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우선 기본에 충실할 것, 미술사의 고전을 섭렵할 것,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한 가지는 꼭 습득할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번 한중연 사람들 코너에서는 한국학대학원 미술사학과 이성미 명예교수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이성미 명예교수 사진

독자들을 위한 교수님의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Naver 인물정보에 들어가 ‘이성미’를 찍으면 먼저 ‘개그우먼 이성미’가 나오고, 다음에 ‘동명이인 미술사학자 이성미’를 볼 수 있습니다. 덕성여대 교수 시절 교양과목 시간에 본인의 이름을 칠판에 적으면 학생들이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당시 저는 오랜 유학생활을 한 터라 학생들이 왜 웃는 줄도 몰랐습니다. 덕성여대에서 6년 간 있다가 1989년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예술연구실 교수로 자리를 옮겨 2005년 퇴임 때까지 연구와 후학 양성을 위해 바쁘게 지냈습니다.



대학원 캠퍼스에서 교수님은 어떤 모습이셨습니까?


세미나 발표 때 대학원생들에게 표준말을 쓰도록 ‘강요’한 교수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집에서 싱싱한 딸기 간식을 챙겨와 종이 접시와 플라스틱 포크를 준비해 학생들과 나누어 먹던 것도 많은 학생들이 기억할 것입니다. 당시 연구원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었고 식당 음식도 신통치 않을 때였습니다.

연구원으로 하여금 돈을 쓰게 하는 교수로도 유명했습니다. 당시에는 강의에 빔프로젝터가 아니라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사용했는데 미국 유학 시절 배운 대로 두 개 프로젝터를 사용해 작품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고집해 프로젝터를 한 대 더 구입했고, 두 개를 동시에 올려놓을 수 있는 준비대도 연구원에 요구했습니다. 당시 총무과장님이 “이 교수님, 말씀 좀 자제해 주십시오. 교수님이 입만 뻥긋하시면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라고 저에게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2002년의 일입니다. 그 때도 Sony 빔프로젝터를 당시 이영덕 원장님께 졸라 800만원을 들여 마련했습니다. 당시에는 빔프로젝터가 귀했던 상황이라 이 비싼 물건을 연구원 교수들 가운데 나 혼자만 PPT 강의에 사용하는 것이 무척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그해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월드컵이 열렸고 우리 선수들이 계속 잘 싸워 날이 갈수록 그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학생들이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분당에 나가 어느 운동장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으로 월드컵 관람을 하다가 언젠가부터 연구원 대강당에 이 빔 프로젝터를 TV와 연결해 커다란 스크린으로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저의 미안한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대학원장 시절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2003년 1월에 대학원장에 취임했으나 남편이 그 해 4월 주미대사로 발령을 받아 먼저 워싱턴으로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8월에 예정되어 있던 대학원 졸업식까지는 있어야 할 것 같아 출발을 미루고 워싱턴 대사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만 잠깐씩 다녀왔습니다. 이후 8월 말에 한국을 떠나 2005년 2월 정년 퇴임 직전까지 연구원 생활과 매우 다른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대학원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제가 경험했던 프린스턴대학의 박사 논문자격시험제도(논자시)를 한국학대학원에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프린스턴대학 시절 저는 동양미술사 전반, 중국회화사, 부전공이었던 중국 지성사(知性史) 시험을 각각 8시간씩 꼬박 사흘간 치렀습니다. 이와 달리 1989년 봄학기에 처음으로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왔을 때 박사논문 자격시험의 경우 과목에 구분 없이 한 시간만 보는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예술연구실 실장을 맡으면서 미술사 부문에서만이라도 이런 현실을 단계적으로 고쳐나갔습니다. 결국 미술사 전공 학생들은 하루 8시간은 아니더라도

Washington D.C. 의 American University에서 특강하는 모습이 그 학교 주간신문에 게재되었다.

Washington D.C. 의 American University에서 특강하는 모습이
그 학교 주간신문에 게재되었다.

전공 두 과목과 부전공 한 과목을 처음에는 각각 90분씩, 후에는 각각 세 시간씩 필기시험을 보도록 했습니다. 때문에 대학원장에 취임하자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프린스턴식 논자시’ 라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학원장을 맡으면서 이 문제를 전적으로 각 분야의 담당 교수들에게 일임하는 방향으로 대학원을 이끌었습니다.

논자시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약 40개의 책상이 있던 대학원생 공부방에 책상마다 인터넷을 연결해 준 것입니다. 그때까지 단지 세 개의 책상에만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많은 불편이 따랐습니다. 당시 한국학정보센터소장을 맡고 있던 전택수 교수를 설득해 상당한 비용이 드는 일임에도 우선 실행토록 했습니다. 여름날 온도가 30도가 넘어야 에어컨이 가동되던 연구원 시절 공부방에 키 큰 선풍기도 몇 대 설치해 주어 대학원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대학원장 임무를 겨우 8개월만 수행하고 워싱턴으로 향한 이후 남편의 외무장관 시절, 주미대사 시절 제가 해야 했던 일들에 대해 당시의 기록과 사진들을 토대로 『한 미술사학자의 외교街 산책』이라는 책을 한 권 만들어 놓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출간하지 않고 있습니다. 남편의 재임 기간인 약 22개월간 미국의 유명 대학과 박물관들에서 20번에 달하는 한국미술 특강을 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학생들의 문화답사를 위해 비용을 조금씩 적립하고 여러모로 애쓰셨다고 들었습니다.

1971년 여름 Florence의 Uffizi Gallery에서 〈비너스의 탄생〉 앞

1971년 여름 Florence의 Uffizi Gallery에서 〈비너스의 탄생〉 앞


연구원이 한국학을 연구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저는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서양미술사에 대한 기초지식과 소양을 갖출 것을 당부하며 한 학기에 한 강의를 선보였습니다. 이때 저의 유럽 여행 슬라이드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정상 곧바로 박사학위를 시작할 수 없었던 5년간 저는 뉴욕에서 서양미술사, 르네상스 미술, 현대미술, 그리고 한국미술과 동양미술을 강의했습니다. 이를 위해 1971년 여름에 한 달간 유럽 여행을 했고, 1973년 여름에는 한국, 중국, 일본을 한 달간 여행했습니다.




미술사 연구의 양대 산맥은 문헌 연구와 작품 및 유적 실사(實査)입니다. 박물관, 미술관은 물론 국내ㆍ외 유적지 답사라는 쉽지 않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연구원의 봄, 가을 답사 가운데 가을 답사는 각 과별로 교수가 재량껏 기획해 가게끔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지원하는 비용도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가을 답사 때마다 제가 미술사학과 이름으로 매달 조금씩 적립해둔 돈으로 비용을 보태 알찬 답사 프로그램을 꾸몄습니다. 학생들도 매번 가을 답사에 큰 기대를 가지고 답사자료를 미리 만들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두 사람이 사전답사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연구원의 가을 답사 단양팔경 중

연구원의 가을 답사 단양팔경 중


답사지는 전국의 유명한 사찰, 경주 남산의 칠불암(七佛庵), 신선암(神仙岩) 같이 산속 돌에 새긴 불상들이었고, 진경산수(眞景山水) 연구를 위한 명승지 답사도 있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김홍도, 정선 등 조선시대 화가들이 많이 그린 단양팔경(丹陽八景)을 실제로 답사했을 때 찍은 것들입니다. 한번은 대만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서 큰 특별전이 열려 가을 답사를 아예 대만으로 정해 책에서만 보던 불후(不朽)의 중국 산수화 명작들을 직접 볼 기회도 가졌습니다.


대만 답사

이 사진은 우리가 머물던 호텔 정문 앞에서 모두가 정장을 한 채 찍은 모습입니다. 당시 한철수 대만대표부 대사의 저녁 초청 장소로 가기 전에 찍은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답사에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있으실 텐데 그 중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으신가요?


저는 항상 제자들을 말할 때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단어를 씁니다. 그만큼 제자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행복한 교수입니다. 연구원만 해도 이완우 교수, 윤진영 한국학사전편찬부장, 정은주 연구원 등이 재직 중입니다. 저의 정년 퇴임 기념논문집인『조선왕실의 미술문화』에 실린 9편의 주옥같은 논문들의 저자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지만 모두들 제 자리에서 열심히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집에 당시 여러 가지 사정상 글을 싣지 못했던 제자들까지도 아들딸처럼 가깝게 느낍니다. 이제는 동료가 된 제자들에게 연구에 필요한 자료나 도판들을 부탁하면 지체 없이 보내주니 정말로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과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늘 대화하며 지내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제자’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연구생활에 있어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2020년 가을 우연히 지난날 걸어 온 학문적 여정을 정리해 볼 기회를 두 번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행한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에 관한 것으로 제가 어떤 사람들과 어떤 학문적 교류를 해왔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몇몇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박물관에서『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외국 연구자의 한국미술연구』라는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미술사학회에서 창립 60주년 행사로 전직 회장들과의 대화를 제자들과의 문답 형식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이때 저와 함께 한성대 강관식 교수와 연구원의 윤진영 수석연구원이 질문자가 되어 매우 알찬 내용으로 1시간 40여 분의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첫 번째 인터뷰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해외박물관 자문위원으로 국제활동을 하던 시절 국제회의 참여, 외국 대학 및 박물관 등에서의 특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휴스턴 미술관 등 해외 박물관에 한국미술실 설치 등의 일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 인터뷰는 좀 더 포괄적으로 저의 연구, 저술, 학생 지도 등을 다루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처럼 정리해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연구원을 떠나신지도 꽤 되셨는데요. 한중연에서 교수로 재직하시던 시절과 현재 생활의 다른 점이 있으신가요?


저는 퇴임 후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는 매 주 금요일이면 인근에서 유명한 ‘금요시장’이 열립니다. 갖가지 신선한 과일, 채소, 계란, 두부, 곡식, 미역과 그 자리에서 삶아 주는 구수한 옥수수, 온갖 싱싱한 생선과 조개류 등이 펼쳐집니다. 연구원에 다닐 때는 아침 8시 30분쯤 집을 나섰는데 그 시간이면 장이 막 열리는 때입니다. 출근을 서두르느라 전에는 한 번도 좋은 시간에 시장을 볼 수 없었고 저녁 6시쯤 퇴근하는 길에 겨우 짐을 싸는 상인들에게 다가가서 과일 몇 개라도 떨이로 사 들고 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10시쯤 나가면 생선 아저씨가 “어머니, 어머니, 어서 오세요, 왜 지난주에는 안 나오셨어요? 오늘은 동해산 대구가 좋습니다. 같은 대구라도 서해안 대구보다 얘가 훨씬 더 맛있어요. 이 큰 놈이 한 마리에 3만 5천 원밖에 안 해요.” 라고 합니다. 보아하니 한 마리면 우리 두 식구가 세 번은 넉넉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손질을 부탁하고, 7, 8천 원짜리 깐 굴을 한 봉투 집어 들고 “이것까지 4만 원에 주세요.”라고 흥정하여 푸짐한 해산물 보따리를 들고 집에 들어갑니다. 정년 퇴임 후 누리는 큰 기쁨의 순간입니다.



개인연구실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시나요?


퇴임 당시 연구원의 연구실과 예술연구실 조교실에 꽉 차 있던 책들 가운데 앞으로의 연구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분야의 고고학과 일본 미술사 책들 대부분을 연구원에 기증하고, 나머지를 끌고 지금 쓰고 있는 한남 오피스텔에 새로운 공부방을 꾸몄습니다. 연구원에 납품하던 책장 업자를 소개받아 구입한 앞뒤로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이 거실 한쪽에 자리해 있습니다. 앞뒤를 합치면 책장 10개 분량입니다. 방에는 또 네 개의 책장이 있고 입구의 낮은 책장에는 보아야 할 의궤 책들이 자리해 있습니다. 집에서 가깝고 온도 조절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큰 이점이 있습니다. 연구원의 연구실도 좋았지만 봄에는 춥고 여름에는 30도 이상 되어야 에어컨이 들어왔습니다.

에어컨 가동 온도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면, DBPia라는 것이 없던 시절, 제 친구(故 JaHyun Kim Haboush 콜럼비아대 교수)는 여름방학만 되면 빈 트렁크를 들고 한국에 와서 매일 연구원으로 저를 따라 출근해 자기가 참고할 한국 간행물들에 게재된 논문들을 복사해 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내 방으로 왔는데 하루는 11시쯤 와서 “성미야, 토할 것 같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 시간에 30도 가까이 되었으나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침 신문을 연구실로 가져오기도 하지요.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많은 신조어를 찾아가며 열심히 봅니다. 글 쓰는데 필요한 컴퓨터 기술도 되도록 많이 습득해 도판이 들어가는 미술사 원고를 손색없이 작성합니다. 가끔씩 하는 특강의 PPT도 되도록이면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만들려고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강의나 특강도 종종 하시나요?


작년부터는 팬데믹의 여파로 국내ㆍ외 특강 요청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영어 특강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재작년 9월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관(San Francisco Asian Art Museum)에서였습니다. 전에는 저의 조선시대 의궤(儀軌)연구라는 특수 분야 때문에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 박물관에서 전시가 있으면 대개 초청 의뢰가 있어 즐거운 기차여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연구원의 경우에도 평생교육 차원의 장서각 강의 시리즈에 가끔 나갔고, 외국인을 위한 영어 강의인 소키에타스 코리아나(Societas Koreana)에도 자주 출강했습니다. 이 강의 시리즈는 2010년 연구원에서 시작해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씩 하다가 점차 예산 부족으로 횟수가 줄어 2019년에는 4회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외국 대사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프로그램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영조시대의 미술문화’ 특강을 맡았을 때 영조의 청계천(淸溪川) 준천(濬川) 업적을 소개하며 청계천이 인왕산으로부터 시작해 서울을 가로 질러 중랑천(中浪川)을 통해 한강으로 나가는 과정을 조선시대 지도 위에서 ‘애니메이션(animation)’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연구시간을 제외한 여가시간에는 무엇을 하며 보내시나요?


퇴임 후 점점 심해진 관절염으로 인해 손가락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즐겨 치던 피아노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영국 대사관저 파티에서 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옆의 영국인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는 “노래는 할 수 있지요.” 라고 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퇴임 직전에는 미국에 2년 가까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밀린 출판 과제가 많았습니다. 이것들을 우선 해결하고 나서 2007년 봄부터 개인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해 지금도 계속합니다.

사람 몸에서 목소리가 제일 늦게까지 늙지 않는다고 하니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가요무대 진행자이신 김동건 아나운서는 남편의 고교 동창이자 우리 아파트 같은 동에 사십니다. 만나면 농담 겸 진담(?)으로 “꼭 한번 모실께요.” 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가요’가 아닌 ‘가곡,’ 오페라 아리아, 뮤지컬 간판 노래, 한국 가곡 등을 배우고 있습니다. 쉽고 어려운 것을 떠나 들어보고 좋아하게 된 곡들을 배워 들으며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좌)한남 음악회에서 윤진영, 소재구 박사(트럼본) 그리고 김현 교수(플룻)가 열연하는 모습 (우)베이스리코더를 연주하는 소재구 박사

(좌)한남 음악회에서 윤진영, 소재구 박사(트럼본) 그리고 김현 교수(플룻)가 열연하는 모습 (우)베이스리코더를 연주하는 소재구 박사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 몰래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연구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악보와 가곡집들 때문에 제자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수년 전부터 노래나 악기 연주를 좋아하는 제자들과 일 년에 한 번씩 집에 모여 와인을 곁들여 간단한 저녁을 먹고 제자들이 마련해 온 후식과 차를 마시며 각자 음악 장기를 선보이는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은 저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 악기를 하나라도 할 수 있든지 아니면 노래 한 곡을 외워서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제일 걸작 인물은 연구원 출신인 소재구 박사입니다. 최소 네 개의 악기를 등에 업고 가슴에 안고 양손에 들고 쩔쩔매며 들어와서는 어떤 노래도 기타를 치며 반주를 곁들이고 트롬본(trombone), 베이스 리코더(base-recorder) 등의 멋있는 악기를 선보이기도 합니다.

지난해에는 팬데믹 때문에 모이지 못했습니다. 2018년부터는 연구원의 김현 교수도 몇 가지 플루트(flute)를 들고 피아니스트도 대동하고 합류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아마추어들의 노래도 여러 가지 악기 반주를 곁들이니 훨씬 전문적으로 들렸습니다. 물론 이날에는 미술사 이야기는 절대 금기(禁忌)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하고싶으신 일이나 계획이 있으신가요?


지금 여러 해에 걸쳐 진행 중인 큰 숙제가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조선시대 의궤를 총체적으로 소개하는 영문 책(Recording State Rites in Words and Images: Uigwe of Joseon Korea)을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 중에 있습니다. 현재 모든 장(chapter)들의 영문 교정까지 끝냈으며, 맨 끝 부분(Glossary)의 일차 교정이 끝난 상태입니다. 이 부분은 A-4 용지로 약 60페이지가 됩니다. 이 외에 도판 상태 점검 및 각 장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검토할 일들이 남아있습니다. 진행이 너무 느리지만 지금까지 같이 일해 온 어느 출판사보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하고 있기에 좋은 결과를 기대해 봅니다.

2011년 9월 29일 외규장각 의궤 반환 공로 표창 훈장 수여식에서

2011년 9월 29일 외규장각 의궤 반환 공로 표창 훈장 수여식에서

물론 중간 중간에 다른 주제의 책들도 출간했지만, 저의 의궤 연구는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서각 2층에 있던 연구실에서 한 층만 내려가면 쉽게 볼 수 있던 의궤들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국내에 있는 의궤 연구와 파리 국립도서관에 145년간 잠자고 있던 외규장각의궤의 한국 반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 군대가 자국으로 약탈해 가서 국고로 넣어버린 이 의궤들은 현재 5년에 한 번씩 재계약 할 수 있는 조건으로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돌아와 있습니다.



저녁 후 자기 전에 이메일(e-mail)을 꼭 한번 열어보지만 글 쓰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조금 보다가 졸리면 잘 수 있는 여유로운 저녁입니다. 노래 공부를 시작한 후로 작곡가, 지휘자 등 음악가들의 전기를 많이 읽었고, 스티브 잡스(Steve Jobs), 미셸 오바마(Michelle Obama) 등의 책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하던 해외여행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어 미국에 사는 아들, 며느리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Zoom을 통해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보면서 이야기하면 정말 가깝게 느껴져 같이 식사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슬프게도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입니다.



미술사학도나 한국학연구자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미래 계획도 함께 말씀해주세요.


몇 가지 계획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지금은 “주변 정리” 문제가 시급합니다. 작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도서실과 연구원 도서관에 저의 장서 목록을 보내 필요로 하는 책들을 기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방 박물관 도서실에도 목록을 보내놓은 상태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집에서 가깝고 매우 넓고 양명해 연구실을 접고 난 후 집에서나 박물관 도서실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영문책 목록을 국립중앙박물관에 먼저 보냈다가 연구원 제자들의 항의에 부딪혀 한국어와 동양서 목록은 연구원 도서실에 먼저 보냈습니다. 일생동안 아끼던 장서가 흩어지는 것이 섭섭하기도 하지만 아직 정리할 기운이 남아 있을 때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학이나 미술사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들이 있습니다. 우선 기본에 충실할 것, 미술사의 고전을 섭렵할 것,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한 가지는 꼭 습득할 것 등이 그것입니다. 영어는 초ㆍ중등학교부터 배우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단어도 외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중국어, 일본어 등도 배우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어느 것을 택하든 그 언어로 자기 전공 분야 학자들과 소통할 만큼, 또는 강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했으면 합니다. 매사에 항상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태도를 갖출 필요도 있습니다. 학회 발표 때나 연구원 세미나 발표 때 발표자에게 질문을 할 것을 당부합니다. 학위를 끝낸 후 박사논문 주제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지 말고 논문에서 미진했던 점을 해소한 후 과감하게 다른 주제에 도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취미생활을 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악기, 노래, 운동, 정원 가꾸기 등 자기의 전문 분야와 전혀 다른 일에 도전해 보기를 당부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부 정신을 갖기 바랍니다. 기부란 꼭 돈이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인생철학입니다. 필요한 곳에 자기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여 모두를 위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