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기초연구 / 공동연구과제 | ||
---|---|---|---|
과제코드 | |||
연구과제명 |
|
||
연구책임자 | 손용택 | ||
공동연구자 | 이상훈, 서신혜, 이고은 | ||
연구기간 | 20200101 ~ 20201216 | 연구형태 | 공동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활동연대의 부분적인 중첩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인물에 대한 병행적 차원의 연구는 그 목적과 방법의 정교함을 전제하지 않을 때는 나름 적지 않은 어려움을 도출한다. 본 연구에서 시도하고자 하는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유영모의 [다석일지] 분석을 통한 민족의식 성격연구’가 그러하다. 짧은 일본의 체류를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했던 유영모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교편을 잡는다. 이 기간 그는 학생으로 입학한 함석헌을 만나 교유한다. 함석헌은 이후 동경으로의 유학을 떠나 그 곳에서 김교신을 만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기회로 기독교를 접하면서 향후 자신들의 생각을 서로 나누는 동인지를 꿈꾸게 되는데 이로 인해 탄생된 것이 『성서조선』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한 함석헌은 함께 귀국하여 『성서조선』 간행에 매진하고 있는 김교신에게 오산 학교 시절의 스승 유영모를 소개한다. 이후, 둘 사이의 삶의 행적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영모와 김교신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으로 단순한 ‘사제지간’ 혹은 ‘교우지간’의 관계를 넘어서는 친연성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호흡으로 일제에 의한 피식민 상황을 겪고 있던 당대 조선을 살아갔지만 서로의 생각과 삶의 양식을 닮고자 하였다. 그동안 학계에서 김교신과 유영모에 대한 개별적 연구는 상당한 분량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둘을 함께 묶어 그들의 내면의 어떠함을 연구한 시도는 본 연구가 처음이다. 특히 이들의 내면을 ‘민족의식’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살펴보되 이들이 남긴, 이들의 분신들과 같은 문헌인 『성서조선』과 『다석일지』를 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그 분석의 결과를 가지고 본 주제를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비록 쉽지 않은 과업이지만 새로운 착상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다. 상기 주제의 목표를 이루는 방법으로 함께 공동연구의 형식으로 필자들은 독자들에게 보다 입체적이며 거시적 안목을 제공하기 위하여 네 영역으로의 분업 형식를 통해 접근하고자 한다. 먼저 김교신과 유영모는 그 누구보다도 잃어버린 조국을 사모하되 추상적인 개념이나 막연한 연모가 아닌 실천적, 구체적인 방법으로 그 연모를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김교신과 유영모가 남긴 문헌들 가운데 ‘삶의 지향과 시대정신’을 살피기 위한 방향을 잡고 김교신의 지리사상과 교육현장의 철학적 고민을 조명하고, 유영모의 자연관, 우주관, 인생관을 분석 시도한다(제 1 주제, 집필자 손용택). 두 번째 부분은 김교신과 유영모의 나라사랑이 문학적 측면에서는 어떠한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 2 주제, 집필자 서신혜). 김교신과 유영모는 무엇보다도 성서의 세계를 통해 자신들의 사유의 중심을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남기고 있는 문헌들 속에는 풍부한 종교적 주제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종교·사상적 관점을 다루게 될 것이다 (제 3 주제, 집필자 이상훈), 마지막으로 이들이 남긴 문헌들 속에 내재하는 풍부한 언어와 어휘들 그리고 독특한 개념들은 단지 인문학적 의례성을 넘어서는 독특함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언어적 특성의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제 4 주제, 집필자 이고은). 이같이 서로 다른 전공의 차별적 장르를 다루는 기법으로 본 연구가 김교신과 유영모의 사상과 그 영향이 워낙 광범위하기에 다양한 시각의 종합적인 연구로서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김교신의 나라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주 텍스트는 『성서조선』으로 삼는다. 『성서조선』은 국권 회복의 꿈을 키우며 ‘압제자 일본을 제대로 알고자’ 일본에 유학하였던 조선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세상에 태어났다. 당대 일본 기독교계의 사상적 심볼이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유석동·양인성 등 6명의 주도로 1927년 7월에『성서조선』이 창간된 것이다. 초대 발행인과 편집인은 일본에 있는 유석동과 정상훈이었고, 발행소는 도쿄성서조선사였다. 이후 1930년 6월호인 제17호부터는 동인들의 사정으로 김교신이 편집·간행·발송·발행경비 등의 모든 책임을 맡아 격월간지로 펴냈다. 국판, 35면 내외였고 발행부수는 300부를 넘지 못하였으나 고정 독자들 가운데 이승훈·장기려 등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교신은 이 잡지에 꾸준히 ‘성서’와 ‘조선’의 주제로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일경(日警)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같은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조선』의 발행을 지속하였는데, 그 속에는 그가 체득한 성서의 교훈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으며 폭 넓게 그와 교류한 지인들의 투고들도 게재되었다. 그 와중에 1942년 3월호가 되는 제158호의 권두언 「조와(吊蛙)」의 내용이 동면하는 개구리의 소생을 비유하여 민족의 소생을 부르짖었다는 구실로 폐간조치를 당하였다. 그리고 김교신ㆍ함석헌ㆍ유달영 등 연루자 18명이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이념과 방식은 이후 함석헌의「씨알의 소리」, 송두영의 「성서신애」, 노평구(盧平久)의 「성서연구」 등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평가되면서 그 영향력이 일제강점기를 넘어서 해방 후 남·북한 사회의 기독정신 지평 형성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 공동연구자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점은 그동안 나온 김교신과 『성서조선』에 대한 연구논문이 주로 그의 무교회주의라고 불리우는 종교 내적 영향력이라든지, 혹 김교신의 생애사적 연구의 틀을 통하여 그의 전기적 연구 등에 집중되어 왔던 기존의 연구로부터 얼마간의 차별성을 갖고자 하는 점이다. 즉 김교신의 성서조선 운동에 대하여 좀 더 거시적 안목, 『성서조선』에서 김교신이 꿈꾸었던 이상이 당대 동북아적 역사 흐름 속에서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성서와 민족에 대한 관점이 문학, 언어학, 지리학, 그리고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등을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틀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김교신과 그의 동지적 관계를 형성하였던 유영모 등 일단의 ‘사상적 동지’들이 당대와 그 후대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민족사랑, 나라 사랑 방식은 어떠한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지를 좀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본 연구의 또 한 축인 유영모의 경우 그가 남긴 『다석일지』가 우리의 주요 관심의 대상이다. 다석 유영모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유교, 불교, 도교 경전을 섭렵하였다. 1905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서 행한 명사들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다가 초대 YMCA 총무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나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10~1912년 오산학교 교사가 되었고, 1912년 일본의 도쿄[東京] 물리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귀국하였으며, 1921년 오산학교 교장으로 1년 있었다. 1928년 YMCA의 연극반을 지도하는 인연으로 그는 이후 YMCA에서 ‘연경반’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강해를 시도하는 대중적 집회를 꾸준히 이어가게 되었다. ‘연경반’ 강의를 통해 나타나는 다석의 가르침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당시 한국적 전통에서 형성된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 등의 핵심적 내용이 함께 어우러진 것들이었다. 유영모 개인 가족사를 통해 경험하는 잇단 죽음과 조국의 패망과 아픔 가운데, 그는 고독한 신앙의 길을 가는 가운데 폭넓게 한국적 전통을 모색하였던 당대의 사상가였다. 그의 글의 언어들은 분석적인 근대 철학과 신학의 차가운 이성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1700 수가 넘는 한글로 된 시조를 비롯해 다석이 조선인 속에 살아 숨 쉬는 종교적인 심성들을 그 만의 언어로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유영모는 한글로 자신의 종교심을 표현하는 독특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그는 한글은 뜻을 울리는 음이요, 음의 그림으로 보았다. ‘ㄱ’은 하늘을 뜻하는 소리로, 혀뿌리가 구부러지는 모습의 깊은 사상의 울림이다. ‘ㅡ’는 땅을 뜻한다. ‘ㅅ’은 인간을 뜻한다. 인간이 하늘을 인 모습이 ‘긋’이요, 이 ‘긋’은 곧 하늘에서 온 사람인 동시에 하늘의 뜻을 받아 사는 하늘을 향하는 사람이다. 이 둘이 하나의 점묘로 그려진 그림처럼 그려지고, 소리 나는 것이 바로 ‘긋’이 드러내는 소리이다. 박영호, 『다석전기: 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490 이러한 다석의 사유는 동아시아 종교심의 토양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기독교를 새롭게 수용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동양적이고, 동시에 시대를 앞선 종교 사유의 새로운 국면을 볼 수 있다. 서구의 개념인 생(生)보다 우선하는 사고의 경직성을 넘어서, 사고를 생을 추적하는 그릇으로 여기고, 사고를 보다 깊은 영역으로 초월적인 사고, 개념의 이해가 아닌 대상에 대한 만남을 추구하는 길을 택한 것이 다석 심성의 뿌리라고 보이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공동연구자들은 다석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다석일지』를 통해 이처럼 그가 이루고자 하였던 한국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신앙하는 사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던 그의 ‘민족사랑과 나라사랑’의 세계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문학과 언어를 통해 빚어지는 한국인의 정체성,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 어떤 정치적, 권위적 억압의 세력과도 구별되는 참 자아임을 역설하였던 그의 의식 세계를 통해 당대 ‘민족과 나라사랑’의 방식과 내용을 규명해 보고, 그의 사고가 이후 세대에게 끼친 영향력을 가늠해 볼 것을 기대한다. 이제 이상의 전제와 김교신과 유영모의 내면의 탐색을 통해 진정한 ‘민족과 나라사랑’은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연유하는가를 탐색하게 될 것이다. 김교신의 경우 단지 무교회주의자, 혹은 애국적 민족주의자라는 기존의 일률적인 통념을 넘어서는 일상에서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유영모의 경우 언어를 통해 민족의 혼을 깨우는 ‘우리 됨’의 지평을 모색하고자 한다. |
||
연구방법 및 내용 | 이상에서 논한 연구배경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연구방법과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유영모의 『다석일지』를 중심으로 하고 관련 문헌들과 자료들을 바탕으로 분석한다. 둘째, 김교신과 유영모에 대한 선행연구를 검토한다. 셋째, 『성서조선』에 게재된 ‘조선지리소고’를 통해 김교신의 국토관과 동포애 및 나라사랑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고, 성서조선의 내용들을 통해 김교신의 교육관과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유영모의 『다석일지』및 다석어록, 그리고 관련 문헌자료들을 통해 유영모의 종교철학 행위, 관점, 이해, 회통의 노력, 성과 등을 파악할 수 있고, 우주 자연관, 인생관을 조사할 수 있다(손용택). 넷째, 김교신과 유영모의 문학작품을 통해 그 성격과 특징을 파악할 수 있고 문학을 통한 민족의식과 나라사랑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다(서신혜). 다섯째,『성서조선』과『다석일지』의 내용 조사를 통해 김교신과 유영모의 무교회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동시에 이들의 신앙활동, 종교철학적 사유속에서 그 시대의 민족의식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유영모의 한글을 바탕으로한 신토불이 종교철학의 방법을 사례를 분석하어ㅕ 드러낼 수 있다(이상훈). 여섯째, 김교신과 유영모의 어휘사용을 분석하여 민족의식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고 어휘사용을 통한 한글신학의 성격을 조명해 볼수 있다(이고은). 끝으로 이상을 정리하여 김교신과 유영모의 시대적 고초를 겪어낸 정신과 그들의 철학과 사유속에서의 민족의식 및 나라사랑의 태도를 읽어낼 수 있으며 드러내는 방식과 함유하고 있는 성격을 정리해냄으로써 결론으로 도출, 정리할 수 있다. |
||
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우선 큰 틀의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론 김교신과 유영모의 삶 개관 김교신과 유영모의 삶의 지향, 그리고 시대정신 민족에 대한 김교신과 유영모의 생각, 그 문학적 접근 김교신과 다석 유영모의 민족 의식과 신앙적 정체성 김교신과 유영모의 어휘사용 방식에 드러나는 민족 의식 결론 각 연구자별 목차를 제시하면, 손용택의 ‘김교신과 유영모의 삶의 지향, 그리고 시대정신’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Ⅰ.서론 1. 연구의 배경과 목적 2. 관련 선행연구의 검토 Ⅱ. 김교신의 시대적 고민과 삶의 지향 1. 빈곤한 조국을 생각함 2. 교육의 철학적 고민과 지향 3. 김교신과 유영모의 만남 Ⅲ. 유영모의 삶의 지향, 그리고 시대정신 1. ‘육’과 ‘영’의 철저한 분리 2. ’농심(農心)‘의 실천을 통한 하나님 지향 3. 다석의 우주 자연관, 인생관 Ⅳ. 결론 서신혜의 ’민족에 대한 김교신과 유영모의 생각, 그 문학적 접근’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Ⅰ. 서론 Ⅱ. 김교신의 민족 생각: 백성이 섬겨야 할 교회이고 나라다 1. 종교가 있는 민족이 영구히 남는다 2. 의식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 3. 가난 중에 대범한, 기개 있는 우리 민족 4. 약한 백성에게서 발견한 참 우리 민족 5. 소결 Ⅲ. 유영모의 민족 생각: 한 사람의 참삶이 가치 있다 1.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다 2. 죽음을 인지하며 오늘을 사는 것 3. 한 개인의 참삶이 이룩하는 세상 4. 소결 Ⅳ. 결론 □ 참고자료: 유영모 소설, <귀남과 수남> 원문 이상훈의 ‘김교신과 다석 유영모의 민족의식과 신앙적 정체성’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 서론: 김교신과 다석 류영모, 두 이름을 향한 노스텔지아 II. 김교신의 민족의식과 신앙적 정체성 1. ‘새로운 지평의 열림’; 회심 사건의 함의 2. ‘성서 (The Bible)와 조선(Chosun)’; 두 세계를 향한 갈망 3. ‘조와 (弔蛙)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조국’의 의미 4.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비전과 일상 III. 다석 유영모의 민족의식과 신앙적 정체성 1. 다석 유영모의 ‘그이’ 2. 다석과 ‘무른’; ‘님’을 향한 그리움 3. 다석과 ‘부른’; 가슴에 품 안은 ‘님’ 4. 다석과 ‘푸른’; 사랑하는 ‘님’을 넘어서 IV. 결론: 김교신과 다석 류영모, 삶의 뒤안길 이고은의 ‘김교신과 유영모의 어휘사용 방식에 드러나는 민족의식’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 서론 II. <성서조선>을 통해 보는 김교신의 글과 민족 의식 1. 김교신의 어휘사용에서 나타나는 특징 2. 민족 의식의 구현으로서 <성서조선>의 의의와 한계 III. <다석일지>를 통해 보는 유영모의 우리말 어휘사용과 민족 의식 1. 다석의 소리: 계소리-제소리-추리 2. 민족 의식의 구현으로서 다석의 우리말 어휘사용의 특징 1) 언어유희를 통한 이중의미 부여 2) 한자어의 우리말 번역 3. 다석의 한글 신학: 어휘 분석 IV. 결론 |
||
연구결과 |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공동연구’의 경우, 서로의 영역에서 동일한 주제로 접근하는 양태는 연구자의 글쓰기의 어떠함에 따라 때로는 그 범위가 크게 벌어진다. 이같은 이유로 삶의 지향과 시대정신, 문학의 향기, 사상과 종교성, 그리고 어휘와 언어분석이라는 어쩌면 서로 상관성이 별로 없을 법한 제 영역에서 김교신과 유영모의 삶의 여정과과 민족의시, 그리고 나라사랑을 다루는 작업은 독자들에게 적지않은 상상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다소간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동반하는 독자는 본 연구에서 필자들이 의도하는 바를 그리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관점의 앵글은 다르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그간 김교신과 유영모를 논할 때 통상적으로 ‘애국자’ 혹은 ‘독립투사’등의 관점으로 다루었던 일률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나라를 잃고 피식민의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던 면면은 흔히들 생각하는 일제에 항거하고 무력으로 무장투쟁하는 어떤 ‘투사’의 면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소위 ‘혼’은 그 어떠한 무기보다 더 강력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현실을 어쩌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의 신념과 원칙을 지키는 한에서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고 또한 주변의 제 환경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남긴 불꽃같은 열정과 나라사랑의 정신은 그 어떤 무력이나 무기로서 줄 수 있었던 항거의 힘을 훨씬 능가한다. 먼저 손용택은 김교신과 유영모의 삶의 지향과 시대정신을 밝혀보고자 했다. 선행연구 검토에서 보이듯이 지리학계에서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실린 「조선지리소고」에 대한 동일 연구자의 두 편 연구(이은숙; 1996, 2005)가 있을 뿐이고, 다석에 관한 연구는 전무하여 연구자는 처녀림을 답사하는 마음으로 연구에 임했다고 할 수 있다. 김교신은 1901년에 유교풍의 집안에서 태어나 망국의 운명을 지켜보며 자랐다. 일본유학생활에서 기독교에 입문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조선 무교회주의 기독운동의 초석을 마련한 기독교계 지도자중 한사람이다. 유학 후 지리교편을 잡은 김교신은 지리학계에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지만, 실상 근대지리학의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는 면이 있다. 『성서조선』에 남긴 「조선지리소고」는 학술적인 내용으로 그같은 평가의 준거가 되는 글이다. 본 내용은 조선반도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지리적인 논리를 갖춰 전개한 것인데, 당시 많은 이들을 탄복시키는 웅변과도 같은 힘을 가졌다고, 양정고보 시절 김교신의 제자였던 유달영은 전한다. 「조선지리소고」에서 조선은 인구면에서, 크기면에서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며,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울타리 쳐진 자연지리적 경계와 정치지리적 행정경계가 일치함으로써 발전역량의 구비조건을 갖추었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연구자는 여기에 덧붙여 단일민족과 동일한 역사의 동질성 확보는 더욱 큰 단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김교신의 단위(=지역) 일치 이론은 논리와 설득력을 지님으로써 일제의 억지주장인 ‘반도정체론’을 논박하고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동포들에게 꿈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김교신에게 일본유학은 새로운 문화와 문명의 충격이었고 특히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강연을 다년간 접한 영향은 커다란 신앙적 변혁일 것이었다. 이는 귀국 후 유학동지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발행하게 된 에너지이며 동기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을 성서 위에,’ 그리고 ‘성서를 조선 독립을 위해’라는 신념으로 정신무장함으로써 동포들의 영적 신앙생활은 나라의 독립과 직결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보았다. 무교회주의 신앙 활동을 통해 아마도 그에겐 성서와 조선은 뗄수 없는 관계이며 이를 실천하고 신장시키는 일을 삶의 이유요, 그의 삶에 대한 활력의 원천으로 생각한 것 같다. 학교의 교육에서도 ‘영’의 훈련과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양단을 매우 중시했으며 양자를 고양시키는 것이 그의 교육철학적 신조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그의 삶의 태도를 분명하게 만든 양대 지침이라 할만하다. 주말과 방학 등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학생들과 동료 및 지인들을 모아 답사반을 조직해 고적답사와 등산을 통해 참교육을 행하는 것은 바로 그의 삶의 지침을 펼칠 훌륭한 장(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대학에 진학한 제자들의 기뻐하는 안부서신에 대해,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취직해 인생을 성공한 것처럼 기뻐하는 제자들의 서신을 읽으며 안쓰럽고 고민이 되는 것은 ‘영’의 단절과 동포를 살리려는 ‘혼’의 희석으로 이어질까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이같은 가치관은 일본 유학중 10개월 만에 느닷없이 되돌아온, 그리고 효도하는 마음 없이 시골의 소 팔고 논을 팔아서 대학에 갈 필요 없다는 다석의 가치관과 통하는 바가 있다. 김교신의 내면적 가치관의 연장선상에서 일본 유학중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1년만에 돌연 지리박물학으로 바꾼 것은 맥이 닿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연구자는 혹여 강력한 영적 선이 닿아 김교신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해본다. Carl Ritter→Guyot→우치무라 간조→김교신으로 닿는 선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문학의 1년 공부 덕분에 타임지를 평생 구독할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세계정세와 세계지리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다양한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치무라 간조는 프리스턴대학에서 수학할 당시 본인 전공 외에 지질학을 공부했다. 따라서 해당과의 지리학자인 Guyot의 강의에도 심취한바 있다. Guyuot는 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Carl Ritter의 애제자이므로 스승인 Ritter의 지리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은 자명하다. Ritter의 중요한 지리사상에는 세계 각 지역의 발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전하도록 되어있는 목적론적 사상을 포함한다. Ritter의 사상은 Guyot를 거쳐 우치무라에게, 다시 김교신에 이르는 영향관계를 형성했다고 상상할수 있다. 그렇다면 Ritter로부터 출발해 김교신의 지리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된 것은 김교신의 기독정신을 더욱 무장시켰을 가능성도 크다. 조선의 교육현장에서 김교신의 지리강의와 『성서조선』을 통한 국토사랑 및 나라사랑을 고취시키는 내용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민족동포들의 가슴을 적셔주었음을, 양정고보 교사시절 그의 제자였던 유달영은 증언하고 있다. 조선의 동포들이 가난을 극복하고 독립을 이루기위해서는 오직 조선을 성서위에 반듯이 올려 ‘영’의 나라로 만든 바탕위에 올바른 교육으로 민족의 ‘혼’을 심는 일이야말로 독립을 앞당기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흔들림 없는 이러한 정신자세는 후에 유영모와의 신뢰관계를 깊게 만드는 초석이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함석헌은 오산학교 3학년 시절에 교장으로 왔던 유영모에게 영향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 함석헌은 일본에서 함께 유학했고 『성서조선』을 주도하고 있던 김교신을 유영모에게 소개한다. 무교회주의 노선의 색깔이 다르고 신앙관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교신과 다석은 사제관계로 신뢰가 깊어진다. 김교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기리 유영모 집을 찾아 질문하고 공부한다. 잠시 유영모의 기독교 신앙관점을 잠시 살필필요가 있다. 그는 15세에 기독교에 입문해 22세에 교회룰 나왔다. 하나님을 떠났다기보다 본인방식의 무교회주의 신앙생활에 접어들었다고 볼수 있다. 아마도 이에는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도 그의 가족사에 있어서 그 무렵 두 살 아래 동생 영목의 갑작스런 죽음마저 목도한 충격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속신앙과 교회의 교의신앙에 회의를 품고 톨스토이와 간디의 사상에 몰두했다. 그들의 신관에 동조하고 그들과 같은 삶을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전반을 살펴보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양의 종교를 회통한 종교 철학자인 동시에 사상가로서 그의 삶의 태도와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 및 기독교를 넘나들며 융합 회통해내는 평생의 자세를 보였다. 기독교를 마음의 중심에 둔 유영모는 삶에 있어서 영과 육의 철저한 분리를 늘 주장하였다. 그리고 육의 자손보다 ‘영’을 계승하는 후손이어야 함을 중시했다. 농심의 실천을 통한 하나님 지향은 40대 중반에 구기리(현, 종로구 구기동)에서 농부의 삶으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든다. 전원적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그는, 선친이 돌아가신 후 3년 상을 다하고 가산을 정리해, 즉각 행동에 옮긴 것이다. ‘영’을 사모하며 조용하지만 단호히 움직이는 실천태도는 어떤 면에서 김교신과 통하는 바가 있다. 삶에서 성령 충만으로 완성을 이루기는 어려우나 이마에 땀 흘리며 흙을 일구는 농심의 실천이야말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구도의 길로 생각할 수 있었을 만하다. 다석은 자신을 늘 지구인으로 자처했다. 우주의 바탕은 검은 것이 본연이며 우주의 극히 일부인 태양계의 밝음은 코스모스 차원에서 매우 순간적인 미미한 빛으로서, 우주공간의 ‘빈탕한데(=허공)’는 어두움이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우리 일상에서 신과의 소통은 저녁이후 어둡고 조용한 가운데 잘 이루어지는 소이로 이해가능하다. 이러한 다석의 관점은 그의 우주관과 인생관에도 영향을 미쳐 지구인으로 자처하며 생각은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을 섭렵하고 있었으며 밤하늘 별자리 살피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세가지 방도를 첫째,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 둘째, 밤하늘 은하계의 총총한 별자리들을 마음비운 눈으로 역시 하염없이 바라볼 때, 셋째, 마음속에 성령이 충만할 때로 설명한다. 노장사상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이를 자가 없느니라”의 말씀에서 나란 곧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령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성령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이를 자가 없느니라”라고 해석했다. 유영모는 성경말씀을 궁구하여 ‘산상수훈’과 ‘요한복음’의 말씀만이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이른 진정한 예수님 말씀인 것으로 본 것 같다. 이는 톨스토이의 관점과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다. 다석의 성경해석과 도교 및 화엄경의 경전연구, 어린 시절의 서당교육,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 등은 인간 유영모의 철학세계와 사상 및 신앙을 영글게 한 초석이며 그의 막힘없고 광대무변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인생관의 바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손용택은 ”김교신이 내면의 갈등과 성찰을 바탕으로 외연으로는 실천적이고 행동적인 치열한 삶을 이끌었다면 다석은 좀 더 내밀하고도 깊고 치열한 성찰적인 삶을 살면서 신을 찾아 동서양을 넘나드는 종교 철학적 갈등을 겪으면서 신을 긍국적으로 찾아 나서는 깊은 성찰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20세기 초반 한국의 기독교 전래시기에 종교에 대한 본질적 성찰과 주체적 재해석을 통해 의미심장한 사상적 성취와 실천적 삶을 일구어낸 선각(先覺)임에 틀림없다고 평가한다. 서신혜는 「민족에 대한 김교신과 유영모의 생각, 그 문학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연구를 통해, 김교신과 유영모의 문학 속에서 그들이 민족에 대해 가진 생각과 그들의 행동, 의도 등을 밝혔다. 논자는,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깊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된 국권상실기의 인물에 대한 연구는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두 사람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이들에 대해 문학면에서 선행 연구가 거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먼저『성서조선』에서 김교신이 남긴 문학 작품들로서 <조와>, <포플라나무 예찬>, <병상담편>, <제소와 패소> 등 글을 분석했다. 특히 김교신의 기행문 중 <경주에서>에 주목하면서 “경주의 예술품 중에서 불상과 사찰을 제하고 보면 또한 잔여가 영뿐이다. 곧 불교의 신앙이 없는 곳에는 집대성도 없었고, 신라의 사당인 예술도 없었던 것이다. 신라의 큰 것이 아니었고 저들이 가졌던 신앙에 위력이 있었다. 신앙으로 설 때에만 영구하고 위대한 것이 산출되었다”는 김교신의 소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원리로 김교신의 한 일을 보고 쓴 글을 읽으면 그 맥락이 분명해 지는 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참 ‘종교 신앙’을 붙잡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대하고 영원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김교신의 생각임을 밝혔다. 이로 보아 김교신을 단지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민족 운동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적시한 것이다. 뒷부분에는 김교신이 남긴 글이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김교신이 동양 전통의 글쓰기 기법의 하나인 우의(寓意)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일제의 감시 속에서 스스로 희망을 찾고 또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 등을 제시하여 그가 일제강점기 중요한 수필문학가 중 하나로도 평가받을 만하다는 점을 말하였다. 한편 유영모의 문학과 민족의식에 대하여 서신혜는, 우선 일제강점기에 주목하기 위하여 유영모가 1950년대 이후에 쓴 『다석일지』가 아니라, 1910년대 《청춘》 등의 잡지에 남긴 글들과 1930년대『성서조선』에 남긴 글들을 그 대상으로 하여 분석했다. 먼저 《청춘》2호에 발표된「나의 一.二.三.四.」와 《청춘》6호에 실린 「활발」에 주목하면서, 전자의 글에서 유영모는 동물과 다른 인간이 누구이며 고차원적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었고, 후자의 글에서는 한 개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게 산 개인의 영향력이 어떻게 세계평화에까지 연결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같이 김교신과 유영모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면서 서신혜는, 이들에게서 공통으로 특기할 만한 점은 국가나 민족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단체나 기관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과 그가 가진 힘에 주목했다는 점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실제적 인식을 갖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았다는 점”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상훈은 「김교신과 다석 유영모의 민족 의식과 신앙적 정체성」 제하의 글에서 먼저 기존의 연구들과 본인이 지향하는 연구 방법론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연구들은 김교신이란 인물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 즉 일제 강점기의 상황을 우선으로 염두에 두면서 진행되어온 경향이 농후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구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특정 선입견을 김교신 이해에 투영한다. 김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대신에 그의 인생과 그의 삶의 역정 속의 기념비, 혹은 고인돌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각각의 관점에서 김교신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단지 김교신이란 이름에 대한 ‘민족주의자’ 혹은 ‘애국적 독립운동가’ 등의 인식론적 선제적 선입견을 제거하고 ‘빈 마음’으로 김교신의 삶을 관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석 유영모는 스스로 전문적 신학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부 식자들이 다석을 폄하하면서 자신들의 견해를 덧씌웠던 것처럼 ‘자(自) 종교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양상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들 모든 평가는 일면 그 타당성을 가진다. 하지만 보다 더 명확한 다석에 대한 이해 역시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남긴 글을 통하여 어떤 특정한 전제 없이 그 내밀함을 파 들어가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상훈의 의도는 김교신과 유영모에 대한 세간의 통상적인 해석이 그들이 실제로 남긴 글과 문헌들의 철저한 고증없이 평자들 자신들의 선입견을 통해 또 하나의 허상과 같은 인물이 만들어지는 제 경향을 경계하면서 소위 ‘안으로부터의 인물이해’를 시도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이상훈은 김교신과 다석의 삶의 족적을 조망하되 핵심적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조심스럽게 언급하면서 여타 잡다한 부차적 삶의 여정들을 과감히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김교신의 경우 ‘회심사건의 함의’ ‘성서와 조선-두 세계를 향한 갈망’ ‘조와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조국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일상’이라는 얼개를 통해 김교신의 내밀함을 드러내 준다. 아울러 유영모의 경우 그가 남긴 수많은 시(詩)들 중에서 특히 한글시에 주목하면서 이들 시에서 핵심적 주제인 ‘그 이’ 그리고 ‘무른’ ‘부른’ ‘푸른’의 세계를 소개한다. 특히 ‘무른’을 ‘님을 향한 그리움’ ‘부른’을 ‘가슴에 품 안은 님’, ‘푸른’을 ‘사랑하는 님을 넘어서’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시행과 한글시의 어의의 중첩성을 조심스레 분석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처럼 내밀한 안으로부터의 읽기는 결과적으로 “김교신은 한 사람의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비교적 내면적 충실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조와> 사건을 통해 보는 것처럼 그의 깊은 자의식 가운데는 역사의 주인이신 신의 주권적인 섭리와 주권적 간섭을 믿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굳이 정의하자면 인간 내면의 신앙에 충실하되 그 내면의 인식에 기초한 고뇌를 삶의 현장이라는 외연으로 드러내는 기독인의 삶의 방식이었다고 소개한다. 아울러 유영모는 그 누구보다도 방대한 종교적-신학적 성찰과 그 결과물을 쏟아 내었지만 그 스스로 신학자, 또는 철학자로 연연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그를 어떠한 특정한 틀로 범주화하기 전에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 서고자 했던 한 개인의 마음 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름한다. 이고은은 「김교신과 유영모의 우리말 어휘 사용과 민족사상」 제하의 글에서 이들이 남기고 있는 언어 사용의 특성을 분석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기존의 연구에 나타나는 김교신 연구의 한계는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김교신이 보여준 유학과 기독교의 회통에 관한 적절한 탐구가 사상적으로 명확히 나타나고 있지 않은 점을 아쉬워하면서 이러한 한계는 유영모가 김교신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함으로써 대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목한다. 그리고 김교신과 유영모에 대하여 “이들이 의도했던 것은 동서를 아우르면서도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한국인을 위한 사상을 구현함이었다”고 전제하면서 “본 연구에서는 김교신과 유영모가 저술에서 사용한 우리말 어휘를 고찰함으로써 이들의 사상적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자 하며 동시에 이들이 우리말을 통해 전통사상과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상의 회통을 어떻게 이루었는지, 이를 토대로 나라사랑의 민족사상을 어떻게 구현하였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라고 연구 의도를 밝힌다. 먼저 이고은은 김교신의 『성서조선』에서 나타나는 글의 특성으로 “유교적 한자어의 개념이 일부 전환되는 것이 발견된다”고 보았다. 즉 기존 한자어가 가지고 있는 유교적, 전통적 의미를 성서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사례를 ‘불초’, ‘효/불효’, ‘성(聖)’등에 대한 언어 사용에서 찾아 볼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들 전통적인 유교적 어휘들이 김교신에게 있어서 기독교를 만나면서 ‘수양에 의한 자기완성’의 전통적 도덕 개념이 ‘자아를 포기하고 죄인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경지를 힘써 증언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유영모의 경우 자신의 동시대인, 최병헌과 김교신 같은 유학자-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사상을 수용할 때 한국어를 그대로 습득하여 그들의 사상을 구현했던 반면, 다석은 이러한 어휘의 근본 의미를 따진 뒤 우리말로 연결하여 그 숨겨진 뜻을 소화해 내고자 하였다. 즉, 다석 자신의 말대로 ‘지화(知化)’를 시도함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로써 다석이 ‘언어유희를 통한 이중의미 부여’라는 창의적 접근을 통해 “그 어휘가 갖는 소리에 걸맞은 또 다른 의미를 새로 부여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표현을 창출해 냈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고은은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사유하였던 두 인물, 김교신과 유영모가 남긴 글들을 되새길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평한다. 김교신의 경우 전통사상에서는 인의(仁義)를 주목하며 역사 속 위인들의 삶(정몽주 등의 사육신과 이순신, 강감찬)과 구약의 예언자들을 숭상하였으며 이처럼 유학적 소양을 가진 이들의 글에서 유교와 기독교가 만나 어떻게 접목되는지, 텍스트에서 나타나는 그 사상적 전환을 고찰하는 과정은 흥미로우며 중요하다고 보았다. 한편 유영모의 경우 그가 죽기로 예언했던 날, 1956년 4월 26일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죽음을 체험하였다. 그의 육적 생명이 끝나고 영적 생명의 말숨이 터져 나와 ‘제소리’를 풀어내게 되었다. 이 계소리-제소리는 다석이 외부로부터 수용된 기독교 사상을 성령 체험을 통해 나의 신앙으로 고백하고서 그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적 자원인 유교, 도교, 불교의 사상을 횡단하는 가운데 그 만의 독특한 사상으로 무르익어 우리 말과 글로 구현되어 나온 것이라고 평한다. 이상의 두 인물의 어떠함을 치밀한 잣대로 분석하면서 이고은은 결론적으로 “민족과 나라의 정체성이 불안정했던 시대에 외부에서 수용된 사상의 정수를 이해하는 한편, 우리에게 있는 사상적 자원의 정수 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면서 이 둘을 접붙여 우리 말과 글로 풀어낸 두 사람의 글쓰기를 나라 사랑이 구현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고 글을 맺는다. 이제 상기의 공동 연구를 통해 두 인물이 남긴 보고(寶庫)라는 원석을 여러 각도에서 다듬어 나름 보다 선명한 빛깔을 내 놓은 결과물은 독자들의 읽기의 지평으로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하의 두 인물이 펼쳐낸 ‘민족의식과 나라 사랑’의 숨결은 혹자들이 기대한 것처럼 어떤 열혈투쟁이나 비분강개의 두 주먹으로 불끈 쥐어지는 통쾌함과는 일정한 간극이 있다. 김교신의 경우, 근래 세간에 회자되는 소위 ’친일‘이라는 주홍글씨를 씌우는 잣대를 굳이 들이대면 그의 생애 막바지에 일제의 전쟁범죄와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는 시설에 근무했다는 이유 만으로도 어쩌면 정죄의 대상이 될 수 도 있다. 유영모의 경우는 세속과의 만남을 거의 자제하면서 초야에 묻혀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영위하는 기인과 같은 풍모로 보다 선명하게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 그들의 삶과 의식이 남긴 면면은 그 어떤 독립 투쟁의 양상 보다 더 큰 울림을 남기고 있다는 점을 논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루하루 신(神) 앞에서 주어진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일상을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얼핏 도드라지지도, 들내지도 않게 들린다. 그러나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그 일상의 힘이 바로 진정한 민족의식을 깨우고 진정한 독립의 자강 역량으로 이어지는 소중한 동력임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얼핏 상호 관련성이나 영향력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았던 두 인물에 대한 동일한 주제의 연구도 공동연구자들의 조심스러운 원전읽기라는 작업을 통해서 그 실체가 드러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김교신은 유영모를 늘 스승의 반열에 놓고 깊이 존경하였으며, 유영모는 김교신을 자신의 분신과 같은 마음으로 아끼고 존경했다. 서로 다소 다른 색깔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꿈꾸며 함께 걸었던 동지애적 걸음걸음에는 그 상이함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 아쉬웠던 점은 후대에 워낙 큰 영향을 남긴 커다란 봉우리와 같은 인물을 다룸에 있어서 그 이해의 길목에 놓여있는 수많은 코스를 단지 극히 일부의 구간만을 탐등할 수 있었던 점이다. 이제 이로 인해 혹여 소위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우를 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향후 이같은 아쉬움은 후학들 혹은 후속의 연구를 통해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
||
참고문헌 | □ 손용택의 ‘김교신과 유영모의 삶의 지향과 시대정신’ 국내 서적 김흥호, 『다석일지 공부』1권, 솔, 2001. 노평구 엮음, 『김교신 전집 1』, 부키, 2002, , 『김교신과 한국』, 제일출판사, 1975. 다석학회 엮음, 『다석강의』, 현암사, 2006. 류영모/박영호 풀이, 『다석 마지막 강의』, 교양인, 2010. 박영호, 『다석전기』, 교양인, 2012. 박찬규 엮음, 『김교신 : 거대한 뿌리』, 익두스, 2011. 함석헌, 《씨알마당》 9호(1983. 10. 29.) 『성서조선』 성서조선사, 1932, 「지도와 신앙」, 『성서조선』42호 ---, 1934, 「조선지리소고」, 『성서조선』62~72호. ---, 1936, 「졸업생에게」, 『성서조선』87 ----, 1933, 「축 졸업」, 『성서조선』51 ----, 1938, 「교육의 고민」, 『성서조선』111 ----, 1940, 「우리를 이용하라」, 『성서조선』132 ----, 1936, 「입학시험광경」, 『성서조선』87 ----, 1940, 「저녁찬송」, 『성서조선』139 논문 강경상, 1993, 김교신의 민족교육 이념연구; 도산 안창호와 비교하여,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강돈구, 1996, 다석 유영모의 종교사상(1), 한국학, 19(4), 188-191. -----, 1997, 다석 유영모의 종교사상(2), 한국학, 20(1), 235-244. 권정화, 1990, 최남선의 초기 저술에서 나타나는 지리적 관심; 개화기 육당의 문환운동과 명친 지문학의 영향, 응용지리, 13, 성신여자대학교 한국지리연구소, 1-34. 고진호, 2017, 다석 유영모의 영성관과 우리말 사상에 내포된 사람됨의 의미, 교육사상연구, 31(4), 1-21. 김국향, 1992, 김교신의 생애와 사상에 나타난 민족이념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김용복, 2010, 김교신의 무교회운동 재고; 그 목표와 한계, 성경과 신학 54권, 215-231. 김정곤, 2012, 한국 무교회주의의 초석 김교신의 유교적 에토스에 대한 고찰, 퇴계학논집 10호, 215-231. 김찬홍, 2015, 다석 유영모의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서의 신 이해와 Robert C. Neville의 존재론적 신 이해 비교 연구, 한국조직신학논총 41호, 315-332. 김인국, 2009, 진리의 버드나무 다석 유영모, 신학전망 167호, 249-254. 김재영, 2013, 윌리엄 제임스의 회심이론을 통해 본 다석 유영모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6호, 195-211. 노평구(편), 1975, 김교신과 한국; 신앙.교육.애국의 생애, 김교신전집 간행위원회, 경지사 류대영, 2019, 복음적 유자(儒者); 김교신의 유교적-기독교적 정체성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50호, 25-34. 박정신, 김교신의 문화수용적 기독교와 문화변혁적 기독교 연구, 성경과 신학 54권, 221-233. 백소영, 2015, ‘윤리적 인간’의 경계, 존재의 숨구멍; 본회퍼와 유영모의 사상을 중심으로, 기독교사 회윤리 32호, 85-121. 박만규, 2010, 김교신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 성경과 신학 54권, 218-233. 박신배, 2006, 김교신의 선비신학, 한국문화신학회 논문집 9권, 133-148. 박정환, 2017, 칼 융의 사상과 다석 유영모 사상의 비교분석, 종교연구 77(1), 65-73. ----, 2014, 다석 유영모의 ‘회심’ - 윌리엄 제임스의 시각을 반영하여, 종교연구, 74(2), 153-173. 박홍규, 2016, 김교신과 우치무라 간조 – 무교회운동의 한일간 교류, 일본사상 30호, 131-143. 백소영, 2013, 근대 전환기 식민경험과 다석 유영모의 ‘탈’의 정체성,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6호, 193-211. 서동은, 2012, 성스러움의 존재사건 그리고 궁핍한 시대의 사상가, 철학과 문화, 제25권, 156-169. 손정욱, 2004, 김교신의 교육관 연구,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송인창, 2011, 다석 유영모의 주역관, 철학 106호, 29-44. 신상형, 2013, ‘성도’개념의 정립을 위한 시론 – 유영모의 <씨알 사상>을 차용하여, 로고스경영연구, 11(4), 157-163. -----, 2014, 유영모를 통한 기독교 철학의 모색; 한국인의 주체적 사색을 제안하며, 철학논총 75(1), 123-135. 양현혜, 1994, [윤치호와 김교신-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아이덴티티와 기독교], 한울. 우치무라간조(내촌감삼), 1894(명치30년), [지리학고], 경성사서점. 윤홍기, 2011, 땅의 마음, 서울:사이언스북스, 170-176. 이은숙, 2005, 김교신의 조선지리관 – 반도정체론 극복을 위하여, 애산학보 31권, 123-141. ---, 1996, 김교신의 지리사상과 지리학 방법론; ‘지리학소고’를 중심으로, 문화역사지리 8, 37-51. 이철호, 2020, 유영모의 영성론과 그 기원 – 생명, 숨, 성령, 동방학지 192호, 1-23. 연창호, 2017, 김교신의 전통사상 인식 - 유학 이해를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 68호, 256-267. 임희숙, 2005, 김교신의 민족교육과 기독교, 신학사상 28권, 251-284. 유달영, 1974, 애국자로서의 김교신, 나라사랑, 17, 김교신 선생 특집호, 외솔회 윤석빈, 2005, 다석 유영모와 마틴 부버의 관점에서 본 사이존재로서의 인간, 동서철학연구 38호, 359-363. 전인수, 2012, [김교신 평전; 조선을 성서위에], 춘천: 삼원서원 ---, 2017,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 – 조선혼과 조선심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47호, 249-254, ---, 2018, 김교신의 일기 연구; 삶에 대한 그의 철학과 그 구현 형태, 신학논단(2018-01 92), 290-311. ---, 2015, 김교신의 장개석 인식 연구, 신학논단 제81호, 315-326. ---, 2016,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최태용의 비교회주의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45호, 236-243. 정양모, 1993, 다석 유명모 선생의 신앙, 종교 신학연구 6권, 465-476. 정호영, 2005, 김교신의 인간화교육 사상, 교육철학 27권, 302-315. 조너선 펜비/노만수 옮김, ‘장제스 평전’(서울: 민음사, 2014), 275, 313. 최인식, 1995, 다석 유영모의 그리스도 이해; 그리스도 유일성과 다원성의 만남, 종교연구 11호, 219-232. ---, 2004, 다석 유영모의 영과 몸의 신학 - <다석 어록>을 중심으로, 신학과 선교, 제30권, 423-434. 허도화, 2018, 예언자적 설교자로서의 김교신 이해 – 성서조선을 중심으로, 신학논단(2018-01 92), 293-311. Guyot, A., 1860, Carl Ritter : An Adress to the American Geographical and Statistical Society, Prinston, N.J., Privately Printed. ---, 1949, The Earth and Man : Lectures on Comparative Phisical Geography in Its Relation to the History of Mankind, Boston : Gou;d & Lincoln. Max, R., 1981, Carl Ritter(1779-1850), ed. by T. W. Freedman, Geographers biobiblogtaphical Studies, Vol. 5, Mansell Publishing Limited. 인터넷 이상국, ‘김교신이 죽자, 자신의 죽을 날을 정한 류영모’,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2)”, 아주경제, 2020/06/20, https://www.ajunews.com/view/20200622095017265, 2020/10/03 읽음. , ‘누가 바보새였나’,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7), 아주경제, 2020/07/27, https://www.ajunews.com/view/20200717100058601, 2020/10/04 읽음 , ‘신의 저녁콜이 왔다, 다석(多夕)의 비밀’,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4)”, 아주경제, 2020/07/06, https://www.ajunews.com/view/20200706085907789, 2020/10/04 읽음 박영호, ‘(10)날마다 한치씩 나아간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아주경제, 20109/12/30, https://www.ajunews.com/view/20191229155719607, 2020/10/04 읽음. , ‘세기의 벽두에 서서 묻다, 나는 무엇인가’,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 아주경제, 2019/12/18, https://www.ajunews.com/view/20191218085507941, 2020/10/04 읽음, □서신혜의 ‘김교신과 유영모의 민족생각, 그 문학적 접근’ 강돈구, 「다석 류영모의 종교사상 (1)」, 『정신문화연구』65,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다석 류영모의 종교사상 (2)」, 『정신문화연구』66, 한국학중앙연구원, 1997. 강선보, 「만남의 교육가 김교신: 부버의 <만남>의 교육철학에 토대한 김교신 해석」, 『인성·감성교육』1-2, 한국인성감성교육학회, 2019. 권주영, 「한국어교사 대상 한국 전통문화교육 수업모형 개발-‘우리말 뜻풀이를 통한 한국 전통문화 읽기’」, 『국제한국언어문화학회 18차 추계 학술대회자료집』, 국제한국언어문화학회, 2014, 김교신, 『100년 전에 보낸 온 수필-김교신의 100년 전 생각과 철학 에세이』, 유페이퍼, 2016. , 『생명의 계단』, 범우사, 2008. , 『성서조선』, 누리미디어 편, 전자책, 2013. / 김학균 역, 『김교신 수필선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7.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성서조선』(색인포함 전 8권), 홍성사, 2019. 김미라, 「한국 문인들의 韓愈 ‘送窮文’ 변용 창작 試論」, 『중국산문연구집간』9집, 2019, 69-94쪽. 김정환, 『김교신-그 삶과 믿음과 소망』, 한국신학연구소, 2016. , 『성서조선 명논설집』, 한국신학연구소, 2003. 김흡영, 『가온찍기』, 동연, 2013. 김흥호, 『제소리』 , 풍만, 1983. 김희헌, 「류영모와 민중신학-한국적 범재신론과 실천적 수행종교」, 『신학연구』67, 한신대학교 한신신학연구소, 2015. 노평구, 『김교신과 한국』, 제일출판사, 1972. 엮음, 『김교신전집』(전7권), 부키, 2002. 다석학회 엮음, 『다석 강의』. 교양인, 2016. 민병덕, 『문장모범-디지털 시대에 더욱 필요한 우리 135인의 명문장』, 정산미디어, 2010. 박규홍, 「다석 류영모의 시조 연구」, 『시조학논총』22, 2005. 박영호, 『다석전기: 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박영호, 『깨달음 공부 - 다석 사상으로 찾는 참삶의 길』, 교양인, 2014 , 『다석전기: 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박재순, 『다석 류영모: 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철학자』, 홍성사, 2017. , 「다석 류영모의 평화와 사상-국가주의적 폭력의 해체와 민주 평화 사상의 확립」, 『통일과 평화』10-1호, 2018, 121-159쪽. 박정환, 「다석 류영모의 ‘회심’-윌리암 제임스의 시각을 반영하여-」, 『종교연구』74, 2014. 배요한, 「다석 류영모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에 대한 신학적 비판」, 『신학논단』73, 2013. 서신혜, 「류영모 사상 원류로서의 소설 귀남과 수남」, 『한국문학과 예술』35, 숭실대 한국문학과 예술연구소, 2020.9, 67-96쪽. , 「김교신 수필 연구: 우언 활용과 관련하여」, 『한국문학과 예술』37,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21, 185-213쪽. 신동원, 「조선말의 콜레라 유행, 1821-1910」, 『한국과학사학회지』11-1, 한국과학사학회, 1989, 심의용, 「초월로의 충동과 씨알에 의한 자치-한국에서의 50,60년대 도가 연구 류영모와 함석헌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37, 한국동서철학회, 2005, 심일섭, 「다석 류영모의 종교다원사상과 토착신앙」, 『기독교사상』39, 1993. 안수강, 「김교신의 신학 분석」, 『한국기독교신학논총』104, 한국기독교학회, 2017. 오정숙, 「류영모의 한국적 기독교」, 『조직신학논총』10, 2004. , 「류영모와 한국적 기독교」, 『한국문화신학논총』9, 2008. 류영모, 김흥호 풀이, 『다석일지 공부』(총7권), 솔, 2001. , <활발>, 《청춘》6, 1915. , <農牛>, 《청춘》7, 1917. , 『다석일지』(전4권), 홍익재, 1990. , 박영호 풀이, 『다석 마지막 강의』, 교양인, 2010. 류영모, 〈人格的 偉大한 好表現-南岡 李先生님!〉, 《동명》2, 1922 윤건희, 「多夕 류영모의 얼 그리스도론-한국적 신학의 유형으로서 多夕 류영모 신학」, 감리교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12. 윤덕영, 「多夕 柳永模와 Soren Kierkegaard의 기독교 사상 비교 연구 - 실존적 자아에 기초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이기상, 『다석과 함께 여는 우리말 철학』, 지식산업사, 2003; 이선근, 「다석(多夕) 류영모의 생명관 연구-씨ᄋᆞᆯ의 홀아키적(Holarchy) 이해를 중심으로-」, 감리교신학대학원 석사논문, 2013. 이은숙, 「김교신의 조선지리관-반도정체론 극복을 위하여」, 『애산학보』31, 애산학회, 2005. 이정배, 「기독론의 한국적 이해-아래로부터의 기독론과 얼(생명)의 기독론-」, 『한국기독교신학논총』2, 1996. ,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한국 문화신학의 미래: 류영모, 함석헌, 김흥호의 ‘불이적’(不二的) 신학 원리에 대한 일고찰」, 『한국기독교신학논총』50, 2007. , 「민족과 탈 민족 논쟁의 시각에서 본 토착화 신학-제3세대 토착화론에 대한 비판적 탐색: 에이 네그리의 《제국》과 《다중》의 비판적 독해를 중심으로」, 『신학사상』5, 2010. 이차희, 「다석 류영모의 한글시에 나타난 신과 자아의 관계적 역동」, 한국학중앙연구원 학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18. 이찬수, 「대립과 조화: 한국 불교와 그리스도교 관계의 역사」, 『종교교육학연구』19, 2004. 임희숙, 「김교신의 민족교육과 기독교」, 『신학사상』128, 한신대학교 신학사상연구소, 2005. 전인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한국기독교와 역사』45,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 『김교신-그 삶과 믿음과 소망』, 한국신학연구소, 2016. 정양모, 「다석 류영모의 예수관」, 『맘울림』5, 2004. 조성환, 『경주에 가거든-한국근대 지식인을 통해 본 경우』, 학고방, 2010. 최인식, 「다석 류영모의 그리스도 이해-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다원성의 만남」, 『종교연구』 11, 1995. 최호영, 「다석 류영모의 ‘생명’ 사상과 남궁벽의 ‘감응’의 시학」, 『문학과 환경』19-2, 문학과 환경학회, 2020. 황준필, 「다석 류영모의 한글 타이포그라피에 대하여」,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2004. □이상훈의 ‘김교신과 다석 유영모의 민족의식과 신앙적 정체성’ 1차 자료 노평구 엮음. 《김교신 전집》(전6권). 서울: 부키 출판사, 2001. 류영모(저)/김흥호(풀이), 『다석일지 공부 2』, 솔, 2001. 류영모(저)/다석학회 엮음, 『다석강의』, 현암사, 2006. 류영모(저)/박영호(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두레, 2002. 2차 자료 (국문) _____. “김교신의 ‘전적 기독교’ 신앙과 그의 기독교 사상.” 《한국기독교교와 역사》 35(2011): 109-40. _____. 《김교신 평전: 조선을 성서 위에》. 춘천: 삼원서원 출판사, 2012. ______,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모시는 사람들, 2009. ______,「십자가와 참말을 모시고 산 류영모의 영성기독교사상」,『기독교사상』, 제504호, 2000, 39-52쪽. 가지 노부유끼(저)/김태준(역), 『유교란 무엇인가』, 지영사, 1995. 강지연, 「Daseok’s Thought and Daoist Thought」, 『동서철학연구회』, 제49권, 2008, 241~61. 김균진, 『헤겔 철학과 현대신학』, 대한기독교 출판사, 1980. 김승혜·김성례, 『그리스도교와 무교』, 바오로딸 출판사, 1998. 김용복, 「사회참여의 관점에서 본 김교신의 「성서조선」 운동」, 『조직신학연구』, Vol. 10, 2008, 306~35쪽. 김용복. “사회참여의 관점에서 본 김교신의 《성서조선》 운동.” 《조직신학연구》 10 (2008): 306-55. 김은섭. “김교신의 역사의식.” 철학박사, 연세대학교, 2004. 김정환. “김교신 연구: 교육적 측면을 중심으로.” 석사논문, 고려대학교, 1973. 김지찬,「박형룡의 성경관과 한국 장로교: 김재준과 벌인 성경관 논쟁을 중심으로」,『한국개혁신학』, Vol. 21, 2007, 67~107쪽. 김흡영,『다석 류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 가온찍기』, 동연, 2013. 김흥호,「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 미출판 저자 친필 자료. 박규환. “김교신 (1901∼1945) 생애와 사상.” 《새가정》 606(2008): 50-3. 박영호,『다석전기: 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 1》.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박재순, 『다석: 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류영모』, 현암사, 2009. 박정환,「다석 류영모의 ‘회심’-윌리엄 제임스의 시각을 반영하여-」,『종교연구』,제74권, 제 2호, 2014, 145~82쪽. 박찬규 엮음. 《김교신 거대한 뿌리》. 파주: 익두스 출판사, 2011. 양현혜.《윤치호와 김교신: 근대소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터티와 기독교》. 서울: 한울출판사, 1994. 엄원식, 『히브리 성서와 고대근동문학의 비교연구』, 한돌출판사, 2000. 오지원. “김교신의 신앙 연구.” 철학박사, 백석대학교, 2009. 오토컨버그(저)/이재훈·박동원(역), 『인격장애와 성도착에서의 공격성』,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08. 윤덕중/반재원(저), 『훈민정음기원론』, 국문사, 1983.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사상의 철학사적 의미」,『인문학연구』, 제4권, (1999), 1~34쪽. 이동철,「동아시아의 종교 전통과 한국의 주체적 기독교 수용」,『인문사회과학연구』, 제12권, 2005. 221~36쪽. 이상훈, 「구한말 미 개신교 선교사들의 대한(對韓)인식: 1884년부터 1919년까지를 중심으로」, 강돈구 편,『근대의 형성과 종교지형의 변동 I』, 성남: 한국학 중앙연구원 출판부, 2005, 79~103쪽. 이어령. “한국문화와 세계문화.” 《연세대 연신원 목회자 하기세미나》 17 (1997): 233-37. 이정배, 「기독론의 한국적 이해」,『한국조직신학회』, 제 2 권, 1998, 201~24쪽. 전인수.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 그 의미, 구조와 특징,” 《한국기독교교와 역사》 33(2010): 163-90. 정준기. “김교신 사상 연구.” 《한국기독교연사연구소소식》 6(1991): 11-4. 정현아. “버나드 로너간의 비판적 형이상학의 의미.” 《한국종교학회》 14(2005): 95-105. 조현아, 「성명학의 작명원리에 있어서의 오행연구-훈민정음해례본과 현재 작명법에 적용되는 한글오행의 비교연구-」, 공주대학교 석사논문, 2014. 최병학, 「M. 테일러의 해체 신학과 흔적의 윤리성」, 박사학위 논문, 부산대학교, 2005. 최은정, 「훈민정음 창제원리에 나타난 음양오행사상을 형상화한 실험적 한글 서체 개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논문, 2010. 폴 틸리히(저)/유장환(역), 『조직신학 I』, 한들출판사, 2001. 황준필, 「다석 류영모의 한글 타이포그라피에 대하여」,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2004. 2차 자료 (외국어) Avishur, Y. Studies in Biblical Narrative: Style, Structure, and the Ancient Near Eastern Literary Background (Jerusalem: Graphit Press, 1999), 13-4. Avishur, Yitzhak, Studies in Biblical Narrative: Style, Structure, and the Ancient Near Eastern Literary Background, Tel Aviv: Archaeological Center Publication, 1999. Bergner, P. The Sacred Canopy: Elements of a Sociological Theory of Religion. New York: Doubleday Press, 1969. Buldulia, Joseph and Others. “Thin and Thinner: Hypothesis-driven Research and the Study of Humans.” Numen 61 (2014): 186-211. Childs, B. S., Biblical Theolog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Fitzgerald, Timothy, The Ideology of Religious Stud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Foster, John W., American Diplomacy in the Orient, Boston: Houghton, Mifflin & Co. Press, 1904. Fox, Andrew. “Topic Continuity in Biblical Hebrew Narrative.” In Topic Continuity in Discourese: A Quantitative Cross-Linguistic Study. Ed. T. Givón. Amsterdam: John Benjamin Press, 1983. Geller, Stephan, Parallelism in Early Biblical Poetry, Chicago: Scholars, 1981. Griffins, William Elliot, Corea: The Hermit Nation,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Press, 1882. Harris, Robert, Discerning Parallelism: A Study in Northern French Medival Jewish Biblical Exegesis, Providence, Rhode Island: Brown Judaic Studies, 2004. James, William, The Will to Believe and Other Essays in Popular Philosophy, London: England, 1979. Jung, Chung Ki. “Social Criticism in Non-Church Christianity in Uchimura Kanzo and Kim Kyo-Shin.” Ph.D. diss., Chicago University, 1988. Kim Chongsuh, “The Concept of ‘Korean Religion” and Religious Studies in Korea,“ Journal of Korean Religions, Vol. 1~1&2, 2010, pp. 23~41. Kotze, R. “The Circumstantial Sentence-A Catch-Them-All Term? A Study in Sentence Relationship in 1 Samuel 1-12,” Journal of Northwest Semitic Language 15 (1989): 109-26. Kristeva, Julia, In the Beginning Was Love, trans. A. Goldhamm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7. Kugel, James, The Idea of Biblical Poetry: Parallelism and Its Histor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1. Lambrecht, K. Information Structure: Topic, Focus and the Mental Representations of Discourse Referen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Lonergan, Bernard. Method in Theology. Toronto: Toronto University Press, 1971. Myers, Gerald E., William James: His Life and Though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6. Park, Myoung-Woo, “Building a Local Christian Theology in the Context of Korean Religious Pluralism: A Critical Analysis of the Theology of Ryu Yongmo (1890-1981),” Ph.D. diss., Edinburgh University, 2001. Peck, S. In Search of Stones: A Pilgrimage of Faith, Reason, and Discovery. New York: Hyperion Press, 1995. Pitzgerald, Timothy, The Ideology of Religious Stud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_____, “Playing Language Games and Performing Rituals: Religious Studies as Ideological State Apparatus,” Method and Theory in the Study of Religion, Vol. 15, No. 3, 2003, pp. 209~54. Segal, R. A. and D. Wiebe, “Axioms and Dogmas in the Study of Religion,”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Vol. 57, No. 3 (1989), pp. 591~605. Segal, Robert A. and Wiebe, “Axioms and Dogmas in the Study of Religion,”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Vol. 57, 1989, pp. 591~605. Smart, Ninian, “Beyond Eliade: the Future of Theory in Religion,” Numen, Vol. 25, No. 2, 1978, pp. 171~83. Taylor, M. Erring.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1. _________. After God.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2007. Taylor, Mark C., Erring: Postmodern A/Theology,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1. _____, Journeys to Selfhood: Hegel & Kierkegaard, Los Angels: California University Press, 1980. Thomas, R. “Virgil’s Georgics and the Art of Reference.” In Reading Virgil and His Texts; Studies in Intertextuality. Ed. Richard F. Thomas. Ann Arbor, Michigan: Michigan University Press, 1999. Tremlett, P. “Re-Cognizing the Mind in the Anthropology of Religion.” Numen 58 (2011): 545-65. Von Stuckrad, Kocku, “Discursive Study of Religion: Approaches, Definitions, Implication,” Method & Theory in the Study of Religion Vol. 25, No. 1, 2013, pp. 5~25. Wendland, Ernst, “The Discourse Analysis of Hebrew Poetry,” Discourse Perspectives on Hebrew Poetry in the Scriptures, Wendland, Ernst, ed., New York: United Bible Socities, 1994, pp. 1~27. Westerink, H. “Participating and Giving Ultimate Meaning: Exploring the Entanglement of Psychology of Religion and Phenomenology of Religion in the Netherlands. Numen 57 (2010): 186-211. □이고은의 ‘김교신과 유영모의 어휘사용에 나타나는 민족의식’ 김정환. 『김교신-그 삶과 믿음과 소망』. 한국신학연구소, 1994. 김흥호. 『제소리』. 풍만, 1983. 김흥호. 『다석일지 공부』 1,2권. 솔출판사, 2001. 노평구 엮음. 『김교신 전집』. 부키, 2001. 다석학회. 『다석강의』. 2006, 현암사 류대영. 「복음적 유자: 김교신의 유교적-기독교적 정체성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0권, 2019. 미조구치 유조 외 엮음. 김석근 외 역. 『중국사상문화사전』. 책과함께, 2011. 박경미 외. 『서구 기독교의 주체적 수용: 류영모, 김교신, 함석헌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박재순. 『다석 류영모-동서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철학자』. 서울: 홍성사, 2017. 심일섭. 「다석 류영모의 종교다원사상과 토착신앙」. 『기독교사상』 39, 1993. 양현혜. 「김교신의 ‘전적 기독교’ 신앙과 그의 기독교 사상」. 『한국기독교와 역사』. 35 2011. _____. 『윤치호와 김교신: 근대소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터티와 기독교』. 서울: 한울 출판사, 1994. 연창호. 「김교신의 전통사상 인식」. 『동양고전연구』 제69호 (2017.09.30.) 오정숙. 「류영모와 한국적 기독교」. 『한국문화신학논총』 9, 2008.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이정배. 「다석 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한국 문화신학의 미래: 류영모, 함석헌, 김흥호의 ‘불이적’(不二的) 신학 원리에 대한 일고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50, 2007. ______. 「기독론의 한국적 이해-아래로부터의 기독론과 얼(생명)의 기독론-」. 『한국기독교신학논총』 2, 1996. 이차희, 「다석 류영모의 한글시에 나타난 신과 자아의 관계적 역동」. 한국학중앙연구원 학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18. 임희숙, 「김교신의 민족교육과 기독교」. 『신학사상』 128권, 2005. 전인수. 「김교신의 일기 연구: 삶에 대한 그의 철학과 그 구현 형태」. 『신학논단』 92,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2018. ______.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이해: 조선혼과 조선심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4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 최영근. 「근대 한국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 관계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4, 2017. *온라인 자료: 성서조선 홈페이지. http://www.biblekorea.net/ 2020년 10-12월 접속. |
전체 연구결과 요약 | |
---|---|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유영모의 [다석일지] 및 관련자료들의 분석을 통한 민족의식과 나라사랑에 대한 연구결과를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손용택은 김교신(1901-1945)과 유영모(1890-1981)의 삶의 지향과 시대정신을 살폈다. 1901년생인 김교신은 유교 가풍에서 자라 일제강점기간 일본유학중 무교회주의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의 종교 강의를 다년간 듣고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유학동지들과 『성서조선』 발간을 시작하고 무교회 운동의 초석을 마련한 기독교계의 지도자이다. 지리박물학 전공 후 양정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성서조선』에 발표한 「조선지리소고」는 그의 지리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근대지리학 맥을 잇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일제의 ‘반도정체론’을 논박하는 훌륭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성서조선의 여타 기고내용들과 함께 가난한 조국 동포들에게 용기와 꿈을 북돋워 주었다. 그는 식민지하 교육 현실을 고민했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답사반을 조직해 학생, 지인들과 고적답사와 등산을 하는 등 참교육의 실천장으로 삼으며 틈틈이 민족혼을 불어넣었다. 독실한 그는 ‘조선을 성서위에, 성서는 조선독립을 위해’ 라는 정신적 자세를 공고히 했다. 유영모는 육의 눈으로 망국의 처절한 과정을 지켜보며, 내적성찰의 영적 눈으로 신의 존재를 궁구했다. 그는 4교(유. 불. 도. 기)의 경전을 섭렵하며 동서양의 종교를 융합, 회통해 낸 걸출한 종교철학자로 후학들에 의해 조명받는다. 지구인을 자처하고 주역 연구에도 심취해 광대무변의 우주공간(=‘빈탕한데’)과 자연의 섭리를 통찰하며 우주의 본질을 어두움(=검玄)으로 읽어냈다. ‘검‘은 곧 신, 하나님으로 통하고 이는 우리말의 ’곰’ 또는 ‘감’과도 통한다. 오산학교 교장시절 함석헌을 제자로 맞고, 함석헌은 김교신을 소개한다. 신의 임재를 자연의 변화와 섭리 속에서, 무한한 우주공간을 응시하면서, 그리고 기도를 통한 마음속 성령 충만한 가운데 확인할 있음을 확신했다. 톨스토이와 간디의 영향을 받아 땀 흘려 일하는 농심을 사모하여 40대 중반에 정릉 구기리(현재 종로구 구기동)로 이사해 전원에서 직접 농부생활로 구도의 길을 겸한다. 항상 걸어 다니고, 무릎 꿇고 정좌생활하며, 칠성판을 대신해 널판지 잠자리로 매일 밤 죽음을 연습하는 탈속적 기인생활을 했다. 하루 한끼 식사를 고집해 ‘다석(多夕)’이라는 호를 얻었다. 22세 이후 교회를 떠나 무교회주의 신앙생활을 했으며 교회의 대속신앙과 교의신앙에 회의를 품기도 했다. 인간은 사(死)후 영과 육의 분리를 믿어 부귀다남과 족보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뜻을 따르고 계승하는 정신자세를 강조했다. 서신혜는 김교신과 유영모가 남긴 문학을 살펴서 우리 민족을 향한 그들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밝혔다. 김교신이 남긴 <경주에서>, <포플라나무 예찬>, <병상담편>, <제소와 패소> 등 글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점을 밝혔다. 김교신은 ‘성서’를 중심으로 한 참 ‘종교 신앙’을 붙잡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대하고 영원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우리 전통 글쓰기 기법의 하나인 우의(寓意)의 방식을 사용하여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글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그는 종교지도자 뿐 아니라 민족 운동가이며, 수필문학가로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서신혜는 유영모가 ‘일제강점기’에 《청춘》 등의 잡지와 일간지 및 『성서조선』에 남긴 글들의 시간과 유영모 개인의 사상 흐름을 분석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밝혔다. 「나의 一.二.三.四.」, 「활발」, 「귀남과 수남」 등에 주목하여, 유영모는 고차원적 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런 각 개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등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성찰을 그의 문학에 드러내었음을 밝혔다. 특히 그는 죽음에 관한 성찰을 깊이 하였는데, 그 결과 오히려 죽음을 앞둔 한 개인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이 절대자 앞에서 어떤 것인지 등에 관한 철저한 성찰로 이어져 궁극적으로는 하루하루의 삶을 더 충실히 살게 만들었다는 점 등을 그의 글을 통해 밝혀냈다. 이상훈은 「김교신과 다석 유영모의 민족 의식과 신앙적 정체성」 제목으로 분석했다. 먼저 기존연구들의 연구 방법론들을 검토하고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연구동향은 김교신의 인생과 삶의 역정을 검토하되 주로 연구자들이 ‘중시하고자하는’ 각각의 관점에서 김교신을 묘사하였음을 발견한다. 그 결과 ‘민족주의자 혹은 ’애국적 독립운동가‘등의 개념적 틀에 갇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점을 염두에 두면서 연구를 통해 인식론적 선제적 선입견을 제거하고 ’빈마음‘으로 김교신의 삶을 관조하고자 시도하였다. 아울러 다석 유영모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동일한 방법론이 적용되었다. 다석 유영모에 대한 이해 역시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남긴 글을 통하여 그 내밀함을 파 들어가는 작업으로 다가서고자 하였다. 결과, 이상훈은 김교신과 다석의 삶의 족적을 조망하되 핵심적 ’삶의 자리 (sitz im leben)’를 조심스럽게 언급하면서 여타 부차적 삶의 여정들을 과감히 뛰어넘는 글쓰기를 지향한다. 김교신의 경우, ‘회심사건의 함의’ ‘성서와 조선-두 세계를 향한 갈망’ ‘조와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조국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일상’이라는 얼개를 통해 김교신의 내밀함을 드러내 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유영모의 경우 그가 남긴 많은 시(詩)들 중에서 특히 한글시에 주목하면서 이들 시에서 핵심적 주제인 ‘그 이’ 그리고 ‘무른’ ‘부른’ ‘푸른’의 세계를 소개한다. 특히 ‘무른’을 ‘님을 향한 그리움’ ‘부른’을 ‘가슴에 품 안은 님’ ‘ 그리고 ’푸른‘을 ’사랑하는 님을 넘어서‘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시행과 한글시의 어의의 중첩성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교신은 인간 내면의 신앙에 충실하되 그 내면의 인식에 기초한 고뇌를 삶의 현장이라는 외연으로 드러내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소개한다. 아울러 유영모는 그 누구보다도 방대한 종교적-신학적 성찰과 그 결과물을 쏟아 내었지만 그 스스로 신학자, 또는 철학자로 연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 서고자 했던 구도자였다고 정의한다. 이고은은 김교신과 유영모의 우리말 어휘사용을 통해 민족사상의 분석을 시도했다. 김교신과 유영모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의 문화와 가치관이 실종되는 가운데 일본의 지배 아래 서구의 근대사상과 문물을 수용하는 과도기였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며 사유했던 두 인물, 김교신과 유영모가 남긴 글을 되새길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들의 글을 통해 민족과 나라의 정체성이 불안정했던 시대에 외부에서 수용된 사상의 정수를 이해하는 한편, 우리에게 있는 사상적 자원의 정수 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면서 이 둘을 접붙여 우리 말과 글로 풀어낸 두 사람의 글쓰기를 민족 사상이 구현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먼저 김교신의 글에서는 유교적 전통 개념을 담은 한자어가 기독교 가치관으로 인해 의미가 전환되는 사례로 ‘불초(不肖)’, ‘효(孝)’, ‘성(聖)’을 살펴본다. 또 유영모에게서는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매우 예외적으로 우리말 어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특성이 발견되므로, 그의 글쓰기를 ‘언어유희를 통해 이중의미 부여,’ ‘한자어의 음차표기 대신 순우리말로 번역’하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이들의 글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어휘 사용 방식을 통해 전통 사상과 기독교가 어떻게 접목되어 민족 사상으로 구현되는지, 그 양상을 드러내고자 했다. 8. 김교신과 유영모의 삶의 개관 네 사람의 전공이 각기 다른 공동 연구자는 대주제인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유영모의『다석일지』를 통해서 본 ‘민족의식’ 연구”제하에 약간씩은 각기 다른 시선과 초점을 가지고 김교신의『성서조선』과 유영모의 『다석일지』 및 관련 자료와 문헌 분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네사람의 공동 연구진 모두가 반드시 알고 참고해야 할 것은 김교신과 유영모 두 사람의 ‘삶의 개관’을 통한 그들의 생애사적 배경이므로 간략하게라도 반드시 살피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김교신(金敎臣) 김교신의 삶에 대해서는 노평구 엮음, 『김교신전집』(전7권), 부키, 2002; 김정환, 『김교신-그 삶과 믿음과 소망』, 한국신학연구소, 2016에 자세하여, 비교적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 김염희(金念熙), 어머니 양신(楊愼) 사이에 태어났고, 남동생으로 김교량이 있다. 김교신의 나이 3살에 아버지가 폐병으로 사망하였으나,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로 엄격한 유교적 분위기 가운데 어려서부터『논어』 등 한학을 공부하였다. 13살이었던 1912년에 4년 연상인 한매와 혼인하여 진술, 시혜, 정혜, 정옥, 정복, 정애 등 딸 여섯과 정손, 정민 등 아들 둘을 낳았다. 1919년에 김교신은 함흥보통학교와 함흥농업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일에 협력하였는데, 숙부의 집에서 불온물이 발견되면서 문제가 되어 김교신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처음에는 영문학을 전공했다가 나중에 지리·박물학과로 전과하였다. 1920년에는 동경 우시고메에서 노방전도를 받아 결신하여 같은 해 6월에 세례를 받았다.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사상에 크게 매료되어 7년간 그의 강연을 듣고 우치무라 성서연구회에 출석하기도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유학하던 송두용(宋斗用), 유석동(柳錫東), 정상훈(鄭相勳), 함석헌(咸錫憲) 등도 함께 우치무라의 강연을 듣고 나중에는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도 하였다. 1927년 졸업 후 귀국하여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개성 송도중학교 등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우리나라의 여러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며 교육하는 일도 하였다. 가장 오래 근무한 학교는 양정고등보통학교(10년 근무)이고 다른 학교에서는 잠시 있었다. 1935년에 제자 유달영에게 권하여『최용신 소전』을 쓰게 하기도 하였다. 김교신은 교직에 몸담은 동안, 그리고 평생을『성서조선』발간에 힘썼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인 1927년 7월부터 ‘조선성서연구회’를 함께 했던 이들과 월간 잡지『성서조선』을 창간, 발간하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함께 하던 이들이 각종 사정으로 흩어지자 1930년 5월호부터는 김교신이 홀로 잡지의 발간을 담당했다. 유영모, 김정식, 이광수, 이승훈, 함석헌 등 당시 석학들, 민족지도자들과 깊이 교류하며 때로 그들의 글을 잡지에 실어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친한 친구였던 함석헌에게서 유영모 선생을 소개받은 이후부터는 유영모와 오래도록 교제하였다. 김교신의 집이 있었던 정릉에서 유영모의 집이 있던 구기동까지 자주 걸어다니며 교제하였고, 유영모도 김교신을 특히 아껴서 김교신이 죽은 날을 기점으로 자신의 죽을 날로 삼기도 했다. 김교신은 또 경성성서연구회를 개최하여 성서를 연구하고, 그 내용을『성서조선』에 연재했다. 나중에 이를 모아『산상수훈연구』등 여러 책으로 발간하였다. 그림 김교신 옛집. 성북구 정릉로 17길 15. 현재 ‘한국 순교자의 소리(VOM)’(대표 에릭 폴리&현숙 폴리 목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교관련 문헌 출판 등을 겸하고 있어서 사전에 허가받은 사람만 방문할 수 있다. 2020년 7월 답사 시 촬영. 『성서조선』에 대한 일본의 감시로 인해 경찰에 자주 불려다니며 주의를 받고 잡지 내용의 일부를 삭제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42년 3월, 잡지에 실은 <조와>를 빌미로『성서조선』이 강제 폐간당하고 관계자들이 투옥되었는데, 이를 일명 ‘성서조선사건’이라 한다. 이때 발간자인 김교신은 물론이요 거기에 글을 실은 필자들, 정기구독자들이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지만 미결수로 1년여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44년 7월부터 함경남도의 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하여 서본궁공장에 강제 징용당한 한국인노무자를 위한 숙소관리 담당자로 일했다. 그곳 노동자들을 위해 애쓰다가 당시 공장에 돌던 전염병인 발진티푸스에 걸려 1945년 4월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유영모(柳永模) 그의 삶에 대해서는 박영호, 『다석전기: 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다석일지』(전4권), 홍익재, 1990를 살펴보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는 1890년 3월 서울에서 아버지 유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호가 다석(多夕)이다. 26세 되던 1916년에 김효정과 결혼하여 아들 의상, 자상, 각상, 딸 월상, 3남 1녀를 낳았다. 유영모는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가 15세인 1905년에 당시 YMCA 총무였던 삼성 김정식의 전도로 연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경신학교에 다녔다. 20살 때인 1910년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으로 오산학교 교사로 있었다. 오산학교에서 함께 교사로 있던 신채호, 여준, 이광수와도 교분을 쌓았다. 그러다 1912년, 두 살 아래 동생 유영목이 죽어 큰 충격을 받았다. 같은 해 일본으로 유학 가서 10개월만에 학교를 졸업하지는 않고 돌아왔지만 이 기간동안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강연을 들었다. 28세 되던 1918년부터 자신이 삶을 산 날 수를 하루하루 세어가면서 생활을 했고, 이런 특성은 그의 사상을 배우고 싶어 했던 제자들에게 이어지기도 했다. 31세 되던 1921년에는 고당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1년 정도 재직하였다. 이 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 오산학교 학생이었던 함석헌을 만났다. 함석헌은 이후 자주 여러 사람에게 유영모를 소개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영모는 1910년대 후반 이후 육당 최남선, 정인보, 문일평, 현상윤 등과 교유하며 잡지 《청춘》, 《동명》 등에 글을 싣기도 하였다. 최남선의 권유로 남강 이승훈의 간략한 전기를 남기기도 했고, 삼성 김정식과 호암 문일평 선생의 사후 조문도 유영모가 썼다. 류영모, 〈人格的 偉大한 好表現-南岡 李先生님!〉, 《동명》2, 1922; 류영모, 〈故三醒金貞植先生〉, 『성서조선』100, 1937.; 류영모, 〈湖岩 文一平兄이 먼저 가시는데〉, 『성서조선』124, 1939. 별다른 직장이 없는 유영모를 걱정하던 아버지 유명근의 강권에 따라 유영모도 솜 공장인 경성제면소를 몇 년간 운영하였다. 하지만 평소 시골에서 농사하며 살고 싶다는 뜻을 자주 비치다가, 1935년(45세)에 아버지의 탈상을 마친 뒤로 적성동의 집과 사업을 정리하여 고양군 은평면으로 이사하였다(현재 종로구 구기동 150). 38세이던 1928년에는 창주 현동완의 주선으로 YMCA 연경반(硏經班) 지도를 시작하여 약 35년 정도 강의를 계속하였다. 1942년(52세) 성서조선 사건 때에 이 잡지의 투고자이자 정기구독자라 하여 종로경찰서에 약 두 달 정도 구금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아내와 해혼(解婚)을 선언한 후 오누이처럼 살았다. 또 이때부터 평생 1일 1식을 하며 널빤지에서 자는 생활을 하였다. 그림 남원시 대산면 소재 동광원 본원에 있는 이현필선생기념관. 내부에 유영모 선생의 사진, 유영모 선생이 평소 강의했을 때 쓴 <주기도>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2020년 8월 답사 시 촬영. 그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있는 이현필 선생 묘소. 벽제에는 이현필선생 100주년기념헌신관이 있고, 몇몇 수도자가 헌신관 밑에서 지금도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2020년 7월 답사 시 촬영. 김교신이 죽은 1945년 4월 26일을 기준으로 하여 유영모는 자신의 죽을 날을 1년 뒤로 정해놓고 죽음을 준비하며 맞이하는 기간으로 삼았다. 1948년(58세) 당시 36세였던 맨발의 수도자 이현필(1913-1964)을 만난 후, 이현필을 중심으로 하는 남녀 독신 수도사의 공동체 동광원과 계속 연을 맺었다. 이현필과 동광원의 수도(修道) 운동은 기독교계 금욕운동의 하나로 분류되며,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영모는 1981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유영모는 유가는 물론이요, 도가나 불가 등까지 동양철학에 해박한 것으로 유명했고, 수학과 별자리를 좋아했다. 남긴 글로는 단편 기고문 외에 미터법을 해설한 책 『메트로 要項』(1928년)이 있고, 『노자』를 우리말로 독창적으로 번역하여『늙은이』(1959년)라는 제목을 붙여냈으며, 『다석일지』를 영인 출간하면서 4권 부록으로 『메트로 要項』 등 류영모가 쓴 모든 책과 단편 글을 모아놓았으므로 여기에서 모든 글을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쓴 일기 『다석일지』가 있다. |
|
세부과제별 요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