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국학’운동의 저력과 관점을 우리 연구원이 ‘한국학’이라는 비전으로 확장하고 승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전국 곳곳을 다니며 민간 고문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도록 보듬는 역할을 하는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장 정수환 선생님을 만나보았다


정수환 사진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는 2000년 3월 2일에 연구원에 처음 오게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날 생생히 떠오르네요.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된 저는 개강에 앞서 당시 기숙사였던 청계관 백사호(104호)-이 방의 기운이 범상치 않다고 해서 ‘白蛇號’, 이렇게 불렀어요.-를 배정받아 짐을 풀게 되었죠. 다음날 기숙사 입구 녹색배경의 안내판에 게시된 공고문에 우연히 눈길이 가게 되었는데, '국학진흥연구사업'에서 고문서연구를 함께 할 연구보조원을 공모한다는 안내였죠. 무슨 생각이었는지 바로 장서각 2층(현재 한국학도서관) 사무실로 찾아가 간단한 면접을 거쳐 당일부터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로부터 만 20년이 그야말로 쏜 화살처럼 지나갔네요. 어떻게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운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정말 오랜 기간동안 연구원과 함께 하셨네요. 그때와 지금이 많이 다른가요?


현장 사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장서각에서 저의 연구와 활동은 크게 달라진 내용이 없는 것 같아요. 주로 명가나 서원, 향교 그리고 마을 들을 찾아다니며 옛 사람들이 남겨놓은 기록, 고문서들을 발굴·수집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한국학 연구 자료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업무 특성상 한마디로 말해서 아주 출장이 잦아요. 약 6-7년 전에 교육부 감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감사관이 저를 찾는다고 해서 간 적이 있었어요. 매우 놀랐어요. 만나 보니 출장이 너무 잦다는 부분이었어요. 서류를 보고 저도 눈을 의심했는데, 거의 일년동안 100일이 넘게 출장 다녔더라구요. 생각해 보니 한 번 출장을 가면 3박4일, 혹은 일주일씩 다니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긴 했어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못하지만요. 감사관은 출장복명서에 자료를 수집한 성과가 없는 부분이 많은데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우리 장서각 연구원들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사료 수집을 위한 출장을 가지만 미션을 성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많아야 20% 정도만 자료를 얻을 수 있고, 그 외의 경우는 모두 필요한 부분에 관한 구술자료를 수집한다거나 소장자와 접촉을 통한 기관에 대한 학술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이 부분을 찬찬히 설명했더니 감사관도 수긍하며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올해 같은 경우엔 코로나 19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현장조사를 진행하지 못해 조금 아쉽고 또 코로나가 잠잠해지려면 생각보다 이런 기간이 길어지게 될것 같아 걱정이긴 합니다.


민간고문서를 수집하는 일은 다른 기관에서 쉽게 할 수 없는 일 같아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근본적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고문서·고서와 같은 기록문화유산을 발굴하고 학계에 소개하는 연구를 위한 노력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이런 연구는 우리 연구원이 개척한 특화된 분야라 할 수 있죠. 이러한 노력은 이후에도 아마 변하지 않는 가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 혼자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전국 곳곳에 마을을 찾고 또 사람들을 만나며 수없이 많은 자료를 발굴했으니 나름대로 새로운 도전을 했네요.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어요.

정수환 사진

2004년이었습니다. 선배 연구원님들의 지시에 따라 밀양지역 고문서를 대상으로 고문서집성 편집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1년에 10여 책의 자료집을 상당히 의욕적으로 간행할 때였어요. 1996년 촬영되었던 마이크로필름을 출력해서 편집 체계를 갖추고 나니 자료를 소개할 해제를 집필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출장팀을 꾸려 소장자를 만나기 위해 밀양을 찾았어요. 이제는 고인이 되신 故박용수 종손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 분이 안방으로 같이 가자고 하더니 고문서 한 꾸러미를 내어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세히 보니 17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30여 점의 분재기를 포함한 많은 고문서였어요. 그래서 이들 자료를 급히 꾸려서 연구원으로 돌아오니 뜻밖의 성과에 같이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이 격려하면서 이 내용에 관해 책을 한 권 더 기획해서 출판하라는 거 아니겠어요. 진심으로 당황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을 걸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 일로 1책을 내면 되는 일이 2책으로 늘어나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자료도 직접 수집하고 해제도 완성하게 되면서 자료 조사와 수집에 한층 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 해에 연구보조원에서 전문원이 되면서 장서각에 더욱 더 기여하게 되었네요.


도난신고가 되었던 김성은 영정

도난신고가 되었던 김성은 영정

그리고 또, 좀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어요. 한 10년전 쯤 일이었는데 전북 고창에 가면 광산김씨 일족들이 살고 있어요. 그 중에서 인일정(引逸亭) 김성은(金性溵, 1765∼1830) 후손가에서 다량의 고문서를 발굴하고 그에 대한 자료집을 발간했어요. 소장자께서 집안의 영당에 있던 초상화를 기탁할테니 그 자리에 걸 수 있는 복제품을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6개월 정도 걸려 자료를 복제해 드리고 자료집도 발간하며 사업을 마무리 했죠. 그런데 이듬해에 지방지 신문에 문화재 도난에 관한 기사가 크게 났어요. 자세히 읽어 보니 장서각에 기탁되어 소장중인 김성은 영정을 도난당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소장자께 연락해 보니 문화재 절도범이 이것을 복제품인지 모르고 훔쳐갔고, 또 종중 어떤 분도 장서각 기탁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경찰에 신고하여 문화재청에까지 알려지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뒤에 이 사실을 알고 종중에서 신고를 취하하기는 했지만, 자료를 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던 일이었어요. 현재 아직도 포털에 관련기사가 남아 있긴 해요.




사건 사고가 다양하네요. 그만큼 바쁘게 움직이셨다는 이야기겠죠?


장서각 특별전 ‘한국의 족보’ 도록

장서각 특별전 ‘한국의 족보’ 도록

2004년부터 장서각에서는 자료수집 역량을 모아서 지금의 도서관 로비에서 전시회를 연례 행사로 개최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좀 많이 힘들었지만 전시 내용 기획 부분이나 설계 등에 대해 새로 배우고 익히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2006년에 갑자기 저 혼자서 '족보'를 주제로 해서 전시를 진행하라고 지시가 내려왔어요. 조금 당황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약 2달도 안되는 시간동안 자료를 선정, 정리하고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해야 연말에 전시를 개시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순진했던 사실은 “그냥 해야지...”라고 하는 마음 밖에 없었다는 데 있었어요. 그간 수집한 자료 중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는 최초 간행된 족보인 초간보(初刊譜)를 엄선하였고, 또 장서각에 소장된 대표적 왕실족보들을 선별해서 ‘한국의 족보-왕실보첩과 사대부 족보’라는 주제로 내용을 급히 갖추었어요.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은 전시를 구성하기 위한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데 있었어요. 그래서 급히 포목점에 가서 짙은 청색 천을 대량으로 구입해서는 족보 아래에 깔아서 신비롭고 고급스런 이미지를 만들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당시 정해진 예산안에서 적절한 선택을 한 듯해요. 그런 다음 도판을 편집하고 자료를 소개하는 글을 서둘러 써서 도록을 만든 다음, 포스터도 컬러 프린터로 급조해서 만들었고 그렇게 전시를 무사히 오픈할 수 있었어요. 최저 예산으로 신속하게 진행했던 이 전시는 지금 생각해도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소를 짓게 되는데요... 턱없이 부족한 인력과 예산으로 전시를 완성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장서각 왕실자료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한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또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듬해 연구원으로서 장서각에서 계속 연구하게 되었네요. 아직도 황금색표지의 이 도록이 제 연구실에 소중히 모셔져 있고, 가끔씩 쳐다보고 펼쳐봅니다. 마치 저의 훈장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해서.



이외에도 여러 업무를 맡아 진행하셨지요?


돌이켜 보니 장서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특히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는데서 나아가 이른바 신문화사, 혹은 미시사적 연구 경향에 따라 자료를 활용하여 이야기가 있는 연구를 기획하게 되었어요.

고문서연구실의 전신인 국학자료연구실에서 2004년부터 추진한 ‘명가의 고문서’ 시리즈가 그것이죠. 처음에는 기획하신 선배님들을 따라 배우다가 2011년 늘 그랬지만 또 갑자기 숙제를 주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또 늘 그랬듯이 어쩔 수 없이 그냥 하게 되었어요. 선배님들 말씀은 “너 아니면 누가하냐?”라는 전혀 설득력 없는 설득이었죠. 거기에 또 설득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 더 이상하긴 한데.... 1년 동안 자료 조사를 하고 분석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시간을 보냈어요. 왜냐하면 대상 자료가 경기도 양주에 세거하고 있던 해주정씨 종가 자료로 약 5,000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였거든요. 그런데 자료가 아주 좋았어요. 15세기 세종 때 부터 20세기까지 정말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넘쳐났거든요. 먼저 주제를 정하고 이야기를 엮어야하기에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이 가문이 조선 초기에 왕실과 혼인을 맺은 이후 크게 부상한 점에 주목하고 6개월 동안 이야기를 구성해서 ‘명가의 고문서 9-忠을 다하고 德을 쌓다’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규장각이나 사설박물관 소장 자료를 협조받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가져온 고문서만이 아니라 우리 장서각의 왕실자료를 포함해서 최대한 다양하게 도판을 배치하고 많은 이야기를 엮으려 노력했죠.

또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에 산재한 관련 유적지를 지금은 퇴직하신 유남해 선생님과 함께 촬영하러 다녔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지금은 매체가 영상 중심이지만 여전히 사진이 주는 감동이 있잖아요. 연세가 있으심에도 좋은 사진을 위해 산을 오르고 나무를 타는 선생님께 열정의 중요성과 저력을 배웠어요. 하루와 계절이 갖고 있는 빛깔과 사진의 구도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물의 차이, 그리고 이미지가 전하는 감동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2016년 장서각 한문워크숍 답사

2016년 장서각 한문워크숍 답사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 장서각도 한국학 확산에 기여하는 도전적인 연구를 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사례가 2016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장서각 한문워크숍'일 수 있어요. 사실, 이 한문워크숍은 좀 힘들었어요. 제가 기획한 사업도 아닐 뿐 더러 언제나 그렇지만 사실 처음 시도하는 일은 고통스럽잖아요? 다행스럽게도 당시 관장께서 정말 강력한 추진력으로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시작해서 완성시킬 수 있었네요. 이 프로그램은 장서각에서 수집한 자료를 대상으로 해외 한국학 연구자와 함께 영어로 강독하는 부분이 핵심이었어요. 그러면서 제 스스로 놀란 사실은 세계 각지로부터 함께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있다는 사실과 또 그들의 역량이었어요. 새삼 좀 소극적이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어요. 수강생 모집, 학교생활 지원 등의 실무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강사선생님들과 함께 수업에 참여하면서 조금은 용기를 얻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유치한 영어로 그럭저럭 수업을 하긴 했는데, 학생들의 자료를 보는 시각과 반응에 크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던 부분은 말 그대로 놀라운 경험이었네요.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추억은 함께한 답사 이야기에요. 7월 가장 더울 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첫 해에는 해발 600미터가 넘는 남양주의 수종사를 산 밑에서 정상까지 걸어올라 답사 했어요. 20명의 수강생이 모두 땀이 흠뻑 젖어 기진맥진했는데, 정상에서 차를 마시며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말없이 있었던 순간이 좋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후부터 수업분위기가 아주 끈끈해 졌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연구자가 있을 정도로 각별해요.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로 정말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네요.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2013년과 2019년에 출간한 저서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20년 우리 연구원과 장서각에서의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거의 절반을 차지해요. 농담으로 주위 분들께 “제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한 식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구원과 장서각이 저에게는 소중해요. 장서각에서 연구하며 우리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자료를 연구한 성과를 책으로 내고, 또 새로운 도전도 시도해 보았거든요.

장서각에서의 여러 사업들은 공교롭고 또 당연하게도 저의 연구에 녹아들었고 책을 펴냄으로해서 대중들에게 닿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저는 평소 수집한 자료를 열심히 읽으면서 옛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발견하려고 노력했어요. 주로 땅문서와 생활일기를 분석해서 동전 유통으로 인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했어요. 2013년에 『조선후기 화폐유통과 경제생활』이라는 주제로 제 생일날 출간했어요. 저에게 주는 선물이었죠. 조선후기에 상평통보가 유통되면서 달라진, 개인의 일상은 물론 사회 현상에 대해 자료를 중심으로 미시적으로 논증했어요. 제 연구는 모두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 뿌리는 바로 장서각에서 전국을 누비며 발굴한 자료들입니다. 늘 우리 연구원과 장서각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장서각에서 10년 즈음 연구하고 또 장서각의 성격을 이해하게 되면서 민간 기록자료 뿐만 아니라 우리 장서각 왕실자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간 틈틈이 왕실자료에 대해 검토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2011년부터 ‘왕실문화연구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모두 11분의 선배 선생님들과 함께 근 4년을 함께 연구하면서 왕실자료의 중요성과 연구지평을 깨닫게 되었어요. 저는 왕실의 여러 의례에서 산견되는 재원운영의 특징을 추적하는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장서각의 의궤와 등록 그리고 왕실고문서를 대상으로 혼인에서 장례에 이르는 여러 의례에 있어 물력과 인력을 동원한 실체를 추적했습니다. 연구마무리에 시간이 많이 걸려 2019년이 되어서야 『조선왕실의 의례와 재원』으로 출간할 수 있었네요. 이 책에서 왕실과 국가의 재원운영의 복잡성이 조선적 특징의 하나일 수 있다는 주장을 시도했어요.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 책을 계기로 장서각에서 연구하면서 민간 고문서와 왕실자료를 모두 연구하는 구성원이 되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생겼어요.



20여년을 꽤 숨가쁘게 달려오셨어요.


수학했던 University of Bristol 전경

수학했던 University of Bristol 전경

페루 현장에서 관련 연구자들과 함께

페루 현장에서 관련 연구자들과 함께

장서각에서 10년이 훌쩍 넘다 보니 조금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평소 고민이 있었죠. 앞에서 말씀드린 여러 장서각 관련 연구사업의 결과는 제가 기획한 것이 아니었고, 또 무엇보다 함께 연구하시는 선생님들과 연구 분야의 차별성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힘들었어요.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어요. 장서각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지만 그 대상은 주로 조선시대 종가 중심이라는 사실에 주목했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시기에 마을에 남겨진 자료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마을을 대상으로 연구의 시점을 좀 더 근·현대로 내려와 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죠. 다행스럽게도 제 연구 분야와도 관련이 깊었죠. 그래도 나이 40을 바라보던 2013년에 휴직을 하고 유학을 결행했어요. 영국에서 농촌개발을 주제로 1년 동안 수업을 듣고 학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가족이 함께 했는데, 월급도 휴직으로 줄어들고 또 수업과 논문도 함께 병행해야 해서 지금 생각해도 다시 할 수 없는 고난의 행군이었어요. 장서각에 복귀해서도 휴가를 이용해 베트남, 에티오피아, 수단, 페루, 에콰도르 등지의 농촌을 조사하기 위해 지구를 한 바퀴 돌았어요.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게 마을을 주제로 보다 폭 넓은 자료를 수집해서 장서각 자료를 확충하고 싶어요. 물론, 영국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장서각 한문워크숍에 참여하여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는 했네요.



바쁜 일과를 끝내면 개인적인 여가시간은 무얼 하며 보내시나요?


DMZ에서 그린 큰 딸 작품

DMZ에서 그린 큰 딸 작품

저희 가족은 다섯 식구에요. 앞에서 잠시 이야기 했지만 예전에는 저도 믿기지 않지만 일 년의 많은 부분을 출장으로 보냈어요. 지금까지 큰 불평 없이-물론 이건 제 주관적인 생각이에요- 묵묵히 지켜봐주고 있는 내자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큽니다. 그리고 늘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떤 때는 일주일 동안 아이들 얼굴을 못 보고 지날 때도 있어요. 마음이 아파요. 얼마 전 충격적인 일이 있었어요. 우리 장서각에 인턴으로 오신 선생님께서 사용하는 머그잔에 “다시 태어나도 아빠 딸♡”이라 쓰인 문구를 보았어요. 붉은색 하트에 검은색 디자인 문자로 쓰여 있었죠. 그래서 다음날 집에서 슬쩍 그이야기를 꺼냈더니 반응이 썰렁하더라구요.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어요. 친구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럼 “다시 태어나도 우리 딸 아빠♡”라는 말을 해 주라고 하던데.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볼까해요. 역효과일까요? 좀 서툴러서...

인터뷰가 고맙네요. 늘 가족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장서각과 연구에만 매달려 있던 저를 돌아보게 되고, 또 가족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네요. 저는 우리 가족을 사랑해요, 이제 좀 바뀌어야겠어요. 여행도 좀 다니고, 취미도 만들어보고. 물론 가족과 함께!



개인적으로 연구원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정수환 사진

저는 우리 연구원과 장서각을 사랑해요. 저의 연구는 항상 장서각을 향해 있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학중앙연구원’이라는 작명이 자랑스럽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국학’운동의 저력과 관점을 우리 연구원이 ‘한국학’이라는 비전으로 확장하고 승화시켰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 중심에 장서각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우리 연구원 그리고 한국학의 튼튼한 뿌리가 장서각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한국학을 위해 장서각이 기여할 차별화된 분야를 발굴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말씀드린 지난 장서각에서의 20년의 연구 사업은 제가 개발한 내용은 아니에요. 모두가 선배님들의 창의성에 저는 묻어왔다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한국학의 관점에서 마을을 대상으로 자료를 발굴하고 이를 해외한국학 연구와 연결할 수 있는 분야 개척을 위해 도전하겠습니다. 가능하지 않을까 해요. 우리 장서각에는 지난시간 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이 있거든요.

뜻하지 않은 인터뷰는 처음에 조금 망설여지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또 가족을 되새기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에게 주어진 책임감과 동료들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