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기묘제현의 꿈과 좌절

『기묘제현수필·수첩』(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김백희사진
김백희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책임연구원

사화(士禍)는 조선 전기 성종 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士林)들이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 훈구(勳舊) 세력들로부터 받은 정치적 탄압이다. 기묘제현(己卯諸賢)은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당한 사림들을 묶어서 지칭하는 말이다. 중종은 진성대군의 신분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든 훈구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즉위한 임금이다. 불안한 권력으로 출발한 것이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에 의해 발생한 중종반정은 중종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며, 중종은 혁명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므로 즉위 초기에는 반정공신인 쿠데타의 주역이 장악한 정치권력에 위축되어 불안한 왕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영명한 군주의 자질을 지닌 중종은 연산군 시절의 폐해를 극복하고 유학적 치세(治世)의 기풍을 확립하고자 하면서, 유학의 이념과 덕망을 지닌 신진 사림들을 골고루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등용되는 인물들이 조광조·김식·기준·한충·김구·김정·박훈·김안국 등이며, 이들이 기묘제현의 주축을 이룬다.


유학의 이념은 내성외왕(內聖外王)·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원리로 삼는 도학(道學)의 정치가 핵심이다. 공맹(孔孟) 유학의 정치철학에서 볼 때, 군왕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민본(民本)·위민(爲民) 의식을 토대로, 성군(聖君)의 자질을 닦으려 부단히 수양을 쌓아야 한다. 성군을 보좌하면서 백성의 안락한 삶을 위해 헌신하는 사대부 관료 계층도 수기치인의 한 축을 담당하기 위하여 수양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군주론(聖人君主論)은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 된다. 중종은 초기에 자발적으로 성인군주의 위상을 갖추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과도한 수양의 요구와 조급한 지치(至治) 이념의 강요로 인하여,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점차 이들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된다.


도학정치의 이상이 지나친 이념적 편향으로 기울게 되면, 순수주의(純粹主義)로 귀결된다. 순수주의는 세상을 이분법의 시각으로 양단한다. 나아가 순수와 혼탁, 군자와 소인, 충신과 간신, 중심과 주변 등의 이분법이 자연스럽게 고착화되면서 순수한 가치에 반대가 되는 대상을 멸절(滅絶)시키려는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이른바 전형적인 순수주의 폐단이 발생한다.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제현들은 순수한 이념으로 무장한 동지(同志)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현량과(賢良科)를 마련하였고, 정치현장에서 간신(奸臣)의 무리들을 솎아내고자 반정공신 중의 상당수 위훈(僞勳)을 삭제하였으며, 유학의 이념을 오염시키는 도교를 찍어내고자 소격서의 혁파를 시도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지나친 무리를 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화를 불러서 자신들의 이념과 생명을 좌절시키게 된다. 기묘사화가 발생하면서 조광조를 위시한 도학정치 주도세력은 사약과 귀양 등으로 갖은 화를 당한다. 『기묘제현수필·기묘제현수첩(己卯諸賢手筆·己卯諸賢手帖)』(한국학중앙연구원, 2006)은 기묘사화 당시 외직(外職)에 나가 있어 상대적으로 큰 화를 당하지 않은 안처순(安處順)이 구례현감으로 부임할 적에 준 전별(餞別)의 문장과 이후 주고받은 서간(書簡)을 묶어서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조광조가 안처순에게 준  전별시 친필

조광조가 안처순에게 준 전별시 친필

기묘제현의 꿈은 짧은 실험정치로 끝나면서 좌절되었지만, 그 씨앗은 면면히 이어져 사림(士林)의 시대가 도래(到來)하는 원천이 된다. 나아가 유학적 경세(經世) 철학이 치국의 원리로 확고하게 정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풍속 전체를 유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장서각에서는 금년 하반기 전시의 주제로 “기묘제현”을 잡아서 준비하고 있다. 이 번 전시를 통해서, 난세(亂世)를 주도하면서 요순(堯舜) 시절의 이상사회 구현을 꿈꾼 기묘제현의 이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상사의 거성(巨星)인 그들의 꿈과 이상이 현대적으로 재해석 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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