰의 개념이 성립한 연유와 그 정립 과정을 고찰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 송광사가 부휴계 종찰로 자리잡는 양상을 알아보고, 16국사진영과 부휴계 고승진영의 조성이 지니는 불교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미술사 분야에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송광사의 고승진영을 포함하여 송광사 진영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았다. 16국사진영 조성과 봉안에서 비롯된 송광사의 조사신앙이 조선 후기 송광사에 주석했던 부휴문중에 의해 어떻게 지속되고 유지되었으며, 이 과정 중에 송광사만의 승보 문화는 어떤 형태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는지 고찰하였다.
문화사 분야에서는 송광사의 진영 중 풍암영각의 20점을 통해 전하는 23수의 영찬에 『다송문고』에 실린 2수를 더한 총 25수의 영찬을 분석하였다. 찬자들의 행적과 영찬의 내용, 작시법, 영찬을 둘러싼 작가들의 교유를 다루고, 부록으로는 송광사 진영 영찬의 목록, 교감 사항, 번역문을 담았다.
건축사 분야에서는 송광사의 진영 봉안 공간인 국사전과 풍암영각의 건축특징과 진영 봉안 방식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국사전은 정면 4칸이라는 건축적 특성을 건축시기와 연계하여 고찰하였고, 내부 구조를 고려 말 중창한 부석사 조사당과 비교하였다. 태고 보우 이하 조사들의 진영을 봉안했던 진영당에서 풍암 세찰 문도들의 진영 봉안 공간으로 바뀐 풍암영각의 경우, 창건과 이전과정, 진영 봉안방식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서론 1

순천 송광사 16국사진영 조성의 역사적 의미 3
Ⅰ. 머리말 3
Ⅱ. 고려·조선시대 송광사의 불교사적 위상 3
1. 고려시대 송광사 3
2. 조선시대 송광사 6
Ⅲ. 송광사 16국사와 승보사찰의 성립 10
1. 16국사설의 성립 배경과 시기 10
2. 승보사찰 송광사의 위상 정립 16
Ⅳ. 조선 후기 송광사 부휴 법맥과 고승진영의 조성 17
1. 태고법통설과 부휴 법맥의 성립 17
2. 16국사진영과 부휴계 고승진영의 조성과 의미 20
Ⅴ. 맺음말 23

송광사 승보(僧寶) 전통의 형성과 고승진영 25
Ⅰ. 머리말 25
Ⅱ. 국사전의 16국사진영과 풍암영각 35조사진영 26
1. 국사전 16국사진영의 형성과 이모 불사 28
2. 풍암영각의 35조사진영 조성과 차용된 이미지 34
Ⅲ. 기록과 현전하는 고승진영을 본 조선 후기 송광사 고승진영 37
1. 기록 속 삼화상진영 39
2. 영자전 33조사진영과 조선 후기 송광사 고승진영 40
3. 송광사 보조암 봉안 추정 작, 일본 기증 〈묵암최눌진영〉 42
Ⅳ. 맺음말 44

송광사 고승 진영 영찬(影讚)의 문화사 46
Ⅰ. 머리말 46
Ⅱ. 송광사 진영 영찬의 분포 양상 47
Ⅲ. 작가별 분류와 특징 50
1. 19세기~20세기 초 고승의 영찬 50
2. 금명보정의 영찬 53
3. 당대 불교지식인의 영찬 - 박한영과 송태회 55
4. 유학자, 관리의 영찬 59
Ⅳ. 보정 作 영찬의 문학적 성격 59
Ⅴ. 맺음말: 송광사 영찬의 문화사적 의의 65
(자료) 송광사 고승 진영 소재 영찬의 교감본 67

송광사 진영 봉안용 건물의 건축특징과 봉안방식 93
Ⅰ. 머리말 93
Ⅱ. 국사전의 건축특징과 봉안방식 94
1. 창건과 중건·수리 관련 기록 검토 94
2. 건축형태의 변화 98
3. 진영 봉안방식 103
Ⅲ. 부석사 조사당과 송광사 국사전의 비교 검토 104
1. 부석사 조사당의 건축형태와 진영 봉안방식 104
2. 조사당과 비교해 본 국사전 건축형태와 진영 봉안방식의 특징 106
Ⅳ. 진영당(풍암영당)의 건축특징과 봉안방식 107
1. 창건과 이전 경위 107
2. 건축형태 109
3. 진영 봉안방식 110
Ⅴ. 국사전·진영당의 건축 의의 – 터가 지닌 의미와 진영 봉안의 특성 110
1. 거듭되는 화재에서 벗어나는 국사전 터 110
2. 국사전·진영당(풍암영당) 진영 봉안 방식의 특성 112
Ⅵ. 맺음말 113

결론 115

참고문헌 116
부록 119
부록 1. 송광사 고승진영 목록
부록 2. 고승진영으로 본 송광사 법맥도
1-1. 16국사 계보도와 진영
1-2. 조선후기 송광사 승려 계보도와 진영[부휴파/청허파]
부록 3. 다례제
1-1. 812주기 불일 보조국사 종재
1-2. 풍암영각 다례제
부록 3. 송광사 조사신앙 관련 기록
1-1. 추원록
1-2. 승문세보
연구결과
송광사의 승보종찰 인식은 추모다례제 등의 의례를 통해 현대에도 면면히 전승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수차례의 현장 답사와 다례제 참관을 통해 송광사의 정체성과 정체성 유지 노력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수시로 모여 학문적 의견을 나누고, 학술행사를 개최하여 다양한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더욱 정제되고 심화된 연구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우선 불교사 분야에서는 순천 송광사 16국사가 고래의 전통이 아닌 만들어진 역사라는 점을 명확히 제시하였다. 16~17세기에 16조사와 16국사가 혼용되며 16국사 신앙이 정립되었고, 17세기 이후 청허계와 부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송광사가 부휴계의 종찰로 자리 잡은 과정을 밝혔다. 또한 보조 유풍과 부휴계의 정통성을 고양하는 과정에서 풍암 세찰의 적전을 둘러싼 부휴계 내부의 갈등에 대해 알아보았고, 결과적으로 부휴계의 문파 인식이 풍암영각을 중심으로 정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미술사 분야에서는 우선 조선후기 송광사의 국사전(선방), 영자전, 보조암, 행해당 등의 공간에 고승진영이 수십여 점씩 봉안되어 있었으며, 18세기 말 부휴문중에 의해 16국사와 부휴문중 위주로 송광사의 고승진영이 재정립된 양상을 밝혔다. <16국사진영>을 수차례 원형의 변화 없이 일괄적으로 옮겨 그린 사실은 승보사찰로서의 전통을 형성하고자 한 부휴문중의 정체성 확보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였다. 그 결과 ‘18주지’에 포함되어 있었던 나옹과 무학의 진영이 지공·나옹·무학의 삼화상진영으로 독립되어 송광사 조사신앙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현상을 지적하였다. 한편, 1911년에 조성된 풍암영각의 <35조사진영>의 조성시기와 다양한 화풍을 언급하고 일부에는 근대적 기법이 시도된 점을 짚었으며, 이를 새로운 전통의 형성으로 해석하였다.
문화사 분야에서는 가장 많은 영찬을 남긴 금명 보정을 중심으로 영찬 제작의 맥락을 파악하였다. 금명 보정이 남긴 영찬에는 부휴계의 문중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며, 금명 외에 영찬을 남긴 인물의 대부분이 금명과 교유한 이들임을 밝혔다. 문중의식을 드러내는 금명의 여타 저작물과 영찬의 제작방식을 비교하고, 영찬이 20세기 초 송광사를 둘러싼 불교문화의 높은 수준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건축사 분야에서는 고려시대 초창 후 16세기 초에 중건된 송광사 국사전의 선반형 불단이 고려시대 후기 건립된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며, 사용된 목재 또한 동시대에 벌채되었음을 밝혔다. 정면 4칸이라는 보기 드문 구조는 1501년 중창 당시의 것으로 확인하였다. 18세기 후반 건립되고 20세기 초반에 풍암 세찰 문파의 영당으로 사용된 풍암영각이 다수의 진영을 판벽을 이용하여 유연하게 봉안한 점에 주목하였고, 국사전과 풍암영각이 보조 지눌과 관련하여 송광사에서 중요시되는 진락대 주변에 위치한 점을 지적하였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송광사의 승보종찰 인식은 보조지눌이라는 입지전적인 고승과 그의 뒤를 이어 국사로 역임한 고려후기~조선초의 승려 계보를 조선후기 부휴계가 현창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다. 시기에 따라 추숭의 양상이 변화하기는 하나, 송광사의 고승진영에는 승보 종찰의 정체성을 구축한 이후 이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자 했던 노력이 투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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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谿谷先生集󰡕
󰡔勸修定慧結社文󰡕
󰡔東文選󰡕
󰡔東師列傳󰡕
󰡔茶松詩稿󰡕
󰡔茶松文稿󰡕
󰡔佛祖錄贊頌󰡕
󰡔備邊司謄錄󰡕
󰡔三峯集󰡕
󰡔石顚文抄󰡕
󰡔世宗實錄󰡕
󰡔瑣尾錄󰡕
󰡔永嘉誌󰡕
󰡔蓮潭大師林下錄󰡕
󰡔應雲空如大師遺忘錄󰡕
󰡔曹溪高僧傳󰡕
󰡔增一阿含經󰡕
󰡔顯宗實錄󰡕

【도록】
󰡔松廣寺 佛畫󰡕, 송광사성보박물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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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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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중요목조건축물 정밀실측보고서󰡕, 문화재청, 2007.
󰡔한국의 사찰문화재-광주광역시·전남 1󰡕, 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06.
󰡔한국의 사찰문화재-한국의 고승 진영 정밀 학술조사-광주광역시, 전라남도 1, 경상남도󰡕, 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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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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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 「조선 후기 승려 진영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1.
정우택, 「朝鮮朝 後期 佛敎影幀의 硏究」,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1982.

【웹사이트】
동아일보, [단독]보물급 ‘묵암당진영’ 日서 돌아왔다. (2017.12.04.)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1204/87565311/1)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s://portal.nrich.go.kr/)
연구결과물 송광사 연구결과물.hwp

연구요약문

연구요약문: 전체 연구결과 요약, 세부과제별 요약로 구성
전체 연구결과 요약
고승진영에는 승가의 모범이 되는 승려를 숭앙하고 추모하는 문화가 투영되어 있다. 현존하는 절대다수의 고승진영은 조선후기에 조성되었는데, 그 근간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 불교계에서 확산된 문중인식이 있다. 본 연구는 문중인식을 주안점으로 조계산 송광사의 고승진영과 불교문화를 살펴보았다. 송광사는 고려시대 불교사의 주요 분기점인 정혜결사(수선사)의 거점이었으며, 그 주체였던 보조지눌(1158~1210)을 비롯하여 조선 전기까지 16인의 국사를 배출하였다 하여 승보종찰로 숭앙된 곳이다. 송광사의 승보종찰 인식의 형성 및 유지과정은 고승진영의 제작과 보존, 관련 의례 등을 통해 현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본 연구진은 송광사 고승진영과 관련해 문중의 성립과 분화, 이러한 관계망 속에 형성된 공존과 경쟁, 교류의 양상을 불교사, 미술사, 문화사, 건축사 등의 각 분야에서 고찰하여 송광사만의 고승 추숭 문화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송광사의 승보종찰 인식은 보조지눌이라는 입지전적인 고승과 그의 뒤를 이어 국사로 역임한 고려후기~조선초의 승려 계보를 조선후기에 송광사에 주석한 부휴계 승려문중의 현창 불사 과정 중에 성립되었음을 밝혔다. 시기에 따라 추숭의 양상이 변화하기는 하나, 송광사의 고승진영에는 승보 종찰의 정체성을 구축한 이후 이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자 했던 노력이 투영되어 있다.
세부과제별 요약
역사학 분야에서는 순천 송광사 16국사가 만들어진 역사이며, 그 배경에는 조사신앙과 결부된 16나한신앙이 있음을 논증하였다. 16~17세기에 16조사와 16국사가 혼용되며 16국사 신앙이 정립되었고, 17세기 이후 청허계와 부휴계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송광사가 부휴계의 종찰로 자리잡은 과정을 밝혔다. 또한 보조 유풍과 부휴계의 정통성을 고양하는 과정에서 풍암세찰의 적전을 둘러싼 부휴계 내부의 갈등에 대해 알아보았고, 결과적으로 부휴계의 문파 인식이 풍암영각을 중심으로 정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미술사 분야에서는 송광사 진영 봉안처가 국사전과 풍암영각 외에 영자전, 보조암이 존재하였음을 밝히고, 국사전을 제외한 보조암 영각, 영자전, 풍암영각의 변화, 영각 변화에 따른 봉안 진영의 변화 과정을 규명하였다. 또한 송광사의 영각과 봉안진영이 조선후기 이후 부휴계 승려문중에 의해 16국사 중심에 송광사에 주석한 부휴계 승려들을 위주로 재정립되었음을 알아보고, <16국사진영>을 수차례 원형의 변화 없이 일괄적으로 이모한 사실은 승보사찰로서의 전통을 형성하고자 한 부휴문중의 정체성 확보에 대한 의지로 해석하였다.
문화사 분야에서는 가장 많은 영찬을 남긴 금명보정을 중심으로 영찬 제작의 맥락을 파악하였다. 금명보정이 남긴 영찬에는 부휴계의 문중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며, 금명 외에 영찬을 남긴 인물의 대부분이 금명과 교유한 이들임을 밝혔다. 문중의식을 드러내는 금명의 여타 저작물과 영찬의 제작방식을 비교하고, 영찬이 20세기 초 송광사를 둘러싼 불교문화의 높은 수준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건축사 분야에서는 고려시대 초창 후 16세기 초에 중건된 송광사 국사전의 선반형 불단이 고려시대 후기 건립된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며, 사용된 목재 또한 동시대에 벌채되었음을 밝혔다. 정면 4칸이라는 보기 드문 구조는 1501년 중창 당시의 것으로 확인하였다. 18세기 후반 건립되고 20세기 초반에 풍암 세찰 문파의 영당으로 사용된 풍암영각이 다수의 진영을 판벽을 이용하여 유연하게 봉안한 점에 주목하였고, 국사전과 풍암영각이 보조 지눌과 관련하여 송광사에서 중요시되는 진락대 주변에 위치한 점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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