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습재 일기

나는 더 이상 ‘문송’하지 않기로 했다

(* 문송: "문과를 나와서 죄송합니다"라는 의미의 신조어. 출처: 오픈사전 도움말)


박려정 사진
박려정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박사과정(인문정보학)

속도와 방향


  또 한 번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졸업시즌이다. 인생에서 속도가 중요할까, 아니면 방향이 중요할까?


졸업사진

  뜬금없지만 “과거, 오늘에 있었던 추억을 확인해보세요.”라는 SNS(Social Network Service) 알림은 가끔 내 온몸으로 전율을 보내며 내 삶의 나의 안정과 평화를 깨트린다. 그리고 내가 선택했던 인생의 속도와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예컨대 5년 전 박사학위 수여식의 사진을 알림과 함께 보내주면서, 과거 오늘 날짜 SNS에 게시되었던 콘텐츠를 돌이켜보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노력으로 ‘성취감’이라는 그릇을 그득 채우겠다.”고 게시했던 호언장담(豪言壯談) 또한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과거 업로드했던 다짐의 글귀와 사진들이 담긴 앨범은 모두 디지털화되어 서버에 데이터로 보관되었다가 다시금 알림의 형식으로 내게 돌아온다. 심지어 게시했던 그 ‘어느 날’로부터 시간이 얼마쯤 지났다면서 친절하게 나의 허를 찔러 준다. 어디 이뿐인가, 저장된 데이터는 또 나의 취향과 소비 습관, 행동 반경들을 파악해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내게 광고를 퍼붓는다.


‘정보기술 혁명’을 거쳐 ‘IT(Information Technology)’ 시대는 ‘DT(Data Technology)’ 시대로 빠르게 전환되었고 온라인으로 무심코 검색하거나 업로드했던 나의 모든 것은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 외에 컴퓨터는 또 그것을 데이터로 기록하고 그 데이터는 나를 다시 가공해 시장으로 내놓는다. 이렇게 타의적 ‘상품화’가 되는 나를 느낄 때면 회의감이 들곤 했다. 나는 왜 세계 경제와 혁신기술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가? 내가 ‘인문학’을 선택했기 때문이었을까?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 교수님께서 수업 중에 넌지시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져 주셨다.
카페 사색의 사진 인문학이 무엇일까, 우리 문하생들은 구글(google)이 알려주는 ‘인문학’의 함의가 마치 정답인 듯 개념적 의미를 찾고자 각자 ‘구글’ 검색 창을 열었다. 화두의 저의는 당연, 사전적 의미가 아니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인문학 탐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색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은 인간과 관련된 제반 지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관련된 양질의 방대한 데이터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찾는 학문이다. 인간의 삶과 관련된 의미가 깃든 그 결과물로 우리는 또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지혜와 수많은 아이디어를 얻어내고 있다.

그 말인 즉 나도 ‘인문학’이었다. 인문학은 실제 눈으로 보이는 효과가 없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소외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문학은 데이터를 만드는 학문’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리고 데이터가 모여 정보를 이루고 정보는 지식이 되며, 가치 있는 지식은 또 지혜를 창출해준다는 깨달음에 덧붙여진 울림이었다.


데이터 인문학


  디지털 전환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개는 ‘분할’된 학문을 ‘융합’으로 전환시키고 있으며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의 출발에서부터 인문학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이 더 편리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주체는 결국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인문학이며 인문학이 원천의 힘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대 워크샵 사진

  현시대의 인문지식 연구는 첨단 기술에 기반한 융합연구를 통해 인문지식의 가치를 확대하고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더 깊은 고민을 수반한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인문데이터를 분석하고 인문지식을 탐구해야 하며 인문 데이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더 정확하고 고증이 확실한 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이 해당 지식을 정확하게 습득하고 더욱 깊이 있는 학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인문학’의 의미를 깨치면서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과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더 많은 학자들과 협업해 함께 지혜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고민하고 또 실천해야겠다.

  박사 2회차, 오늘도 나는 우직하게 운중동 끝자락의 ‘시습재(時習齋)’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만끽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