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포커스
한국 음식 - 6
K-푸드의 탄생: 20세기 한국 음식의 역사
Ⅵ. 압축성장의 식탁
1. 압축성장과 현대식 식품산업의 구축
압축성장(condensed economic growth)은 짧은 기간 안에 이룩한 급격한 경제성장을 말한다. 영국은 1780년에서 1838년까지 58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로 늘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국민소득이 두 배로 늘어나는 데 1839년에서 1886년까지 47년, 일본은 1885년에서 1919년까지 34년, 한국은 1966년에서 1977년까지 11년이 걸렸다. 한국은 매우 빠른 속도로 국민소득을 올린 셈이다. 같은 기간에 한국인 1인당 실질국민소득은 1966년 182만 원에서 1977년 445만 원으로 증가했다. 1980년에 약간 줄어들었지만, 그 이후 계속 늘어나서 1992년에는 1,375만 원이나 되었다. 1965년 이후 한국 경제는 매년 10% 전후의 성장을 달성했다.
1980년대 초반 경제는 상승 곡선을 그리며 성장했다. 이러한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1986~1988년 사이 석유 가격, 달러 가치, 국제 금리가 낮게 유지된 이른바 ‘3저 호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금리가 낮아 외국 돈을 빌려 생산에 투자하기 좋았고, 달러 가치가 낮아 원자재 수입에 드는 비용보다 제품을 수출하여 벌어들이는 수익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싼값의 석유는 에너지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국민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1983년 1만 달러를, 1989년 2만 달러를 넘었다. 그야말로 1980년대 한국 경제는 역사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국민소득의 증가는 식품 소비 욕구를 자극하여 가공식품의 생산량도 동시에 늘어났다. 1975년 국내의 소시지 생산량은 2,819톤, 1982년에 2만 9,272톤이나 되었다. 유산균 발효유의 생산은 1975년 9,111톤에서 1982년이면 19만 6,567톤으로 무려 21.6배가 증가했다. 콩기름 생산량은 1975년에 6,303킬로리터였는데, 1982년에 8만 5,487킬로리터로 13.6배나 늘었다. 이와 같은 지표는 1975년부터 1982년 사이에 식품산업이 엄청난 성장을 했음을 알려준다.
국민의 월평균 식품 구매비 역시 압축성장과 함께 엄청나게 증가했다. 서울에 사는 한 가구의 월평균 식품 구매비는 1975년 2만 8,960원이었으나, 1982년에는 10만 6,938원으로 늘었다. 외식비 역시 가구당 월평균 지출액이 1975년에 623원에 지나지 않았는데 1982년에 6,243원으로 증가했다. 1970년대 중․후반만 해도 음식점 대부분은 밥집과 술집이었으므로 외식산업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외식산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1965년 국내 식품산업의 총생산액은 547억 원이었지만, 10년 뒤인 1975년에는 1조 407억 원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식품회사 대부분은 1970~1980년대에 종합식품회사로 탈바꿈했다. 1980년에 들어와서 국내 식품회사는 외국 업체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제품의 품질을 높이는 데 몰두했다. 당시 식품 대기업들은 1980년대를 인스턴트식품이 중심이 되는 식생활 패턴이 자리 잡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외국의 기술과 최신 기계를 도입해 종합식품회사의 시설과 판매망을 마련했다.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은 다른 말로 하면 식품산업의 압축성장이었다.
한편, 미국식 패스트푸드(Fast Food) 산업의 국내 유입은 한국 외식업의 산업화를 재촉했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아케이드에서 문을 연 일본 롯데그룹의 롯데리아(Lotteria) 1호점이 국내 첫 패스트푸드 매장이다. 1983년 던킨도너츠(dunkindonuts), 1984년 버거킹(Burger King),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 웬디스(Wendy’s), 1985년 피자헛(Pizza Hut), 피자인(Pizza Inn), 배스킨라빈스(Baskin Robbins), 1988년 맥도날드(McDonald’s) 등의 미국 패스트푸드 기업의 매장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대도시의 번화가에 하나하나 자리 잡아 갔다.
미국식 패스트푸드 기업의 국내 진출은 한국 소비자들의 넉넉해진 주머니를 노린 외국 업체들의 노림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인이 모이는 체육행사에서 ‘낙후된’ 한국음식점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미국식 문화를 소비했다.
미국의 패스트푸드점은 기술을 보유한 프랜차이저(franchisor, 본사), 기술을 전수하는 프랜차이지(franchisee, 가맹점)의 체제로 운영된다. 이러한 방식의 프랜차이즈 매장이 성공하자 이를 벤치마킹한 한식업체도 생겼다. 이 업체가 프랜차이즈 체제에 성공하자 이후 한식 음식점의 프랜차이즈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미국 패스트푸드점의 영향을 받은 한식 음식점은 점차 위생적인 주방과 홀을 갖추어 갔다. 소비자들도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셀프서비스나 줄 서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한식 음식점은 현대성(modernity)을 확보했다.
2. 양돈장의 개량과 삼겹살구이의 유행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마다 돼지를 한두 마리씩 키우면서 전용 사료가 아닌 주로 음식물 찌꺼기를 먹여 키웠다. 이렇게 키운 돼지의 고기에서는 고약한 비린내가 났다. 그래서 부유층에서는 돼지고기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1960~1970년대 소고기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정부에서는 육류 가격의 안정화를 위해 대체제로 돼지고기 식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식품학자와 요리학자까지 동원하여 돼지고기의 영양학적 가치와 요리법을 홍보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소고기 선호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한국의 농가에서는 홍콩이나 일본에 돼지고기를 수출했지만, 품질 면에서 전문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비싼 값을 받지 못했다. 정부는 양돈업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업들에 축산업 진출을 권유했다. 1976년 삼성그룹의 제일제당은 경기도 용인(지금의 테마파크 에버랜드 자리)에 기업형 양돈장을 열었다. 삼성그룹에 속했던 제일제당(지금의 CJ)과 롯데그룹의 롯데햄(지금의 롯데푸드)은 1980년 대단위 육가공 공장을 건설하여 한국산 돼지의 뒷다리 고기로 햄 제품을 생산하여 국내에 유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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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한국의 양돈업체는 돼지의 품종을 식용에 적당한 개량종으로 바꾸고, 배합사료를 먹이는 등 품질이 개선된 돼지고기 생산에 많은 자본과 기술을 투여했다. 그 결과, 육가공품용뿐만 아니라 일본 수출용 돼지고기도 품질이 좋아졌다. 돼지고기 부위 중 안심과 등심은 주로 일본에 수출하였고 나머지 부위는 국내에서 유통되었다. 그중 삼겹살은 국내 소비자들이 구이로 즐겨 먹었다. 1980년대 삼겹살구이의 유행에는 소고기보다 월등히 값이 싼 점이 중요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1980년 6월에 한국에 출시된 일본의 휴대용 가스버너와 일회용 부탄가스가 큰 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으로 생활의 여유가 생기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야외로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부터 야외에서 휴대용 가스버너로 삼겹살구이를 먹는 게 유행처럼 퍼졌다. 결국, 1990년대 이후 삼겹살구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 요리 중 하나가 되었다. |
1990년대 중반부터 프라이팬 위의 삼겹살 구이를 다 먹고 나면 잘게 썬 삼겹살과 배추김치, 그리고 취향에 따라 대파·양파·마늘 등과 쌀밥을 넣고 볶음밥을 만들어 주는 음식점도 생겼다. 삼겹살 구이는 양돈업의 현대화와 외식의 증가, 동물성단백질에 대한 욕구 증가, 그리고 한국인의 고기구이와 비빔밥 선호와 맛의 취향 등이 결합하여 198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3. 미국 육가공제품에서 국산 축육소시지로 : 부대찌개
1970년대부터 공장제 식품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면서 1984년이 되면 연 매출 1,000억 이상의 식품회사가 20여 개에 이르게 된다. 한 식품회사가 연 매출을 1,000억 이상 달성하려면 한두 종의 주력 상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품목을 다양화한 종합식품 회사로의 확장만이 매출 극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형 식품회사마다 동종의 제품을 앞다퉈 내놓는 바람에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의 한 경제신문에서는 ‘식품산업전쟁(食品産業戰爭)’이라고 불렀다.
그중 하나가 축육(畜肉)으로 만드는 육가공(肉加工)제품이었다. 대표적인 육가공제품은 햄(ham), 베이컨(bacon), 소시지(sausage)이다. 본격적인 축육 소시지의 생산은 1980년 10월과 12월에 준공된 롯데햄과 제일제당의 공장에서 시작되었다. 이 두 회사의 공장은 최신 절단 시설과 함께 외부의 오염원을 차단할 수 있는 포장실(bio-clean packing room)까지 갖추었다. 롯데햄과 제일제당은 1981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컬러텔레비전 방송의 광고 경쟁에도 뛰어들었다.
3. 미국 육가공제품에서 국산 축육소시지로 : 부대찌개
1970년대부터 공장제 식품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면서 1984년이 되면 연 매출 1,000억 이상의 식품회사가 20여 개에 이르게 된다. 한 식품회사가 연 매출을 1,000억 이상 달성하려면 한두 종의 주력 상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품목을 다양화한 종합식품 회사로의 확장만이 매출 극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형 식품회사마다 동종의 제품을 앞다퉈 내놓는 바람에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의 한 경제신문에서는 ‘식품산업전쟁(食品産業戰爭)’이라고 불렀다.
그중 하나가 축육(畜肉)으로 만드는 육가공(肉加工)제품이었다. 대표적인 육가공제품은 햄(ham), 베이컨(bacon), 소시지(sausage)이다. 본격적인 축육 소시지의 생산은 1980년 10월과 12월에 준공된 롯데햄과 제일제당의 공장에서 시작되었다. 이 두 회사의 공장은 최신 절단 시설과 함께 외부의 오염원을 차단할 수 있는 포장실(bio-clean packing room)까지 갖추었다. 롯데햄과 제일제당은 1981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컬러텔레비전 방송의 광고 경쟁에도 뛰어들었다.
1983년 소시지를 비롯한 육가공제품의 전체 시장 점유율은 제일제당이 31%, 롯데햄이 26%를 차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태그룹이 새롭게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기존의 한국냉장과 진주햄도 새로 공장을 증설하여 본격적인 경쟁에 나섰다. 그야말로 1980년대 중반, 소시지를 비롯한 육가공제품 시장은 식품산업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인의 입맛도 육가공제품에 길들어졌다. 1990년대 초반이 되면 육가공제품의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지고 기업 간 경쟁도 더 심해졌다. 심지어 햄과 소시지, 그리고 인스턴트라면을 주재료로 부대찌개라는 메뉴를 판매하는 음식점도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부대찌개는 햄, 소시지 따위를 재료로 하여 끓인 찌개. 예전에, 미군 부대에서 나온 고기로 찌개를 끓였던 데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음식 이름에 일정한 규모로 편성된 군대 조직을 가리키는 ‘부대(部隊, military uni)’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1970년대 이후 부대찌개에는 인스턴트라면이 들어갔지만, 고기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햄이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햄·소시지 생산과 외식산업의 성황은 부대찌개를 미군 부대 근처를 벗어나서 전국으로 퍼져나가도록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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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음식의 한국화 : 김밥과 조미김
김밥은 일본음식인 노리마끼스시(海苔卷寿司)와 인연이 깊다. 노리마끼스시의 요리법은 19세기 말 이후 일본인들이 서울에 대거 거주하면서 한국인에게 알려졌다. 김밥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재료인 ‘노랑무’ 혹은 ‘단무지’는 일본의 츠케모노(漬物)인 다쿠앙쓰케(澤庵漬け)가 진화한 것이다. 이것을 길게 잘라서 김밥을 말 때 같이 넣어야 진정한 김밥이 완성된다.
김밥은 일본음식인 노리마끼스시(海苔卷寿司)와 인연이 깊다. 노리마끼스시의 요리법은 19세기 말 이후 일본인들이 서울에 대거 거주하면서 한국인에게 알려졌다. 김밥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재료인 ‘노랑무’ 혹은 ‘단무지’는 일본의 츠케모노(漬物)인 다쿠앙쓰케(澤庵漬け)가 진화한 것이다. 이것을 길게 잘라서 김밥을 말 때 같이 넣어야 진정한 김밥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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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문헌에는 김을 해의(海衣) 혹은 해태(海苔)라고 적었다. 김의 대중적인 소비는 식민지시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히로시마현의 해태업자들이 한반도로 와서 남서해안이 해태양식의 적지라고 판단하고 해태양식과 제조 방법을 개량한 데서 근대적 김 생산이 시작되었다. 1922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해태의 시험 양식이 이루어졌고, 1925년 서남해 연안의 도서에서 해태양식이 자리를 잡았다. 1930년대가 되면 한국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김을 구매하는 일이 그 전보다 수월해졌다. |
해방 이후에도 비록 일본과 다시 정식으로 수교를 체결하지 않았지만, 식민지기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김은 일본으로 수출되는 중요한 상품이었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해태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시로 한국으로부터 수입을 제한하였다. 1964년 6월 일본과의 정식 수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해태를 비롯한 몇 가지 수산물에 대한 수입 제한 조치를 풀어주겠다는 선심을 보였다. 이후 한국에서 생산된 김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70년대 이후 김밥은 김의 생산량 증가와 함께 국내 소비도 늘어났다. 김밥은 초중고등학교의 소풍은 물론이고 나들이 때 갖춰야 하는 음식으로 이해되었다. 김 생산이 많아진 1970년대에 한국의 부유층 가정에서는 겨울이 되면 김을 사서 소금과 참기름을 곁에 발라 연탄불에 구워 밥을 싸 먹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김치김밥이 개발되었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김밥전문점이 도심에서 문을 열었다. 기존의 분식집 김밥과 달리 치즈김밥·고추김밥·누드김밥·샐러리김밥 따위가 이들 김밥전문점에서 개발되어 판매되었다. 집에서 직접 만들던 조미김은 식품업체에서 제조하여 판매했다.
한국의 김은 한 겹인 데 비해, 일본의 김은 두 겹이라 두껍다. 중국에서도 김을 생산하지만, 일본 제조법을 채택하였으므로 맛과 품질에서 한국 김을 따라오지 못한다. 한국인은 밥을 먹을 때 반찬으로 조미김을 먹지만, 미국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간식으로 스낵김이나 김부각을 먹는다.
5. 식탁의 육식화로 인한 쌀 소비의 감소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 500달러를 넘어서면 경제성장의 성과로 육류 소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한다는 주장이 있다. 한 국가의 경제 수준이 이 정도에 도달하면 기아나 감염성 질환이 줄어드는 대신에 육류 섭취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1974년 한국의 1인당 국내 총생산은 500달러를 넘어섰다. 1975년 1인당 1일 육류 공급량은 25.4g이었던 데 비해, 1987년에 52.3g, 1994년에 81.5g, 2000년에 102.8g으로 늘어났다. 식단의 육식화(meatification)가 진행되면 일반적으로 곡류 소비가 감소하게 된다. 1990년대 한국인의 식탁 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미국과 동아시아 각국의 인류학자로 구성된 연구팀은 일본·한국·타이완에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체인점의 확산에 관한 연구에서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은 위생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상징인 셀프서비스와 줄 서기를 통해 서구적 근대성의 사례와 기호를 제공받았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최를 앞두고 한국 사회에서 진행된 한식 프랜차이즈화 역시 음식점 환경을 위생적으로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
다만, 셀프서비스와 같은 서구적 근대성은 인건비를 줄이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음식점마다 지니고 있던 깊은 손맛을 잃어버리고, 음식 맛의 균질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한국의 한식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의 맛이 균질화한 이유도 프랜차이즈화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김밥은 김의 생산량 증가와 함께 국내 소비도 늘어났다. 김밥은 초중고등학교의 소풍은 물론이고 나들이 때 갖춰야 하는 음식으로 이해되었다. 김 생산이 많아진 1970년대에 한국의 부유층 가정에서는 겨울이 되면 김을 사서 소금과 참기름을 곁에 발라 연탄불에 구워 밥을 싸 먹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김치김밥이 개발되었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김밥전문점이 도심에서 문을 열었다. 기존의 분식집 김밥과 달리 치즈김밥·고추김밥·누드김밥·샐러리김밥 따위가 이들 김밥전문점에서 개발되어 판매되었다. 집에서 직접 만들던 조미김은 식품업체에서 제조하여 판매했다.
한국의 김은 한 겹인 데 비해, 일본의 김은 두 겹이라 두껍다. 중국에서도 김을 생산하지만, 일본 제조법을 채택하였으므로 맛과 품질에서 한국 김을 따라오지 못한다. 한국인은 밥을 먹을 때 반찬으로 조미김을 먹지만, 미국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간식으로 스낵김이나 김부각을 먹는다.
5. 식탁의 육식화로 인한 쌀 소비의 감소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이 500달러를 넘어서면 경제성장의 성과로 육류 소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한다는 주장이 있다. 한 국가의 경제 수준이 이 정도에 도달하면 기아나 감염성 질환이 줄어드는 대신에 육류 섭취량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1974년 한국의 1인당 국내 총생산은 500달러를 넘어섰다. 1975년 1인당 1일 육류 공급량은 25.4g이었던 데 비해, 1987년에 52.3g, 1994년에 81.5g, 2000년에 102.8g으로 늘어났다. 식단의 육식화(meatification)가 진행되면 일반적으로 곡류 소비가 감소하게 된다. 1990년대 한국인의 식탁 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미국과 동아시아 각국의 인류학자로 구성된 연구팀은 일본·한국·타이완에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체인점의 확산에 관한 연구에서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은 위생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상징인 셀프서비스와 줄 서기를 통해 서구적 근대성의 사례와 기호를 제공받았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최를 앞두고 한국 사회에서 진행된 한식 프랜차이즈화 역시 음식점 환경을 위생적으로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
다만, 셀프서비스와 같은 서구적 근대성은 인건비를 줄이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음식점마다 지니고 있던 깊은 손맛을 잃어버리고, 음식 맛의 균질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한국의 한식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의 맛이 균질화한 이유도 프랜차이즈화 때문이다.
Infokorea 2024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