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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소식지 01월호 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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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머리꾸미기와 <가체신금사목> [사진]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가체 금지가 비록 작은 일에 속하나, 당초 시행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시행한 지 오래되자 효과를 보아 사치를 없애고 폐단을 덜었습니다.” (『승정원일기』 정조 22년 1월 11일)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높은 머리를 선호한 이유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시경』에 실린 <용풍군자해로(鄘風君子偕老)>라는 시에는 위나라 의공(宜公)의 부인 강의의 아름다운 용모를 묘사한 부분이 있다. 거기에는 “구름처럼 숱이 많은 머리/어찌 다리를 쓰랴”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에서 뭉게구름이 피어오를 듯한 숱이 많은 머리가 외모를 더 돋보이게 하는 요소였음을 엿볼 수 있다.[사진] 가체신금사목(출저:장서각)조선에서 다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때는 17세기 전반 이후 궁중의 혼례식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궁궐 담을 넘어 민간에 퍼지기 시작해 18세기 무렵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많은 여성들이 ‘시대의 풍습’이라는 이름으로 열렬히 공유했다. 여성들은 본인의 머리 모양을 더 풍성하고 높게 만들기 위해 남의 머리카락을 이용했다. 누구에게 뒤질세라 오늘날 가발처럼 남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머리를 꾸며 숱이 풍성하면서도 높은 모양새를 만들었다. 1772년(영조 48) 전라도 고창에 사는 양반 황윤석은 큰 아들을 혼인시켰다. 황윤석은 큰 아들의 혼사를 위해 사방으로 혼처를 구하는 동시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각종 혼례 정보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황윤석은 1767년 봄에 한양에서 너나없이 신부 다리 값으로 30냥 정도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다. 신부에게 보낼 각종 비단 옷감을 마련하는 데에 20여 냥이 드는데 이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한양에서는 1냥을 주면 쌀 1말 내지 9되 정도를 구입할 수 있었다. 다리 값 30냥이면 쌀 27〜30말 정도를 살 수 있는 큰돈인 셈이다.다리를 이용한 머리 꾸미기 열풍은 한양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방에서도 한양의 분위기를 좇아갔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문화의 중심지였다. “한양은 사방의 본보기가 된다.”는 지적처럼 한양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화 현상은 바로 유행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가체도 마찬가지였다.사안이 이렇다보니 조정에서는 다리 문제를 놓고 자주 논의를 벌였다. 심지어 문과 시험의 책문(策問:논술시험)으로 출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규방에 있는 여성의 일까지 국왕이 일일이 금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제기했다. 하지만 결국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사치로 간주되면서 규제와 금지 쪽으로 가닥이 잡혀갔다. 여성의 높은 머리꾸미기에 대해 강력한 금령을 내린 국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몇 번의 논의 끝에 1756년(영조 32) 1월에 양반집 여성의 다리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듬해인 1757년과 1758년에도 머리를 얹어 높게 하지 말고 머리 뒤로 쪽을 만들어 궁중 양식인 족두리를 착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1762년에도 높은 머리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영조의 조치는 조금 성급했던 모양이다. 기대만큼 결실을 맺지 못했다. 결국 1763년 영조는 예전처럼 높은 머리를 다시 허용했고, 남의 머리카락을 사용하는 가체만 금지시켰다. [사진] 가체신금사목(출저:장서각) 정조의 시책은 성공적이었다. 여성들의 저항은 있었으나 금령이 안착한 것이다. 1797년 우의정 이병모는 “큰 다리머리는 이제 금령을 범할 우려가 없습니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오늘날 장서각에도 <가체신금사목> 2종이 소장되어 있어 가체를 금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정조의 노력을 잘 살필 수 있다. 정조가 즉위할 무렵 여전히 민간에서는 “그럴 듯한 다리”를 마련했다. 심지어 신부가 다리를 마련하지 못해 혼인 후 6~7년이 지나도록 시부모를 뵙는 예를 거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속출한다는 탄식까지 나왔다. 이에 정조는 1788년(정조 12) <가체신금사목>을 제정해 다리를 금지하는 시행세칙을 마련했다. 이제 임청각의 사람들은 500년을 지켜온 임청각과 임야 1만 2천여 평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임청각이 단지 일개 가문의 종택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자 독립운동의 역사 현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산 교육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석주선생의 자손이 일제의 호적을 거부함에 따라 4인의 친족에게 명의 신탁되어 70년간 방치됨으로써 불분명해진 소유권이 발목을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 다른 한 편에서는 송병준과 이완용 등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토지환수소송을 제기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불의에 영합하고, 개인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권력에 복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배층이 되고, 부와 권력을 누린 이들의 토지였다. 이제는 탐욕과 방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석주선생과 임청각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명가로서의 가치 때문은 아닐까? 이 말은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1788년, 정조 12)을 반포한 지 10여 년이 경과한 뒤에 나온 어느 신하의 평가다. 가체가 금지령을 시행할 당시만 해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할 만큼 쉽지 않은 사안이었으나, 결국 성공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선호한 머리 형태는 머리숱이 풍성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여성들은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 본인의 머리카락을 덧 땋거나 남의 머리카락을 덧 넣어서 머리 위에 얹었다. 머리를 높게 해 숱이 많아 보이게 하는 모양새는 중국 송․원을 거쳐 명으로부터 전해져 조선에서도 유행했다. 이 머리모양에 대해 다양한 용어로 표현했는데 조선에서는 ‘다리[月子]’ 또는 ‘가체(加髢)’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다리가 머리 장식을 위한 재료의 의미가 강하다면, 가체는 남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머리모양을 부풀린 형태를 지칭할 때 더 많이 사용했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