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
어린 누이를 종량(從良)하는 문서
- 1712년 얼매(孽妹) 태임(台任) 전 명문(明文)
   조선은 일부일처제 사회였지만, 첩을 허용하고 있었다. 첩은 주로 신분이 낮은 여성을 대상으로 했으며, 적처와의 엄격한 차별이 존재했다. 첩은 신분이 양인인지 천인인지에 따라 양첩과 천첩으로 구분했으며, 양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서자녀, 천첩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얼자녀라 하여 구분했다.
   우리가 “서얼(庶孽)”이라 부르는 것은 이들 양첩과 천첩 소생 자녀를 통칭하여 부르는 것이다. 서얼은 아버지가 비록 양반이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나 노비 신분의 첩이었기에 적처 소생의 적자녀와는 많은 차별을 받았다. 특히 천첩 소생인 얼자녀의 경우 일천즉천(一賤則賤)과 종모법(從母法)에 의해 출생과 동시에 천인의 신분이 주어졌으며, 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르는 속신(贖身)을 통한 종량(從良)의 과정이 요구되었다.

[그림 1] 이덕일(李德一) 등 형제가 어린 얼매(孽妹) 태임(台任)을 종량하는 문서 (장서각 소장)
   이 문서는 이덕일(李德一, 1688~1757) 등 형제가 어린 얼매(孽妹) 태임(台任)을 종량하는 문서다. 1712년 11월 20일 경상도 진주의 마진마을에서 작성된 문서로, 문서의 작성 주체는 이덕일이다. 매부인 정홍로(鄭洪老)가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또 다른 매부인 배윤길(裵胤吉)이 붓을 잡고 문서를 작성했다. 두 매부는 이덕일의 누이를 대신해 참여했는데, 단순히 문서의 증인과 집필(執筆)의 역할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동의하기 위해 함께하고 있었다. 결국 이 문서는 이덕일 3남매가 함께 작성, 확인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들 3남매는 이보(李葆, 1651~1708)가 적처 영산신씨(靈山辛氏, 1649~1688)와의 사이에서 낳은 6남매 가운데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3남매였다. 문서의 수취인인 얼매 태임은 이보가 1698년에 자신의 비(婢) 윤덕(允德)과의 사이에서 얻은 천첩 소생 얼녀(孽女)로, 당시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이 문서는 언뜻 보기에는 노비를 사고팔면서 작성한 노비매매문기의 형식으로 작성됐으며, 노비의 종량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속량문기(贖良文記) 또는 속신문기(贖身文記)와도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가의 지불이 없다는 점에서 노비매매문기나 속량·속신문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문서에서도 “너는 곧 선친께서 매득하신 첩의 소생이니, 속신 없이 종량함이 법전에도 실려 있다.”라고 언급돼 있다. 만약 태임을 낳은 윤덕이 다른 사람이나 관의 비였다면, 마땅히 그 대가를 치르는 속신의 절차가 필요했겠지만, 윤덕의 주인이 선친이었기 때문에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렇게 문서를 작성했을까? 이어지는 문장을 통해 밝히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우리 남매 중에 후고할 문서가 없지는 않으므로, 법전에 따라 종량의 일을 3남매가 함께 증인과 필집을 갖추어 문서를 작성한다.” 여기서 “후고할 문서”라는 것은 태임이 비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다. 여기에는 윤덕을 매득하면서 작성한 노비매매문서가 있을 것이고, 윤덕과 태임이 비로 수록된 호구문서도 존재할 것이다. 무엇보다 1699년 이보가 생전에 재산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줄 당시, 2살밖에 안 된 태임을 이덕일의 몫으로 분재하는 분재기가 작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서의 효력을 무효로 하기 위해서는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해 확인하고 그 결과를 이렇게 문서로 남기는 것이 필요했다.
   이어지는 내용을 마저 살펴보도록 하자. “이 일은 매매와는 다르므로 빗기[斜只]를 받지는 않고, 네 어미 매득 시의 빗출문서[斜出文書]를 함께 영영 허급하니, 내외 후손 가운데 후일 잡담이 있거든 이 문서로 관에 고해 바로 잡을 것.” 여기서 “빗기”나 “빗출문서”는 노비의 매매에 있어 그 사실을 관에 고하여 증명으로 발급받는 사급입안(斜給立案)을 의미한다. 즉 태임을 종량하는 일에 대해 관의 증명을 받지 않은 이유를 이것이 노비를 사고파는 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태임의 모 윤덕의 사급입안을 함께 건네 줌으로써 윤덕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외 후손 중에 혹시 다른 뜻을 품는다면 이 문서로써 관에 고해 바로 잡도록 함으로써 이 문서의 효력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 문서는 얼매 태임을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마지막 확인 절차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임의 모 윤덕은 이보의 소유였고, 태임은 1699년 분재 이후 이덕일의 소유였다. 따라서 태임의 종량에는 속신의 절차도 필요하지 않았으며, 소유자인 이덕일의 의지만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보가 사망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적자녀 4남매가 모여 재산을 나눈 1710년 화회문기에는 “천서매처(賤庶妹處)”라 하여 얼매 태임 몫으로 답 3두락과 전 1두락을 따로 나눠주기도 했다. 즉 이덕일은 물론 다른 형제들도 자신들의 어린 얼매 태임에 대한 종량과 생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문서는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난 후 태임의 종량을 최종적으로 합의하고, 후대에도 탈이 없도록 확인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