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성철스님의 책』과 『풍계집』, 성철스님과 환적스님의 만남을 기약하며

이용윤 사진
이용윤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조교수
해인사 백련암의 불면석, 성철사상연구원 제공

해인사 백련암의 불면석, 성철사상연구원 제공


7월 초, 장대비를 뚫고 해인사 백련암에 도착했다. 텃밭을 낀 돌계단을 걸어올라 백련암에 들어서자, 김창흡(1653-1722)의 발길을 붙잡고 성철스님(1912-1993)을 주석하게 했던 불면석(佛面石)이라 불리는 바위가 우리를 맞이했다. 무너질 듯 비스듬히, 그렇지만 단단하게 서 있는 불면석의 기세는 20년 전 인사동 전시장에서 마주했던 뒷짐을 진 성철스님의 뒷모습에서 본 빳빳하게 날 선 승복의 강한 필선과도 같았다.


성철스님 진영,1994년, 김호석 그림, 성철사상연구원 제공

성철스님 진영, 1994년, 김호석 그림, 성철사상연구원 제공


해인사 백련암은 1605년 서산휴정의 제자인 소암대사가 창건하고 1608년 사명유정이 기와를 올린 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스님이 주석하며 정진하는 가야산 최고의 수행처다. 지금은 성철스님의 제자인 원택스님과 그의 문도가 거주하고 있다. 원택스님 처소에는 김호석 화백이 수묵으로 그린 성철스님의 상반신 진영이 북벽 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8년 장좌불와(長坐不臥) 후 수척한 얼굴에,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눈빛이 살아있는 이 진영은 성철스님 뒷모습 진영과 더불어 현대 고승 진영의 백미로 손꼽힌다. 담소는 자연스레 성철스님 진영에서 스님이 소장했던 고문헌을 정리해 최근 동국대 불교학술원에서 간행한 『성철스님의 책』으로 이어졌다.


우연이었을까? 함께 자리한 동국대 불교학술원의 김종진 교수가 『성철스님의 책』과 함께 『풍계집(楓溪集)』도 발간했다는 말을 전했다. 『풍계집』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1711년 간행한 풍계 명찰(1640-1708)의 시문집이다. 그리고 이 빗길을 뚫고 우리가 백련암을 방문한 이유는, 풍계 명찰이 행장을 짓고 승탑을 세워 추모했던 스승 환적 의천(1603-1690)의 진영을 실견(實見)하기 위해서였다.


환적의천 진영, 1749년, 혜식 그림

환적의천 진영, 1749년, 혜식 그림


환적 의천은 14세에 금강산 정양사에서 편양 언기를 배알(拜謁)하고 인가를 받았다. 그는 평생 명산을 편력(遍歷)하며 수행 정진하였고, 가는 곳마다 암자를 세우고 각종 불사(佛事)를 하였다. 스님 생전에 원불(願佛)로 조성한 오대산 진여원 문수보살좌상(1660)과 봉암사 마애미륵불좌상(1663)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돼 있다. 1681년 환적 의천은 자신의 임종처로 가야산을 선택하고 1687년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했다. 스님은 백련암에 머물면서 처소 창 앞의 천삭동석(天削動石), 즉 불면석을 항상 마주하며 마음을 바로잡고 천년(天年)을 기다리다 1690년 입적하였다.


『풍계집』에는 환적 의천이 입적하고 진영을 모신 단(壇)에서 사리가 분신하는 영험(靈驗)이 기록돼 있으나, 현전하는 해인사 백련암 환적 의천의 진영은 그로부터 59년 뒤인 1749년에 화승(畵僧) 혜식이 다시 그린 것이다. 비록 이모본(移模本)이지만 골격이 만져질 정도로 마른 얼굴에 검푸른 피부, 흰 눈썹 아래의 형형한 눈매, 그리고 가사 장삼 밖으로 드러난 마른 몸을 꼿꼿이 세우고 결가부좌한 스님의 형상엔 31년간 풀 자리를 깔고 벽곡(辟穀) 수행을 한 선승의 삶이 온전히 스며들어 있다.


진영 친견을 마치고, 우리는 성철스님의 수행과 스승을 추모하는 원택스님의 마음이 300년 전 환적스님과 풍계스님의 관계와 닮았다는 말을 백련암 문도에게 올렸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환적스님과 성철스님의 두 진영을 마주 모시고 중앙에 『풍계집』과 『성철스님의 책』을 둔 특별전을 여시라는 마음도 전했다.


이후 다시 『풍계집』을 읽으면서 불현듯 그날 백련암 불면석의 시간 속에 환적스님과 성철스님, 그리고 우리가 잠시나마 함께 자리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