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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6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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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할머니의 재산 상속 이야기 -시시왕래(時時往來)와 삭삭왕래(時時往來) [사진] 안승준(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 500여년 전 경상도 안동지방 어느 양반집에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안동 군자리(외내마을) 광산김씨 집안의 황씨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그의 친정 또한 대가 집이어서 이 할머니는 친정으로부터 큰 재산을 상속을 받아 남편을 맞아들였습니다. 시집을 간 것이 아니고 남편이 장가를 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대개 남자가 장가를 가서 처가에서 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한데 황씨 할머니는 성년이 되어서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조금도 슬퍼하지도 않았고 외롭지도 않았습니다. 이 할머니에게는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시양(侍養) 아들과 수양(收養) 딸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목숨이 다할 그 무렵 황씨 할머니는 일체의 재산을 가지고 분재(分財), 즉 상속을 단행했습니다. 분재를 하기 전에 할머니는 분재 대상자들에 대하여 논공(論功)에 들어갔습니다. 요컨대 살아 생전에 자식들에 대한 상벌(賞罰)을 따지고 그에 따라 재산의 양을 조절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할당된 법적 상속분이 정해 진 요즘과 매우 달랐지요. 그러면 자손들에 대한 황씨 할머니의 평가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기준을 살펴보기 전에 그의 생전 가족 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녀가 일찌감치 시양 아들과 수양 딸을 둔 것은 평상시 일상생활과 노후를 위한 대비책이었습니다. 황씨 할머니는 자식을 두지 못한 경우이지만 자식을 여럿 둔 경우에도 시양자 수양녀를 두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병들고 어려울 때 그리고 늙을 때에는 반드시 친자식이 내게 잘한다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친아들과 조카들, 그리고 시양자 수양녀들에게도 충성 경쟁을 시킵니다. 재산을 매개로 효도(孝道) 경쟁을 시킨 것이지요. 옛 사람들이 효도를 다했다는 것은 뒷날 재산 분배에 대한 약속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에 옛 사람들은 대개 임종 즈음에야 재산을 상속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을 기약 못하고, 저녁이 되면 내일 아침을 기약하지 못하는’ 그 순간이 되어야 분재를 하곤 했던 것입니다. 다시 황씨 할머니의 분재에 대한 논공 사실을 살펴볼까요? 시양 딸 아무개는 내가 죽을 때를 대비해 튼튼한 관곽(棺槨)을 준비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발꿈치가 닳도록 내 집에 출입하였고, 병이 들어 아플 때에는 마음을 다해 보살펴주었다(盡情侍養). 손자 아무개는 시도 때도 없이 왕래하며 효도를 다하였다(時時往來孝道). 손녀 아무개는 그 남편이 사망한 가운데서도 내왕하며 효도하였다(來往孝道). 또 다른 손녀 권숙평의 처 김씨는 자주 자주 내왕하며 효도(數數往來孝道)하였다. 손자 아무개는 어릴 때부터 내게 찾아와 효도하였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밤낮으로 드나들며 보살펴주었다. 아닙니다. 평상시 그러한 기준으로 재산을 분배한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가 있었고, 실제로 황씨 할머니처럼 세상을 떠날 즈음에 그 기준에 맞추어 분재를 했던 것입니다. 황씨 할머니의 경우만 이런 유형의 분재를 하였을까요? 아니지요. 딸 아들에 차별이 없던, 자식을 두지 않아도 양자를 하지 않던 시절에는 매우 보편적인 분재 방식이었습니다. 어르신 여러분! 오늘부터 자식들에게 말해 보십시오. ‘자주 집에 찾아오는 것’을 상속의 제 일의 기준으로 삼는다고요. 아름답고 편안한 노후에도 나름의 전략과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진] 1480년 김효지(金孝之) 처 황씨(黃氏) 분급문기(分給文記) 소장+ 크게보기 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여러분! 이쯤이면 황씨 할머니의 효도의 평가 기준을 알 수 있겠지요? 바로 ‘시시왕래(時時往來)’, ‘삭삭왕래(數數往來)’가 평가의 제 일 큰 항목이었던 것이지요. 뭐니 뭐니 해도 ‘내게 자주 자주 찾아오는 것’ 이를 기준으로 재산을 가감하여 상속했던 것입니다. 어른들, 부모들은 자손들 자식들이 자주 자주 찾아오는 것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옛 어른들이 자식들의 ‘시시왕래’, ‘삭삭왕래’를 마냥 바라고만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