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STORY
[도서] ‘한국 근대 여성의 미주지역 이주와 유학’
  # 사진신부
  # 한인여성이민사
  # 한국근대여성의 미주지역 이주와 유학

   혹시 ‘사진신부’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이름만 들었을 때는 신부의 사진을 일컫는 말 같기도 하고, 결혼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진신부’라는 명칭에는 20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간 여성 이민자들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사진신부의 이야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100여 년 전 하와이로 향한 이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와이로 향한 조선인들
   한인 이민자들이 처음으로 하와이 땅을 밟은 시기는 1903년입니다. 19세기 중반부터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경작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인데요. 사탕수수 경작은 많은 일손을 필요로 했기에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902년 당시 일본인 노동자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중국인, 푸에르토리코인과 필리핀인, 포르투갈인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아시아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으로도 근무하였기에 현장에서는 아시아 노동자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인 노동자 수가 과도하게 증가하자 농장주들은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고, ‘예의 바르고 성실한’ 한인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했습니다.
   대홍수로 인해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던 조선 조정은 하와이 농장주들과 계약 하에 하와이 이민자들을 파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고 노동 이민에 대한 광고를 제작하였습니다. 당시 공고문에는 “하루 10시간 노동에 월급 15달러, 공공교육 무료 지원 및 주거지와 의료비 지급”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고 지원한 노동자들은 1902년 12월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7,226명이 이주하였고 그중 6,747명이 정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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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좌)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출처: 남도일보)    (우) 고국을 떠나기 전 사진신부들의 모습(출처: 경향신문)
사진신부들의 사회·경제활동
   사진신부의 삶을 선택한 여성들은 조선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에 의해 고통받았다고 합니다. 1918년 미국으로 향한 한 여성이 남긴 구술 기록에서 그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개항 이후 새로운 교육의 주체로 여성이 주목받기 시작하던 시기, 가정에서는 그들이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초등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느질이 아니라 학업을 선택하고 싶었던 여성들 중에는 미국에서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정혼자와의 나이 차이를 알고도 사진신부가 되었던 여성도 있습니다. 위 구술의 주인공인 유성기 씨인데요. 당시 16살이었던 유성기 씨는 남편의 나이가 40살인 것을 알았지만, 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정혼자는 74세였습니다. 6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남성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집안의 수치’가 되고 싶지 않아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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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부가 주축이 된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미국으로 건너간 사진신부들은 이전까지 남성 중심이던 미국 내 한인공동체의 성격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열망했지만, 고국에서와는 달리 여성이라는 독립된 개체로 평등하기를 원했습니다. 복합적인 의미의 ‘독립’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평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1910년대 전후로 샌프란시스코 한인부인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친애회 등이 형성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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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자신이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꿈을 이루고자 한 여성 선구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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