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야구를 이야기하는 한국학자, 김은식 야구칼럼니스트

차세대 한국학자를 꿈꾸는 한국학대학원에서 야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팬들에게 그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야구작가' 김은식 선생을 만나보았다.


김은식 사진

야구작가로 알려져 있어요. 관련책도 많이 내셨는데 어떻게 작가로 활동하게 되셨나요?


오랜 야구팬이었고, 2003년에 첫 책을 낸 뒤로는 이런저런 글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에 어느 인터넷 매체에 야구에 관한 에세이를 한 편 썼는데, 그걸 본 cbs 라디오 피디가 ‘매주 한 명씩 추억의 야구선수를 소개하는 방송을 해보자’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저도 야구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서 처음엔 고사하다가 ‘가볍게 해보자’는 설득에 넘어가서 시작했는데, 그 준비 과정에서 야구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또 공부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난 뒤에는 수집된 자료와 방송 내용을 바탕으로 매주 글 한 편씩을 써서 인터넷 매체를 통해 포털(네이버, 다음)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도서사진

그 당시, 2006년은 한국야구의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 연간 관중 규모도 지금의 1/3 수준이었고, 아시안게임 결승진출 실패로 야구에 대한 관심도 많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야구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도 없다시피 했구요. ‘현재 야구’보다는 ‘과거 야구’에 대한 향수가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제 글이 매주 포털 메인 면에 배치되면서 백만 건 이상의 조회수와 2~3만건 이상의 댓글이 달리며 화제를 모으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국 2년 넘는 기간 동안 100회 이상 연재한 끝에 그 원고들은 3권의 책으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 작업을 토대와 계기 삼아 야구인들에 대한 인터뷰 기회가 늘어났고, 몇몇 구단들과 공식적인 협업 기회도 얻게 되면서 야구 작가 혹은 야구 칼럼니스트로 알려질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뒤에 출간한 열 권 이상의 야구 관련 도서와 야구 관련 방송 출연 등도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야구 작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강연 및 인터뷰 모습

강연 및 인터뷰 모습

석사과정 때 지도교수님(故 박영은 교수님)께서 늘 저에게 하셨던 말씀들이 있습니다. “너는 공부를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글 못 쓰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리고 “이건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다.”

‘그럼 논문 말고 에세이를 쓰지 뭐’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벼운 주제로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칼국수 먹으면 아버지 생각이 나고, 사과 깎을 때 어머니가 생각났거든요. 그렇게 음식과 사람 엮은 글을 올리니 댓글도 많이 달리고 반응이 좋았어요. ‘오마이뉴스’에서 30여 편을 연재했어요. 제가 쓴 글들이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돼서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출판사에서 함께 책을 내보자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아마도 지도교수님께서 끊임없이 글쓰기에 대해 지적하고 자극해주셨던 점, 그리고 늘 야단은 치셨지만 엉망인 저의 글에 함부로 칼질하지 않고 묵묵히 읽고 또 읽으면서 어떻게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풀어내는 힘을 키워주셨던 점, 그리고 제가 쓴 글을 스스로 무수히 반복해서 읽고 고칠 기회를 만들어주신 점 등이 결국 글쟁이로 살아가는 자산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석사과정을 마무리하면서 기숙사 퇴실을 위해 준비할 때 논문을 준비한 글이 몇 보따리가 나올 정도로 쓰고 읽고 고치고를 반복했던 날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거죠. 지금도 참 아쉽고 죄송스런 부분이 그 해에 지도교수님이 폐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제 첫 책을 영전 앞에서 보여드릴 수 밖에 없게 되었던 점입니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박사과정 입학’보다는 ‘생활비 벌이’에 나서게 됐습니다. 논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글 쓰는 일을 병행했는데, 2003년에 첫 책을 내게 되고 2006년에 낸 책(<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이 비교적 널리 읽히면서 꾸준히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그 뒤로도 글을 쓰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 제가 주로 하는 일이 됐습니다. 2009년 무렵부터 학원 일은 그만두었지만, 교육청이나 학교, EBS같은 곳에서는 논술강의도 꾸준히 해왔고 서울시에서 성인들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대중 스포츠인 야구와 한국학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사람의 개성을 이해할 때 그 사람의 취미나 특기, 생활문화가 중요한 힌트를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그 사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성격 역시 그 구성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구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종목이면서, 유독 한국인들만 즐기는 것입니다. 특히 야구는 1904년에 도입됐고 1970년대 중반부터 ‘국민스포츠’의 위상을 얻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현대 한국사회가 형성된 중요한 시기들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야구를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왜 좋아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면 그 시기를 통해 형성된 오늘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그 대목에 대한 설명하는 것이 제 박사학위논문의 목적인데 이제 슬슬 구체적인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한국학대학원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가장 많은 외국인과, 가장 많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서,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공과 국적 상관 없이 모든 학생들이 어떤 질문이든 할 수 있었고, 교직원이나 행정직원들과도 호형호제할 수 있는 아주 독특한 공간이었습니다. 그 때 함께 입학했던 다른 전공의 동기들이나, 그 때 만나서 친해진 외국인 친구들과는 아직도 교류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1998년에 석사과정을 마치고 20년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이전과는 달리 그 관계가 많이 엷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학생과 직원들이 서로 이름을 기억하고 인사를 주고받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같은 학생들끼리도 전공이 다르면 소통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도 있을 테고, 눈에 두드러지는 아쉬움 못지않게 그 이면에서 생겨난 장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워낙 다양하고 유익한 인적 자원들이 서로 고립되어 활용되지 못한다면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계기를 통해 서로 좀더 친해지고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학자 및 관련 연구자들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김은식 사진

최근 연구과제를 위해 역사 속의 야구장을 찾아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야구장이 잠실, 고척 등 여러 곳에 있는데 일제시대에는 경성야구장, 50년대에 실존했던 용산육군구장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언제까지 운영되고 언제 그 기능을 상실했는지 궁금하여 여러 방법으로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20년대의 기록은 자세히 남아있는데 60~80년대의 기록은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거죠. 이 시기에 대한 논문이 나오고 논의의 영역이 생기면 '야구'라는 분야도 하나의 학문적인 형태로 기록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야구에 대한 에세이를 써왔다면 이제는 논문을 써나가야겠죠.^^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학’이라는 범주 안에서는 문화적인 ‘원형’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원형’ 못지 않게 ‘변형’과 그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십여 년 이상 끌어안고 있는 ‘야구’라는 주제도 굳이 말하자면 최근 100여 년 사이에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변형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 역시 한국학이라는 시야에서 배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품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최근에 ‘유물/사료’로 분류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디지털 방식의 축적과 보존이 이루어지지도 못하는 애매한 시기 애매한 영역의 것들 (대표적으로 1970~80년대 야구에 관한 아날로그식 기록들) 이 매우 빠르게 소실되어가고 있는데, 그것들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적절한 보호가 가능해지게 하는 데는 한국학자들의 관심과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sew@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