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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6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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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연구의 새로운 움직임” [사진] 김창겸 (비교한국학연구센터 수석연구원) 우리 연구원은 2003년에 ≪역주삼국유사≫(강인구 등)을 완간한 바 있으며, 오는 6월 26일 전통문화연구센터가 이것에 대한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잘 알듯이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와 문학, 불교사 등 다양한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 표현이 설화적 성격이 강하고 부분적으로 서지사항에 좀 모호한 점이 있어 치밀한 사료 비판이 요구되는 곳이 더러 있다. 왕력은 연표로서 말그대로 어느 왕조 왕들의 연대기이다. 실제 ≪삼국유사≫ 왕력을 보면 중국 연호(年號)를 기축으로 삼아 신라・고구려・백제・가야과 후백제・후고(구)려를 포함한 왕조들의 시조부터 마지막 왕까지 역대 왕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그리고 역대 각 왕에 대해서는 그가 해당 왕조의 몇 번째 재위한 왕으로, 성씨는 무엇이며, 언제 즉위하여 몇 년 동안을 다스렸고, 또 그의 배우자는 누구이며, 그리고 부모가 누구인지를 비롯하여 선대에 대해 두 줄의 주석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왕력의 저자와 관련하여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은 중국 남송(南宋) 멸망 이전 시기에 일연(一然)이 신라 말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요약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해방 이후에 통설이 되어 왕력은 일연의 저작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실상 왕력 제1이 ≪삼국유사≫ 9개 편목의 하나라는 점을 전제하면, 왕력이라는 편목도 일연에 의해 편성되었을 것이다. 한편 ≪연대연표(歷代年表)≫와 ≪삼국유사≫의 관계를 중시하고 일연의 저작임을 인정하면, 왕력은 1278~1289년 찬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있기도 하고. 각 왕의 재위 연수를 비교하면 ≪역대연표≫와 왕력 간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심지어 왕력의 완성시기를 ≪삼국사기≫가 편찬된 1145년 이전으로 올려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달리 왕력이 원래 독립된 책이었다가 ≪삼국유사≫의 한 부분, 즉 부록으로 더해졌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것은 왕력은 ≪삼국유사≫보다 먼저 다른 사람이 편찬된 것을 일연이 부록으로 수록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삼국유사≫는 왕력(王曆)을 필두로 기이(紀異), 흥법(興法) 등 모두 9개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왕력은 ≪삼국유사≫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전하는 어느 판본에도 ≪삼국유사≫ 전체 목차를 수록한 것이 없어서, 왕력을 서지적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왕력의 성격과 ≪삼국유사≫의 권 차례 편성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3년 초에 이른바 파른본 ≪삼국유사≫가 공개됨으로써 왕력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야 할 듯하다. 여기서 ‘파른본’이란 이 판본을 발굴하여 소정하고 있던 손보기(孫寶基) 선생의 아호 파른을 따서 붙힌 명칭이다. 파른본의 간행 시기에 대해서는 적어도 초간본(初刊本)이 아니며 조선 초기의 중간본(重刊本)이라는 정도로 보고 있다. 이 파른본의 왕력, 특히 신라에 대하여 분석한 연구결과가 최근에 발표되었다. 2013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심층연구사업’ 공동연구과제로 수행된 “≪삼국유사≫ 왕력 연구 – 파른본의 이종기사와 관련하여 -’ 결과물이 전문학술지 ≪신라사학보≫ 제30호(4월 30일 간행)에 기획논문으로 수록되었다. 이부오은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의 판본상 위치와 이표기(異表記)의 서술맥락>에서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의 판본상 위치를 파악하고 이표기의 서술맥락을 추구하였다. 우선 초간본과의 유사도를 기준으로 파른본과 석남본을 대교하였다. 그 결과 파른본이 석남본보다 상대적으로 초간본에 좀 더 가까운 요소가 있으며, 파른본·석남본의 표기 중 임신본에서 선택적으로 계승된 사례는 전체적으로 파른본이 석남본보다 우세한 편이었다고 하였다. 또 찬술 단계의 왕력은 필사본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연의 제자 무극(無極) 이후의 고려 말에 초간본이 제작되었고, 이로부터 글자의 누락·이체화·괴자화가 상당히 진행된 뒤 새로 제작된 중간본 또는 재간본이 파른본의 모본이 되었으며, 파른본은 이 모본을 바탕으로 선초까지 중간된 판본이라고 판단하면서, 다만 모본은 석남본과는 달리하며 석남본보다 앞선 판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표기의 서술맥락은 초간본을 포함해 적어도 2회 이상의 간행을 거쳐 오류화가 상당히 진행된 이후에 파른본이 출간되었음을 검증하였다. 김창겸은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왕위계승 연구>에서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을 검토하여 신라 중고기 왕실의 계보를 재구성하고, 왕위계승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우선 피른본의 신라 중고기 관련 내용을 살펴본 결과, 진덕여왕의 아버지는 국진안갈문왕(國眞安葛文王)이며, 여왕의 어머니 아니부인(阿尼夫人)의 아버지는 노각간(奴角干)인데 만천갈문왕(滿天葛文王)으로 추봉되었으며, 또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용춘각간(龍春角干)의 추봉 명칭이 문흥갈문왕(文興葛文王)이고,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문진태후(文眞太后)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고기의 왕위계승은 지증왕계의 직계장자계승을 원칙으로 하였음에도, 때로는 친족 계승원리보다는 정치적 요인이 더 결정적으로 작용하였고, 게다가 진평왕 이후에는 성골이 중요한 요건이 되어 두 명의 여왕이 연이어 즉위하는 여계계승이라는 특수 현상을 낳았다고 보았다. 장일규는 <삼국유사≫ 왕력편·기이편의 신라 하대 기사와 사회상>을 다루었다. 그리하여 희강왕 외조부와 신덕왕 외증조부는 모두 박씨 세력이고, 경순왕 조부 기록 역시 경순왕이 박씨왕인 경애왕을 뒤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박씨세력과 관련될 수 있다고 보았다. 왕력에는 신덕왕․경명왕․경애왕을 제외하고 국왕의 성씨를 김씨로 기재하였고 왕비의 성씨는 기재하지 않았다. 희강왕 외조부와 경순왕 조부, 신덕왕 외증조부에 대한 기록은 박씨세력의 모습을 은연중 기술한 것이다. ‘파른본’ ≪삼국유사≫는 초간본을 중간하면서, 고려사회에 계승된 신라문화의 영향 때문에 신라왕실인 김씨 외에 다른 세력을 특기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판카즈 모한은 ≪삼국유사≫ 왕력에서 인도와 관련한 기록을 분석하여 <일연선사의 인도불교사와 불교사상 이해>를 발표하였다. A.D. 1세기라는 가야의 건국연대는 사실로 보기 힘들다고 전제하면서. 3세기에 인도 북부를 차지했던 지방 지도자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으로부터 한 인도 가족이 빠져나와 풍우에 휩쓸려 김해 바닷가에 이르렀고, 가족의 어린 소녀는 가야왕에게 보내졌고, 첫 번째 왕비 자리까지 올랐다고 하였다. 그리고 7세기 중반에 신라 선덕왕과 진덕왕의 이름이 아유타국의 여왕과 같이 덕만과 승만(Srimala) 이라고 지어졌을 때 가야의 역사가는 당시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김유신(金庾信)을 가야 건국시조의 왕비 후손이라고 꾸며냈다. 또 진흥왕은 자신의 두 왕자에게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이라는 이름을 짓고, 또 인도 아소카왕이 금과 쇠를 실어 보내어 진흥왕이 삼존상을 만들었다고 한 전설은 역사상 전륜성왕의 원형이 된 아쇼카왕을 진흥왕과 연결시켜 그가 인도 왕의 정신을 계승한 이상형임을 말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아울러 인도에서는 B.C. 3세기에 전 지역을 통일하고 고대의 제국이념을 실현한 아소카왕의 정치이념과 국가윤리의 근거로서 다르마(正法)의 실천윤리의 면이 부각되고 이로써 성속일치사상이 실현되었는데, 아소카왕의 불교치국정책이 신라 중고기 왕실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최근 파른본 ≪삼국유사≫가 공개됨으로써, 한국고대사 연구에 일어난 새로운 움직임의 한 사례이다. 아마 파른본을 통해 기존에 이용된 판본에서 보이지 않았거나 애매모호하였던 사항들이 연구결과에 따라 새롭게 추가 확인됨으로써 앞으로 연구에 큰 진전을 낳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문헌자체에 대한 검증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진행될 때 보다 양질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새로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주저됨이 있다. 우선 파른본 자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자가 열람할 수 있을 기회가 제공되어야하기에 영인본의 제작보급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다른 여러 판본과 파른본을 대조 교감하여 정본화하고, 또 역주와 주석을 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내용을 면밀하게 분석과 연구하면서, 이것을 활용한 문화 사업이 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한편 지난 3월 고려대학교 출판부는 ≪삼국유사≫ 역주본(최광식 등)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안타깝게도 원문에 실려 있지 않다. 아마 파른본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것을 직접 보고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기에 편집과정에 택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이 간행을 계기로 일연이 거주하였던 인각사가 있는 경상북도 군위군과 국악방송이 공동으로 5~6월에 걸쳐 `위로와 치유의 텍스트 ≪삼국유사≫’라는 주제로 특별강좌를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6월 12일에 ‘≪삼국유사≫ 역주본 발간의 성과와 전망’이라는 세미나를 개최한다. 하지만 파른본을 포함시켜 함께 다루지 않는다면 아마 종전의 연구범주와 성과에서 크게 진전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