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구분 | 한국학기초연구 / 공동연구과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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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코드 | |||
연구과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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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 오강원 | ||
공동연구자 | 한수영, 이성주, 김일규, 박진일 | ||
연구기간 | 20200101 ~ 20201216 | 연구형태 | 공동연구 |
연구목적 및 배경 | 초기 철기시대의 사회문화 변동에 관해서 그동안 한국 고고학계에서 다각도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철기시대 개시기를 즈음해서 물질문화의 전반적인 변동이 시작되며, 그 변화는 동북아시아 일원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또한 철기시대는 물질자료에 나타난 변화를 기록된 역사와 맞추어 볼 수 있는 시대였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에서도 기록에 입각한 실질적인 연구가 풍성해지는 시기이다. 다시 말해서 철기시대의 개막은 기록된 역사적 사건과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변화를 대응시켜 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초기 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연구에서는 새로이 등장하여 각 지역에서 기존의 문화를 대체해간 개별 물질문화의 변동에 관해 관심을 집중해 왔다. 그간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점토대토기 및 세형동검(한국식동검) 유물군, 전국계 철기 등과 같은 특정 유물군의 등장이나 분묘의 구조와 부장품, 주거의 형태, 그리고 취락의 양상 등에 나타나는 변화에 연구자들이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특정 유물군의 변화를 지역 단위로 분석하고 그 기원지를 추정하는 정도의 설명에서 그친 느낌이 있다. 이를테면 한반도 안의 일정 지역에서 점토대토기군이나 세형동검유물군의 출현과 변화를 서술하고 그 계보를 요령지역에서 찾는 연구를 반복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기존 시도가 모두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 동북지역으로부터 한반도 남부에 이르는 제 지역의 변동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려는 시도는 생각보다 적었다. 동북아 역사시대 개시기의 변동이라는 관점에서 광범위한 공간적 변화를 설명하고 다음 시기의 역사-지리적 구도가 마련되는 과정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이다. 이 공동연구는 철기시대를 전후하여 엘리트의 묘제에 어떤 변화가 지역적으로 전개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이전의 시도와는 달리 공간-시간적 과정을 확장하여 봄으로써, 기존의 고고학적 접근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초기 철기시대 이전 엘리트 묘제의 가장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는 묘역식 지석묘의 출현과정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중국 동북 지역으로부터의 변화가 삼한지역 관·곽묘의 출현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비교 분석한 연구를 통해 선사와 역사가 물질적 양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러한 물질문화와 사회 변동이 지역적으로 여러 층차를 보이며 전개되었다는 것도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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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방법 및 내용 | 이 공동연구에서는 주로 아래의 세 가지 점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첫째는 토착 묘제 발전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그동안 초기 철기시대 묘제의 연구에서는 한반도 안의 일정 지역 안에 새로운 묘제의 출현과 변천을 서술하고 그 기원을 요녕 지역에서 찾는 연구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토착 사회의 묘제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하였고, 새로운 묘제는 어떠한 맥락에서 토착묘제와 공존하다 대체되어 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게 시도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는 연구책임자인 오강원이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춘천분지 묘제를 다루면서 주로 다루었다. 둘째는 신묘제 수용과 지역적 전개에 대한 신 시각이다. 초기 철기시대를 전후하여 한반도, 제 지역에서 확인되는 물질문화의 변화는 이전 시기와는 너무나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30년 동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조사 자료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이전 송국리문화기의 전통적인 문화요소와 점토대토기의 신 물질문화가 같은 시기, 같은 지역, 그리고 같은 유구 안에서도 공존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갔다. 어떤 시대에 관해서건 새로운 시대의 변동을 설명할 때 변화된 물질문화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제 지역의 맥락, 전통적인 것, 혹은 토착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물질적인 양상이 그대로 유입되는 요소도 있지만, 토착 사회의 전통에 의해 변형되기도 한다. 수용되는 지역이 인구의 공백 지대가 아니라면, 그 어떤 신기술이나 새로운 물질문화도 수용되는 지역의 사회문화적 맥락, 토착 사회의 전통적 기술이나 관념에 의해 변형되고 혼종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은 제 지역의 물질문화 변동을 설명하고 지역-간의 차이를 설명할 때 매우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특히 공동연구원 한수영은 1960년대 말 대전 괴정동 유적의 조사 보고 이후 점토대토기를 부장한 세형동검묘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가는 가운데 마한 지역과 진·변한 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가 기존의 송국리문화와 공존하다 교체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였고, 박진일과 김일규는 경주와 김해 등지의 물질 현상을 통해 밝히고자 하였다. 셋째는 중원 묘제의 수용과 토착사회 엘리트 분묘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령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에까지 이르는 광역에서 오랫동안 점차적으로 관곽의 확산과 정착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초기철기시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2세기 중후엽의 대형 목곽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 내지(중원) 묘제의 확산과 수용의 중층적 과정은 토착 사회 엘리트의 매장의례가 형성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간 이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은 거의 시도된 적이 없다. 이러한 문제는 공동연구원 이성주가 주로 다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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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물 세부 목차 |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춘천분지 묘역식지석묘의 발생과 종언(오강원) I. 머리말 II. 선사시대 춘천분지 무덤의 획기와 편년 III. 춘천분지 묘역식지석묘의 발생과 쇠퇴 IV. 맺음말 분묘 구조로 본 마한과 진·변한 묘제의 전통과 개성(박진일) I. 머리말 II. 선행 연구와 연구의 범위 III. 韓·馬韓과 辰韓·弁韓의 구분과 분기 IV. 韓·馬韓과 辰韓·弁韓의 분묘 분석 V. 삼한 묘제의 전통과 개성 VI. 맺음말 만경강유역 송국리문화와 점토대토기문화의 공존과 변화-중상류역 점토대토기유적을 중심으로-(한수영) I. 머리말 II. 송국리문화와 점토대토기문화의 공존과 변화 III. 사회구조의 변화-각 단계의 논의점을 중심으로 IV. 맺음말 세형동검 문화기 낙동강하구 유역 무덤 연구(김일규) I. 머리말 II. 세형동검 문화기의 무덤 III. 세형동검 문화와 한식 문물의 유입 배경 및 무덤의 구조와 변용 IV. 무덤의 구조를 통한 변한의 시점과 영역 V. 맺음말 동북아 토착사회의 관․곽묘 수용: 韓의 목관․목곽묘 수용과 그 역사적 의의(이성주) I. 머리말 II. 목관묘의 출현과 확산 III. 목곽묘의 출현과 의의 IV. 맺음말 *목차는 장제목까지만 예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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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결과 |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춘천분지 묘역식 지석묘의 발생과 종언」(오강원) 춘천분지의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묘제를 주구석관묘와 묘역식지석묘로 양대분한 뒤, 이 가운데 묘역식지석묘가 서북한의 대평리형과 묵방리형 묘역식지석묘가 교체되는 시기 서북한의 영향을 받되 춘천분지 집단이 지역의 문화적(묘제적) 전통과 환경에 맞추어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지역화함으로써 출현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춘천분지의 경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점토대토기문화기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데, 기원전 1세기 중엽까지 전통적인 묘역식지석묘가 약간의 구조 변화를 보이며 그대로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분묘 구조로 본 마한과 진변한 묘제의 전통과 개성」(박진일) 청동기시대 말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남한 지역을 한과 삼한단계로 구분한 뒤, 삼한 가운데 마한은 한단계에 해당되는 괴정동유형의 군집 목관묘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반면, 진․변한의 공통 양식인 월성동유형은 괴정동유형에서 유래하였지만 문화적 계승 관계는 아직 미지수라고 보았다. 이러한 차이는 토기와 철기의 형식적인 상호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아울러 팔달동 유적은 묘제에서는 괴정동유형, 토기와 철기에서는 월성동유형, 다호리 유적은 월성동유형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만경강유역 송국리문화와 점토대토기문화의 공존과 변화-중상류역 점토대토기 유적을 중심으로-」(한수영) 만경강 중상류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송국리문화기부터 점토대토기문화기까지를 전체 4개기로 획기한 뒤, 이러한 획기안을 바탕으로 만경강 유역을 역사자료에서 언급되는 마한의 문화, 즉 마한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보았다. 아울러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송국리문화가 조성되기 시작하여 점토대토기문화가 유입되고, 이를 기반으로 청동기 제작 기술의 발달과 초기철기로 변화하는 시점에 마한 정치체의 형성과 준왕의 남래와 같은 사건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세형동검문화기 낙동강 하구 유역 무덤 연구」(김일규) 세형동검문화의 파급과 전개 과정의 관점에서 볼 때, 충청도 지역은 직접적․수동적․동시적인 반면, 낙동강 하구 유역은 간접작․능동적․점차적이었다고 하면서, 김해 지역의 경우 세형동검문화기까지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문화 지체 현상이 심하였던 곳으로 보았다. 이러한 지체 현상은 한문화의 파급 이후 급격하게 변화되었는데, 이는 낙동강 하구 유역이 지리적 특성상 한제국의 동아시아 상호관계망에 편입되어 한(낙랑)-한반도 남부-일본열도(규슈)를 잇는 관계망의 거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촉발된 것으로 보았다. 「동북아 토착사회의 관․곽묘 수용-한의 목관․목곽묘 수용과 그 역사적 의의-」(이성주) 세형동검 개시기의 목관묘를 요동 지배층의 여러 유형의 묘제 가운데 한 유형이 기원을 이루는 것으로, 한반도 최초의 단장목곽묘가 위만조선기에 출현하였으되 위만조선 말기와 낙랑군 초기 한강 유역과 경주로 일시 유입되나 지속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위만조선의 단장목곽묘는 2~3세기 아산만 일대의 목곽묘와 서해 연안 내륙 지역의 주구토광묘 매장시설의 모델이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달리 2세기 중엽 진․변한 지역에서 수장묘로 채택된 목곽묘는 낙랑의 중원계 합장목곽묘(귀틀무덤)를 모방하여 수용되었고, 이후 신라와 가야 수장층의 매장시설로 발전해 간 것으로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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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일규, 2006, 「한강 중․하류역의 중도식토기 편년소고」, 석헌 정징원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 김일규, 2011, 「봉명동유적을 통해 본 심발형토기의 출현의의」, 考古廣場 8. 박진일, 2000, 「원형점토대토기문화연구: 호서 및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호남고고학보 12. 박진일, 2002, 「기원전 3·2세기대 분묘구조 검토」, 고고학지 13. 박진일, 2007, 「점토대토기, 그리고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한국청동기학보 창간호. 박진일, 2012, 「기술적 관점에서 본 다호리 출토토기의 변천」, 동원학술논문집 13. 박진일, 2015, 「삼각형점토대토기와 전국식철기의 한반도 남부 등장 연대 고찰」, 우정의 고고학, 고손명조선생추모논문집간행위원회. 박진일, 2018, 「금호강 유역 전기 와질토기」, 금호강과 길, 국립대구박물관. 박진일, 2019, 「전기 와질토기의 변한 지역 출현과 확산 과정」, 철기시대 토기와 토기문화의 변동,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오강원, 2006, 비파형동검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문화, 청계. 오강원, 2011, 「기원전 3세기 요령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유형과 연문화와의 관계」, 한국상고사학보 71. 오강원, 2013, 「비파형동검을 통하여 본 기원전 8~7세기 요동 북부 지역 청동기 제작 기술과 지역간 기술 교류」, 호남고고학보 44. 오강원, 2014, 「요동~서북한지역 미송리형호의 지역문화와 사회문화적 함의」, 한국상고사학보 85. 오강원, 2015,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요령~한반도지역 環紐無文銅鈴(銅鐸)의 전개와 부장 맥락」, 호서고고학 33. 오강원, 2016,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춘천분지 일원 유적의 획기와 편년」, 한국청동기학보 19. 오강원, 2017, 「중국 동북지역 瓢形長頸壺의 부장양상과 확산의 배경」, 영남고고학 78. 오강원, 2017,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의 경형동기 연구」, 한국청동기학보 20. 오강원, 2019, 「동북아시아 지석묘의 표상-전통과 변형-」, 고고광장 25. 오강원, 2020, 「한국식동검문화(점토대토기문화)의 기원과 형성과정」, 한국의 청동기문화, 국립청주박물관. 이성주, 1997, 「목관묘에서 목곽묘로」, 신라문화 14. 이성주, 2000, 「분구묘의 인식」, 한국상고사학보 20. 이성주, 2014, 「저장제사와 성찬제사」, 영남고고학 70. 이성주, 2017, 「지석묘의 축조중단과 초기철기시대」, 영남문화재연구 30. 한수영, 2011, 「만경강유역의 점토대토기문화기 목관묘 연구」, 호남고고학보 39 ※참여 연구자 논저 일부만 제시 |
전체 연구결과 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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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본 공동연구팀에서는 지역과 시기, 그리고 문제 의식의 성격에 따라 다섯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책임연구원과 4인의 공동연구원이 각각 5개의 소주제를 분담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다섯 가지 연구주제는 첫째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춘천분지 묘역식 지석묘의 발생과 종언”, 둘째 “분묘 구조로 본 마한과 진변한 묘제의 전통과 개성”, 셋째 “만경강유역 송국리문화와 점토대토기문화의 공존과 변화”, 넷째 “세형동검문화기 낙동강 하구유역 무덤 연구”, 다섯째 “동북아 토착사회의 관․곽묘 수용”이다. 각 연구 결과의 주요 내용과 의미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
세부과제별 요약 | |
「청동기~초기 철기시대 춘천분지 묘역식 지석묘의 발생과 종언」(오강원) 춘천분지의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묘제를 주구석관묘와 묘역식지석묘로 양대분한 뒤, 이 가운데 묘역식지석묘가 서북한의 대평리형과 묵방리형 묘역식지석묘가 교체되는 시기 서북한의 영향을 받되 춘천분지 집단이 지역의 문화적(묘제적) 전통과 환경에 맞추어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지역화함으로써 출현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춘천분지의 경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점토대토기문화기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데, 기원전 1세기 중엽까지 전통적인 묘역식지석묘가 약간의 구조 변화를 보이며 그대로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분묘 구조로 본 마한과 진변한 묘제의 전통과 개성」(박진일) 청동기시대 말기와 초기 철기시대의 남한 지역을 한과 삼한단계로 구분한 뒤, 삼한 가운데 마한은 한단계에 해당되는 괴정동유형의 군집 목관묘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반면, 진․변한의 공통 양식인 월성동유형은 괴정동유형에서 유래하였지만 문화적 계승 관계는 아직 미지수라고 보았다. 이러한 차이는 토기와 철기의 형식적인 상호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보았다. 아울러 팔달동 유적은 묘제에서는 괴정동유형, 토기와 철기에서는 월성동유형, 다호리 유적은 월성동유형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다. 「만경강유역 송국리문화와 점토대토기문화의 공존과 변화-중상류역 점토대토기 유적을 중심으로-」(한수영) 만경강 중상류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송국리문화기부터 점토대토기문화기까지를 전체 4개기로 획기한 뒤, 이러한 획기안을 바탕으로 만경강 유역을 역사자료에서 언급되는 마한의 문화, 즉 마한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보았다. 아울러 청동기시대 중기부터 송국리문화가 조성되기 시작하여 점토대토기문화가 유입되고, 이를 기반으로 청동기 제작 기술의 발달과 초기철기로 변화하는 시점에 마한 정치체의 형성과 준왕의 남래와 같은 사건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세형동검문화기 낙동강 하구 유역 무덤 연구」(김일규) 세형동검문화의 파급과 전개 과정의 관점에서 볼 때, 충청도 지역은 직접적․수동적․동시적인 반면, 낙동강 하구 유역은 간접작․능동적․점차적이었다고 하면서, 김해 지역의 경우 세형동검문화기까지 매우 보수적이면서도 문화 지체 현상이 심하였던 곳으로 보았다. 이러한 지체 현상은 한문화의 파급 이후 급격하게 변화되었는데, 이는 낙동강 하구 유역이 지리적 특성상 한제국의 동아시아 상호관계망에 편입되어 한(낙랑)-한반도 남부-일본열도(규슈)를 잇는 관계망의 거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촉발된 것으로 보았다. 「동북아 토착사회의 관․곽묘 수용-한의 목관․목곽묘 수용과 그 역사적 의의-」(이성주) 세형동검 개시기의 목관묘를 요동 지배층의 여러 유형의 묘제 가운데 한 유형이 기원을 이루는 것으로, 한반도 최초의 단장목곽묘가 위만조선기에 출현하였으되 위만조선 말기와 낙랑군 초기 한강 유역과 경주로 일시 유입되나 지속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위만조선의 단장목곽묘는 2~3세기 아산만 일대의 목곽묘와 서해 연안 내륙 지역의 주구토광묘 매장시설의 모델이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달리 2세기 중엽 진․변한 지역에서 수장묘로 채택된 목곽묘는 낙랑의 중원계 합장목곽묘(귀틀무덤)를 모방하여 수용되었고, 이후 신라와 가야 수장층의 매장시설로 발전해 간 것으로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