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중점연구 / 연구·교육 연계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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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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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이길상 | ||
공동연구자 | |||
연구기간 | 20210302 ~ 20210831 | 연구형태 | 단독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조선에 도착한 서양 선교사들이 전도의 일환으로 세운 학교들은 근대 교육의 보급을 급속히 촉진시켰고, 병원은 많은 조선인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제했다. 대부분 이러한 활동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선교사 외에 다른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조선 개화기에 조선인들을 접했던 서양 선교사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조선 선교에 임했는지에 대해 미시적으로 파고든 연구는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미국 외에 다른 나라 출신의 서양 선교사들의 당시 마음가짐을 살펴보는 일은 한국학 개화기 연구의 객관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러한 탐색이 없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선의 개화는 미국 개신교 선교단체 혹은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베풀어준 시혜적 활동의 결과라고 결론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영국 성공회의 선교잡지 모닝캄(The Morning Calm)을 1차 사료로 삼아 그 내용을 번역하고 분석하여 영국 성공회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고, 이들이 모닝캄에 남긴 기록을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현장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영국 선교사 그룹이 남긴 사료 속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조선에서 활동했는지 깊게 분석하여 선교사들의 개화기 활동을 ‘그들’과 ‘우리’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데에 그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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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방법 및 내용 | 모닝캄은 영국 성공회에 의해 1호(1889년 11월)에서 239호(1929년)까지 발간되었다. 이번 연구는 이 중에서 4호부터 66호(1894년)까지를 연구 범위로 정한다. 먼저 모닝캄의 구성 방식과 특징을 개괄적으로 살피고, 모닝캄 발행호수별 내용을 하나하나 천착한 후 분석한 데이터를 클래스(class)별로 구분한다. 그리고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semantic data curation)을 활용해서 웹사이트 최원재 프로젝트(http://dh.aks.ac.kr/~pattern/wiki/index.php) 에 퍼블리싱한다. 이는 데이터 중심 사회로 가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교육 방법의 하나로 일종의 웹 아카이브(web archive) 제작이다.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은 교육학적 의미가 크지만 후속 연구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한다. 이번에 마련한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의 행적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에서 조선으로 파견된 외국 선교사들의 행적을 한 데 아카이빙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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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영국 성공회 선교잡지 모닝캄(The Morning Calm)에 보이는 한국의 19-20세기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 1. 서론 2. 연구의 목적 및 배경 3. 연구방법 및 내용(범위) 4. 연구결과 4.1. 선교잡지 모닝캄의 역사와 의의 4.2. 모닝캄의 구성 4.3. 영국 성공회의 해외 선교조직 4.4. 영국 선교사가 바라본 한국의 모습 5. 연구결과의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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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 4. 연구결과 4.1. 선교잡지 모닝캄의 역사와 의의 모닝캄은 한국과 관련하여 외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잡지다. 모닝캄은 외국 독자들에게 한국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재정 지원을 이끌어 내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모닝캄은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한국 주재 성공회 주교가 원고를 런던으로 보내면 그곳에서 편집과 인쇄를 마친 다음에 세계 여러 나라에 배포하는 방식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월간이었으나 1896년 2월호(제67호)부터 계간으로 바꾸어 발행되다가 1939년 10월호를 마지막으로 휴간에 들어갔다. 제2차 대전 이후 선교사의 철수 등으로 더 이상 발행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946년 9월에 복간하여 1947년 2월에 2호, 6월에 3호를 발간하여 원래의 계간 주기를 지켜나갔다. 모닝캄은 이후 런던에서 계속 발간하다가 1988년부터 영국 중부 도시 헤리퍼드(Hereford)의 한국선교후원회(Korean Mission Partnership)에서 연간 2회 ‘뉴스 레터’ 형식으로 현재까지 발행되고 있다. 이 잡지는 세계 여러 나라의 성공회에 배포되었으므로 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은둔의 왕국 조선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모닝캄 이후 타교파 여러 서양 선교사들이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The Korean Repository는 1892년에 영국인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 Ohliner) 목사에 의해서 발간되었다. 한국의 선각 지식인들은 한국 근대화를 위하여 서구화 기독교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서양 선교사들의 언론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도 여러 근대잡지들이 한국인에 의해서 발행되었다. 1896년에 대죠션독립협회회보가 발간되었다. 4.2. 모닝캄의 구성 모닝캄은 크게 (1)주교의 상황 (2)선교지 한국의 소식 (3)해외 선교지의 상황 (4)선교자금 모금 및 집행 상황 (5)중보기도와 감사기도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소식은 항상 ‘The Bishop’s letter’라는 주교의 편지로 시작한다. 이 편지에는 주교의 위치, 선교사의 이동 경로, 사역지에서 만난 사람들, 선교지에서 일어난 사건, 당시 정세에 대한 생각과 사역지에 관한 정보 등이 나타나 있어 모닝캄의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소식은 Correspondence라는 한국 소식이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주를 이룬다. 세 번째는 ‘Spirit of Mission’이라는 부분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개한다. 마다가스카르, 캘커타, 말레이시아 등 당시 한국이 접근하지 못했던 선교 대상 지역 등의 선교 상황이 그려진다. 대주교의 아시리아 기독교인 선교에 관한 7월 분기 보고서에 동 시리아 학교에 교육 서적을 제공하는 선교 인쇄소의 일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 있습니다. 최근까지 모국어인 시리아어는 한 번도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책을 쓰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지역이 다른 방언을 사용하고 다른 곳에서는 거의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방언, 즉 우르미 방언을 기본으로 채택해야 했습니다. THE MORNING CALM. No. 16, VOL. II. OCTOBER 1891. The Bishops Letter. CHEMULPO, COREA, July 20, 1891. 네 번째 소식은 선교 자금과 관련해서 영국 성공회 산하 단체들의 활동상이 나타난다. 한국을 위한 기도와 사역 협회, 한국 병원을 위한 해군 기금, 고아원 후원 단체 등이 어떻게 얼마의 선교 자금을 마련하는지 자세히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각 선교지를 두고 바치는 기도로 선교잡지의 한 호를 마친다. 이렇게 다섯 부분 외에도 간혹 어린이들을 위한 칼럼 형식의 글(CHILDREN), 원하는 물품을 써 놓고 후원을 부탁하는 글(WANTED) 등이 실리기도 한다. 또 한가지 모닝캄에서 주목할 부분은 1889년부터 우리나라를 조선이 아닌 Corea로 명칭하고 수도를 한양이 아닌 서울로 표시한다는 점이다. 4.3. 영국 성공회의 해외 선교조직 한국 선교의 책임자가 된 코프 주교는 영국의 여러 선교단체로부터 후원을 얻게 된다. 1890년 7월에 영국을 떠나면서 HNF(Hospital Naval Fund, 해군병원기금)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모닝캄을 발간하게 된 것이다. 영국 성공회는 국교회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던 SPG(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해외복음선전회)와 모닝캄을 후원하였던 HNF 모두 준 국가기구의 일부였다. 4.4. 영국 선교사가 바라본 한국의 모습 <한국 사람> 한국인들은 남쪽에 있는 나무의 길에서 그 어떤 것도 자라지 못 하게 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장작을 위해 직접 팹니다. THE MORNING CALM. No. 16, VOL. II. OCTOBER 1891. The Bishops Letter. CHEMULPO, COREA, July 20, 1891. 온화하고 상냥한 것, 그런데 자존심도 없는 게, 그게 그들을 유난히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수 세기에 걸친 억압과 우울증은 사람들의 도덕성을 파괴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THE MORNING CALM. No. 16, VOL. II. OCTOBER 1891. The Bishops Letter. CHEMULPO, COREA, July 20, 1891. 한국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천성적이고 냉담하여 혁명이나 내전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정도로 자신을 주장하는 엄격한 자질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THE MORNING CALM. No. 17, VOL. II. NOVEMBER 1891. The Bishops Letter. CHEMULPO, COREA, August 13, 1891. 승려는 면도를 하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경우에 그들은 머리에서 머리카락을 밀었지만, 그들이 공언한 후에 수염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각 사람은 묵주를 목에 두르지만 그 외의 모습은 지극히 교회적인 패턴으로 카울리 교부들이 쓰는 모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점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한국인의 모습입니다. THE MORNING CALM. No. 17, VOL. II. NOVEMBER 1891. The Bishops Letter. CHEMULPO, COREA, August 13, 1891. 그 중에서도 그는 그의 사복을 제공하기에 극소수만이 비슷한 옷을 입습니다. 그들은 너무 더럽고 깔끔하지도 않고, 군인들끼리 무서워서 서로를 쏠까봐 탄약통도 지급되지 않습니다. 기병대가 가장 놀랍습니다. 그들은 오직 쇼를 하기 위해 말에 올라 타서 완전 무장을 하는데, 그 중에서도 헬멧만 무게가 12 lbs.(약 5.4kg)여서 한 명은 동료의 헬멧을 잡아주고 한 명은 말을 조종합니다. THE MORNING CALM. No. 22, VOL. II. APRIL 1892, The Bishops Letter. CHEMULPO December, 1891. <한국 지형> 시골은 언덕이 많았지만 거대하게 솟은 산들 틈에 움푹 패인 서울에 가기 전까지 ‘산’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THE MORNING CALM. No. 14, VOL. II. AUGUST 1891. 부산과 원산 사이의 해안선은 매우 가파르고 산지로 되어 있습니다. 서쪽과 남쪽의 지역은 서로 다른 개성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의 거주 흔적은 보이지 않고 바다의 경계로 떨어지는 녹색 언덕은 마치 등뼈처럼 남과 북으로 나라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THE MORNING CALM. No. 15, VOL. II. SEPTEMBER 1891. <한국 사회> 우리는 일본 여관에 들리기 위해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오믈렛과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우리는 페리를 타고 마포로 갔고, 그러니까 짚고 넘어가자면 서울에 있는 항구이자 강이 도시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입니다. 도시의 모습은 정말 신비로웠습니다. 영국, 일본 영사관을 제외하고는 1층보다 높은 집이 없었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2, 3개 남짓한 큰 길을 제외하면 도로도 없었습니다. 이를 제외하면 하수구 냄새 물씬 나는 더러운 골목길이 전부입니다. 이 악취는 사실 내가 생각했던 만큼 더럽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중국 도시들, 닝포에서 맡았던 바보다는 낫습니다. 길들이 많이 어수선하지만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아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짐꾼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을 제외하고요. 그 남자들은 떼지어 다니며 길고 흰 코트와 궁금증을 자아내는 모자, 거기다 담배를 물고 뒷짐을 진 뒤 걸어갑니다. THE MORNING CALM. No. 14, VOL. II. OCTOBER 1891. 몇몇 여자들은 초록 망토를 눈만 겨우 보일 정도로 쓰고 다닙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더러운데, 그들은 주님께서 약혼자임을 알리려 주로 분홍색 코트를 입습니다. 다른 복장의 다양성은 군인에게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짧은 검정 코트와 펠트천으로 된 각기 조금씩 다른 모양의 모자를 씁니다. 그리고 상제들은 거친 마대천을 늘려 만난 긴 코트를 허리에 밧줄을 묶어 고정합니다. 그리고 지름이 3피트나 되는 큰 원뿔 모자를 쓰고 얼굴 앞에 천을 늘어뜨린 두 막대기를 늘여 놓았습니다. 이는 저주 받은 영혼이 제 입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THE MORNING CALM. No. 14, VOL. II. OCTOBER 1891. 어느 날 저는 장례 행렬을 봤었습니다. 무척 진기한 광경이었죠. 첫 번째로 애도하는 물결 속에 베일에 쌓인 두 여인이 말에 올라탑니다. 그 뒤 많은 사람들이, 그 다음 송장이 세단 의자에 실려 옵니다. 제 생각에는 대놓고 가장 요란스럽게 울부짖던 상주에게는 이 북적거림 속에서도 아무 관심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THE MORNING CALM. No. 14, VOL. II. OCTOBER 1891. 우리의 상인은 주로 중국인입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두 개의 식당은 영미권 식단으로, 혹은 몇몇 다른 것들을 내놓습니다. 이런 공간에서 중국인들과 마주치는 건 마치 프랑스 외지에서 영국인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THE MORNING CALM. No. 14, VOL. II. OCTOBER 1891.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과 중국인은 그들의 영향력이 항상 한국의 정치, 사회, 종교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THE MORNING CALM. No. 16, VOL. II. OCTOBER 1891. The Bishops Letter. CHEMULPO, COREA, July 20, 1891. 제물포 고향은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 지역입니다. 종이와 몇 개의 놋쇠 냄비를 제외하고는 예술품도, 제조품도 없습니다. 모든 산업은 체계적으로 황폐해 있습니다. 번영하는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의 부러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그들 정부의 이론입니다. 그들의 극도의 빈곤함은 그들을 보호할 것입니다. 이웃보다 더 근면한 사람이 재산을 조금이라도 모으면 조선의 공무원들은 세금을 매기고 모든 면에서 돈을 조금이라도 빼앗습니다. 따라서 산업에 대한 인센티브가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들의 마음가짐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퍼질러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양반 혹은 중국인의 집들은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볼 때에는 누추하고 무너져 보입니다. 또한 도시에는 왕궁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종류의 사원이나 공공건물도 없습니다. 불교는 이 나라의 국교입니다. 하지만 불교 사원은 이 성벽 안에는 지어 질 수 없고 불교 승려들은 들어올 시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름에 가치가 있는 도로는 두 개뿐입니다. 하나는 남쪽문에서 시작되어 도시를 가로질러 종각(Great Bell)까지 이어진 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종각에서부터 서대문까지 이어지는 길입니다. 눈과 코가 똑같이 불쾌해지는 더러운 골목의 더러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가정 주인들은 모든 쓰레기와 하수를 가장 가까운 문이나 창문으로 거리로 내던집니다. 거기는 혐오스러운 녹색 물물 웅덩이가 고여 썩어가고 있는데 돼지들과 아이들이 그곳에서 장난치며 놀곤 합니다. 폭우가 그 일부를 씻어내고 더 많은 쓰레기가 지나가던 사람들에 의해 더 드러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레라는 불과 20년 전까지 일본인들이 한국에 가져왔다고 보고되기 전에는 한국에는 없었던 질병이라 합니다. 지금 그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작년 말에 유럽인들이 세운 두 세 채의 건물들 입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는 사실과 다양한 방향으로 높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프랑스 미션이 왕궁보다 높은 곳에 지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 큰 불쾌감을 줍니다. 이 집은 우리 집에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THE MORNING CALM. No. 21, VOL. II. MARCH 1892. The Bishops Letter. SEOUL, COREA, November, 1891. 다음 질문은 "당신네 여왕은 어떻습니까? 였고, 힐리어 씨가 "마지막으로 여왕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건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때 K. 와 T.는 거의 빵 터졌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멍청해 보였고, 다들 이 일에 대해 너무 엄숙했습니다. 선장은 해군 대장이 직접 오지 못해 미안하지만, 내년에는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해군 대장을 보면 정말 기쁠 것이라고 했고, 영국 배가 한국으로 오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영국을 굉장히 좋아하고 따르기에 한국과 영국의 친밀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영국 여왕에게 그가 가장 바라는 것들을 적었고, 우리는 왕에게 우리를 맞아주어 고맙고 영광이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뒷걸음질로 방에서 나갔고, 계단에서 넘어질 뻔했습니다. 왕은 굉장히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었고, 우리가 본 한국인 중에 가장 생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들 너무 뚱뚱하고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THE MORNING CALM. No. 22, VOL. II. APRIL 1892, The Bishops Letter. CHEMULPO December, 1891. 4.6. 모닝캄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 이번 연구 결과를 데이터화하여 데이터베이스로 제작한 후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으로 전환해 시각화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http://dh.aks.ac.kr/~pattern/wiki/index.php 참조) 5. 연구결과의 기대효과 및 활용방안 본 연구의 결과물은 조선 개화기 영국 선교사들의 행적을 추적함으로써 발견되는 사료를 총괄적으로 수집∙정리하고 주요 사료를 선별, 편집해서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셔닝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선 해외 선교사들에 대한 1차 사료의 부족 현상을 해소하고 후속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하는 데 초석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본 연구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미발굴 사료인 영국 성공회의 선교잡지를 연구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에 대한 발자취를 찾아 교육학과 역사학에 대한 학제간 연구의 활성화의 계기를 가져옴으로써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들과 근대 교육 간의 관련성을 살펴 활용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연구에서 번역되어 분석되는 기록의 주요 내용에 대한 해석과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교육철학과 교육사의 기초연구를 활성화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를 위한 사료 조사 자료들과 시맨틱 데이터 큐레이션은 한국 교육철학과 교육사를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사료 분석과 데이터 교육 방법을 위한 의욕을 증진시키고 교육철학자, 교육사학자로서의 전문성을 익히는 하나의 동기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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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박준형, 이선호. (2013). 영국성공회의 『조선약론(朝鮮畧論)』과 그 인식에 대한 연구, 한국교회사학회지, 통권 34호, 187-218. 안영후. (2011). 개화기 천주교의 제주도(濟州島) 신교육운동 考. 교육실천연구, 10(2), 151-168. 안종묵. (2009). 종교잡지 The Morning Calm의 발간 의미에 관한 고찰 안종묵. (2008). 종교잡지 The Morning Calm의 성(聖)과 속(俗). 한국방송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69-70. 정진석. 한국 잡지 역사. p.9-10. 근대의 산실, 학교 공간으로 읽는 근대문화 역사유산, 공간으로 읽는 근대,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2902) 한국학중앙연구원,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만8천여점 공개, 연합뉴스, 2021.08.10 (https://www.yna.co.kr/view/PYH20210810046800005) |
전체 연구결과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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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기 역사에는 미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세계 열강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 나라들의 정치적, 외교적 활동이 우리의 역사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영국의 행적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영국은 아시아에서 중국과 인도를 상대했던 거물급 국가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 역사와 관련된 사건은 거문도 점령 사건 이후 해방까지 우리 역사에 별로 크게 나타나지 않다가 1950년에 비로소 한국전에 참전하는 UN회원국가로 다시 등장한다. 미국 선교사들과 달리 종교적 접근에 있어서도 영국 선교사들의 행적은 아직까지 사실상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이 모닝캄(The Morning Calm)이라는 영국 성공회의 선교잡지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 개화기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이었던 앨런 편지에 대한 분석과 데이터베이스화를 마쳤다. 이러한 서신 사료에 대한 연구는 당시에 대한 미시적 관점의 역사 추적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 활동의 이면에 놓여있는 서양인의 세계관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록의 연구는 방상근의 「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착과 한국 인식」과 천주교 선교사의 교육 활동을 연구한 또 다른 논문인 안영후의 「개화기 천주교의 제주도(濟州島) 신교육운동 考」가 있다. 방상근은 뮈텔 주교의 일기를 근거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에서 방상근은 천주교 사료에 입각해서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이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 등의 사회 복지 활동과 학교의 운영을 함으로써 비신자들을 감화시켜 신자수를 증가시켰다는 사실 등을 증명했고 사료를 통해 천주교가 조선에 학교를 지으려고 한 이유가 순수한 교육적 목적이라기 보다는 프랑스의 정치적 속내에서 발로했다는 점을 찾았다. 안영후가 밝힌 1908년 9월 24일자 Mutel 주교에게 보낸 E. J. Taquet 신부의 서한은 이제까지 제주교육사에서 제주 공립 보통학교를 최초의 신식학교라고 여겨 왔던 통념을 바꿀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천주교의 제주도 신교육운동의 기록을 담고 있는 『제주복음전래 100년사 자료집』, 『천주교부산교구사자료집』, 『제주교육사』, 『신성100년사』, 『제남신문』 등의 내용을 분석하여 당시의 사실들을 현대에 펼쳐 놓았다. 이처럼 개화기 당시의 서신, 일기 등 당시 교육 활동의 전면에 있던 선교사들의 사료를 통해서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본 연구는 한국에 파견된 영국인 선교사 단체(영국 성공회)가 남긴 사료(The Morning Calm, 선교 잡지)를 발굴하고 성공회 조직의 특성과 사료가 담고 있는 한국 관련 내용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The Morning Calm의 구성과 특징, 영국 성공회의 해외 선교 조직, 영국 선교사가 바라본 한국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 과제에서 연구한 부분은 The Morning Calm의 초기 발행본이다. 아직 본격적인 한국 선교가 시작되기 전 선교를 위한 준비단계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에 선교의 실제 활동보다는 영국 선교사가 바라본 한국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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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과제별 요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