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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이 땅의 문화를 찾아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전국 230개 시·군·구 지역의 다양한 향토문화 자료를 발굴․수집, 연구․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이를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 통신 매체를 통해 서비스하며, 이용자가 또 새로운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순환형 지식정보시스템을 구축하는 대규모 문화 콘텐츠 편찬사업입니다. 이는 그간 미진했던 전국의 향토문화 자료의 보존 및 계승의 대책 마련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지역문화 정리사업의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는 사업으로서, 지식·문화산업의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간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국 향토문화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Tip.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이란? 디지털제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바로가기 태백선과 충북선 부설은 주변 지역의 개발, 나아가 한국 경제 개발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 주력을 기울였던 것이 에너지원의 확충과 기간산업 확충,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분산, 고립되어 있던 지역을 하나로 연결해서 서로 융합을 이루는 효과를 가져왔다. 철도를 통해 영서 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과 인근 쌍룡과 단양에서 생산된 시멘트와 비료 등을 다른 지역으로 효율적으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제천은 중앙선·충북선·태백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고도성장 시기의 경제 개발 계획을 가능하게 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제천 지역에는 중앙선 쪽으로 제천역 외에 구학역·봉양역·고명역이 있었고, 충북선과 이어지는 공전역이 있었다. 태백선상에도 장락역·송학역·입석역이 총총히 들어섰다. 도로가 아직 충분히 정비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제천의 발전과 이 철도는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3. 철도의 개량과 제천 조차장의 건설 이후 급속히 증가하는 물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철도의 전철화 내지 복선화 사업도 진행되었다. 1968년 태백선의 전철화, 1980년 충북선의 복선화가 완료되었고, 1988년에는 중앙선의 제천~영주 구간이 전철화되었다. 이는 수송 능력이 현저히 증가하는 것을 의미했기에 물류 기지로서의 제천의 중요성은 더욱 배가되었다. 1971년의 제천역 신축이나 1982년의 대규모 증축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사진] 제천 조차장 전경 한편, 철도와 관련한 중요한 시설로서 조차장이 건설되었다. 조차장은 철도에서 객차나 화차의 분리·연결을 조절․편성하는 정거장을 말한다. 제천 조차장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태백 지구 개발에 따라 폭주하는 물류를 감당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964년에 시작되어 1970년에 마무리되었는데, 1960년대 중반 1일 포용 능력[화차를 세울 수 있는 능력] 306량, 조차 능력이 1,224량이었던 것을 포용 능력 1,440량, 조차 능력 4,380량으로 늘리기 위한 것으로 인근의 15만 평[0.50㎢] 부지에 건설되었다. 이로써 당시 최대의 조차장이 제천에 마련되었고, 제천역 조차장에서는 화차를 분리하고 연결해주며 태백선 화물을 충북선과 중앙선 열차에 연결해 줄 뿐 아니라, 제천에서 기차를 타면 중앙선, 태백선, 충북선을 따라 강원도와 충청북도, 경상북도까지 닿을 수 있다. 이 시설을 통해 무연탄과 시멘트, 그리고 각종 산물이 우리나라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화물의 증가에 따라 조차장의 규모는 1980년대 중반에 다소 증설되었다. 4. 철도에 따라 변모된 도시 철도의 정비에 따라 지역 사회에는 엄청난 변화가 밀려들었다. 철도가 놓이면서 물길은 급속도로 쇠퇴하였고, 철도와 관련한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들어섰다. 단양과 제천, 그리고 영월 쪽에 들어선 시멘트 공장은 제천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되면서 인구가 많이 증가했고, 여러 종류의 유통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영서 지역의 광산 지대에서 풀려 나온 현금이 제천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사진] 제천의 시멘트 공장 1964년의 산업별 인구 조사는 철도가 들어온 이후 제천읍을 중심으로 한 변화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당시 제천 지역 인구는 14만 9279명이었는데, 제천읍의 경우 산업별 인구 구성이 다른 지역과는 현저히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즉, 취업 인구의 37%만이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52.3%가 3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1차 산업과 3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전국 평균값이 71.6%와 24.5%였던 것과 비교된다. 철도 이용자의 숫자도 뚜렷하게 증가했다. 1960년에 연간 승차객의 수가 71만 2689인이었는데, 1969년에는 109만 7275명으로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것이 1980년에는 164만 4745명에 이르고 열차 승객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인 1991년에는 169만 1915명에 이르렀다. 결국, 1990년대 초에는 제천역에서 열차에 오르고 내린 사람의 수가 하루 평균 1만 명 가까이 되었던 셈이다. 물론, 제천 관내의 봉양역, 공전역 등을 이용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더 많았다. 그야말로 제천은 철도에 의해서 움직이는 도시였던 셈이다. 이 무렵 제천 지역 읍세는 이웃의 어느 지역보다 왕성한 모습을 보였다. 도시 지역에서 생산된 물자는 제천을 통해 영서 지역을 포함한 내륙 지역으로 이동했고, 지하자원을 비롯한 산간 지역 생산물은 제천을 통해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제천에서 보내고 받아들인 화물도 1980년에는 발송한 화물이 83만 6877톤, 도착한 화물이 7만 5046톤으로서, 총 159만 1974톤이나 되었다. 이는 1960년에 발송한 화물이 7만 1040톤, 도착한 화물이 8만 6376톤으로 총 15만 7416톤에 불과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사진] 1970년대 중앙 시장 입구 더불어 제천은 유통 상권의 중심이 되었다. 1990년대 말까지 충북선, 중앙선, 태백선을 타고 멀게는 강원도 영월, 정선, 평창으로부터 주변 지역의 상인들이 들어와 장사를 하였고, 역시 물건을 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반대로 제천 지역 상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물건을 사거나 팔러 나가기도 하였다. 그 중심에는 중앙 시장이 있었다. 본래 중앙 시장은 제천역 뒤쪽 현재의 동명 초등학교 옆에서 2일과 7일에 열리던 장이었다가 점차 상설 시장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곡물을 비롯하여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에서 온 온갖 산물들이 거래되었다. 현재 제천역 부근 중앙동에는 중앙 시장 외에도 내토 시장, 역전 시장, 서부 시장, 우시장 등 여러 시장들이 모여 있다. [사진] 1980년 제천시 승격 기념 행사 이처럼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시기, 제천은 철도 교통의 요지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단양·영월·태백 등지가 모두 제천권으로 들어왔고, 인구의 증가율도 도시 지역인 청주나 충주의 그것을 넘어서면서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1980년에 제천읍이 충청북도에서 세 번째로 시로 승격한 것은 그 결과였다. 5. 철도의 비중 약화와 제천의 변화 1980년대 이후 그동안 제천의 성장을 이끌었던 철도 환경에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자동차 산업이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였고, 도로 건설과 자동차 보급률의 증가로 도로 교통이 주요 물자 수송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게다가 시멘트 산업과 석탄 산업이 사양 산업으로 여겨지면서 철도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자연히 철도 이용객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1991년 정점에 이르렀던 철도 이용객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특히 2001년에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감소세가 더욱 뚜렷해졌다. 2001년 제천역에서 탑승한 승객이 104만 2375명을 기록한 이후 다시는 100만 명을 넘지 못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면서 2009년은 60만 5949명으로 최저점에 이르렀다. 그 결과 관내 역들의 운행시간, 업무 조정이나 폐쇄 등이 이어졌다. 한편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제천시는 충청북도 북부 지역 교통의 요지로서 재도약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중앙고속도로 외에도 원주와 단양 간 국도 5호선, 충주와 단양 간 국도 36호선, 충주와 영월 간 국도 38호선이 교차하면서 자동차 교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국도의 교차 선상에 있는 제천시는 자동차를 이용하여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으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었다. 이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성장해 온 제천, ‘근대화 과정’에 견인차 구실을 했던 제천이라는 도시가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음을 의미한다.
연구원 홈페이지 한국문화교류센터 Newsletter 한국학진흥사업단 Newsletter 관리자에게
「디지털제천문화대전」으로 떠나는 여행(1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표적인 전자 편찬 사업『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 중 충청북도 제천 지역 정보를 총망라한「디지털제천문화대전」을 소개합니다. [사진] 디지털제천문화대전 홈페이지 「디지털제천문화대전」(http://jecheon.grandculture.net/)은 충청북도 제천시의 디지털 백과사전으로, 제천시의 지리, 역사와 문화를 비롯해 정치·경제·사회의 발전상 등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집대성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습니다. 2010년 2월 제천시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되었으며,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앞서 2009년 4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①선행 조사 연구(충청북도 문화재 연구원)를 통해 제천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ㆍ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②원고 집필 사업(2010년 4월~2011년 3월, 충청북도 문화재 연구원), ③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 사업(2011년 4월~10월, 충청북도 문화재 연구원), 원고 윤문․교열 사업(2011년 5월~11월, ㈜휴머니타스), XML 데이터 제작 사업(2011년 5월~11월, ㈜지식공학),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2011년 6월~12월, ㈜올인텍아이엔씨)이 수행되었습니다. 2009년 4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원고 집필, 멀티 미디어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1,874개의 항목, 원고지 12,677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4,558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습니다.  
「디지털제천문화대전」에 담긴 정보와 자료들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사이트 및 지역별 사이트(제천문화대전), 대형 민간 포털(네이버, 다음, 구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천을 알아보기 위한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철도 도시, 제천의 성장 제천시는 근대 이후 철도 교통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도시이다. 중앙선·태백선·충북선이 만나는 곳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조차장이 위치한 제천시는 철도 교통의 요지이다. 근대 이전의 제천은 산으로 둘러싸여 육로 통행이 용이하지 않은 고을이었다.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훨씬 교통이 나쁜 곳이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정인지(鄭麟趾)[1396~1478]는 “지세가 가장 높은 곳”이라고 했으며, 이승소(李承召)[1422~1484]는 제천 지역을 시로 읊으면서 “톱니처럼 뾰족뾰족한 돌에 말도 발굽을 삐기 쉬운 좁은 길이 비탈을 따라 실낱같이” 통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제천의 지세는 육로로 이동하기에는 수월하지 않은 곳이었다. 실제로 제천시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의 ‘겨드랑이’쯤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겨드랑이는 비탈을 이루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높은 지대에 속한다. 대신 남한강 물길이 지역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운(水運)에서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당시 물류를 담당했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은 수운이어서, 강물이 얼어붙는 시기를 제외하면 서해안이나 서울 쪽으로부터 소금 따위를 실은 배가 끊임없이 올라왔고, 내륙에서 생산한 목재나 숯 등을 실은 뗏목이 남한강을 통해 하류 쪽으로 운반되었다. [사진] 1960년대 함암나루 [사진] 1960년대 북진나루 이러한 물길을 통한 물류의 중심을 완전히 재편한 것이 일제 강점기에 건설되기 시작한 철도였다. 물론 신작로도 새로 건설되었지만, 물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사회 변화에 미친 영향력의 크기, 경제성에서 볼 때 철도에 비길 수는 없었다. 또한 철도는 신문명의 상징이기도 했다. 1. 일제 강점기 철도의 건설 제천 지역 근처에 처음으로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20년대 말이었다. 충북선 철도가 충주까지 이르자 제천에서는 ‘제천 철도 기성동맹회’가 조직되었다. 철도를 제천까지 끌어들이려는 지역의 유력 인사들이 나선 것이다. 당시 영월이나 제천에서 재배되는 황색 연초[말린 담뱃잎]를 실어 나를 수 있고, 강원도의 무연탄을 개발할 수 있는 이점 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충북선 연장은 해방 이후에나 실현될 수 있었다. [사진] 1935년에 건립된 제천 엽연초 생산 조합 구 사옥 모습 제천 지역을 통과하는 가장 중요한 철도인 중앙선 공사는 1930년대 중반부터 착수되었다.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기초로서, 또한 강원도 지역의 지하자원을 수탈하려는 의도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6년에 철도 공사를 시작하였고, 1942년에 완성하였다. [사진] 중앙성-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부근 철도의 부설은 제천 지역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먼저 제천 지역과 강원도 일대의 지하자원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철도 개설에 따른 특수를 염두에 둔 금융 기관도 유치되었다. 철도 건설과 유지, 보수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제천 지역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제천이 이미 상당히 인상적인 ‘도시’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2. 해방 후 철도의 정비 해방 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제천 지역은 본격적으로 교통 도시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중앙선과 경부선을 횡으로 연결하는 충북선의 보완, 그리고 강원도 산간 지역으로 연결되는 태백선이 모두 제천을 중심으로 놓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사람과 물류의 이동의 주요 수단이 철도였기 때문에 중심에 있는 제천이 발전할 수 있었다. 먼저 공사가 시작된 것은 태백선이다. 1949년 말 제천~송학 사이의 철도가 완성되어 운행되기 시작했다. 6·25 전쟁으로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속개되어 1953년 가을에는 송학~쌍룡 사이가 철길로 이어졌다. 이때 개통식에는 당시의 교통부 장관까지 참석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쌍룡~연당이, 다음 해에는 연당~영월발전소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어 영월선이 이루어졌다. 이는 후에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태백 지구 종합 개발 계획에 따라 1966년 함백까지 이어지고, 이어 1973년 태백, 1975년 태백산까지 연장되면서 그 이름을 태백선이라 일컫게 되었다. 충북선 공사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경부선의 중간 역인 조치원에서 시작되어 충주까지 이어져 있던 충북선을 제천의 봉양까지 잇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1955년에 시작되어 1958년에 마무리되었는데, 이로써 중부 내륙에 위치한 제천 지역은 전국 육상 교통 체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