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포커스
전쟁의한국 음식 - 5
K-푸드의 탄생: 20세기 한국 음식의 역사
Ⅴ. 냉전의 식탁의 식탁
1. 냉전과 국가의 식생활 통제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으로 6년 동안 진행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냉전(cold war)’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냉전’은 1947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전개된 정치·군사·경제적 긴장을 가리킨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미국은 일본·타이완·인도와 남한에 자국의 남아도는 농산물을 비롯한 자원을 지원해 패권을 강화했다. 소련 역시 자원과 기술을 동유럽의 국가들과 쿠바, 그리고 북한에 지원했다.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기간인 1945년부터 1953년까지는 긴급구호 원조 기간이었다.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1961년까지는 본격적인 원조가 이루어진 시기다. 미국은 이 기간에 ‘상호안전보장법(MSA)’에 근거하여 군사와 잉여농산물을 주로 원조했다. 1962년부터 1993년까지의 기간은 차관(借款) 전환 시기였다. 즉, 미국은 ‘대외원조법(FAA)’에 근거하여 ‘달러’를 한국 정부에 빌려주었다. 동시에 1970년대까지 미국은 잉여농산물 원조를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1956년 한국 정부와 PL480을 처음 체결할 때, 도입 농산물의 판매액을 한국 통화로 적립하고, 그중 일부는 한국의 미국 원조 기관의 비용으로 충당하며, 나머지는 한미 사이의 합의에 따라 한국의 경제개발과 군사력 지원에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의 밀 생산 농민들은 폐기할 뻔한 남아도는 밀을 한국 같은 저개발 국가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고, 미국 정부는 원조 명분을 내세워 한국 정부와 군사적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구축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1950년대 혼분식 권장을 쌀 절약과 미국의 잉여농산물 중 밀을 통한 식생활 개선 정책으로 바꾼 박정희 정부는 밥만 쌀로 짓게 하고, 막걸리·청주·소주·떡볶이 등을 미국산 밀가루나 외국산 곡물로 만들도록 강제했다. 강력한 행정력이 동원되어 시행되었던 분식 장려운동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의 분식 소비가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2. 일본의 치킨라멘에서 한국의 소고기라면으로
1946년 패전국 일본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자국의 잉여농산물인 밀을 일본 가정에 구호물자로 배급했다. 타이완 출신으로 1933년부터 오사카에서 메리야스 사업을 하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1910~2007, 중국 이름 우바이푸(吳百福))는 1948년 미국에서 공짜로 들여온 밀로 인스턴트라멘을 개발했다. 그는 타이완과 중국 남부 사람들이 더운 날씨에 국수를 부패하지 않게 하려고 개발한 기름에 튀겨낸 유면(油麵)에 주목했다. 유면은 매우 짧은 시간에 국수를 높은 온도의 기름에 튀겨 말린 후 바로 포장했다가 뜨거운 물만 부으면 다시 부드러운 국수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치킨라멘(チキンラーメン)’이 개발되었다.
1958년 6월, 안도 모모후쿠는 오사카의 가장 번화가인 우메다(梅田)의 한큐(阪急)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서 치킨라멘을 시식하는 행사를 열었다. 당시 우동 한 사리가 6엔이었는데, 치킨라멘은 35엔으로 매우 비쌌다. 그런데도 치킨라멘은 ‘마법의 라멘’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불티나게 팔렸다. 치킨라멘이 성공하자 다른 식품회사에서도 앞다퉈 비슷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다. 1962년 6월 묘조식품(明星食品)의 오쿠이 기요스미(奥井清澄, 1919~1973) 은 스프를 별도로 제공하는 인스턴트라멘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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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삼양식품 대표 전중윤(全仲潤, 1919~2014)은 일본에서 인스턴트라멘이 유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1962년 제조 기계를 수입하려고 한국과 외교 관계가 없던 일본에 갔다. 그러나 안도 모모후쿠의 특허권과 제조 기계를 사려면 상당히 높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절망하고 있던 전중윤은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도움으로 당시 일본 인스턴트라멘 업계의 2위였던 오쿠이 기요스미를 만났다. 오쿠이 기요스미는 전중윤을 만나서 한국전쟁 때 일본이 미군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여 경제가 재건되었다고 말하면서 바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오쿠이 기요스미는 전중윤에게 모든 시설과 기술을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전중윤은 일본어 ‘라멘’을 한국어로 ‘라면’이라고 불렀다. 1963년 9월 15일, 마침내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라면인 ‘즉석 삼양라면’이 시장에 나왔다. 삼양라면은 묘조식품처럼 스프를 국수와 별도로 첨부한 형태였다. |
처음 인스턴트라면을 접한 한국인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라면’이란 이름이 당시 한국인에게 너무 생소했다. 한국인 중에는 라면을, 옷감을 뜻하는 ‘라면(羅棉)’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둘째, 쌀밥 위주의 식생활에서 분식인 라면을 주식으로 여기는 한국인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 광고와 길거리 시식 행사를 통해서 이러한 인식이 점차 바뀌어 갔다. 발매 첫해인 1963년 12월 삼양라면의 판매량은 20만 봉지였지만 1964년 5월에는 73만 봉지로, 반년도 되지 않아 판매량이 세 배로 늘어났다.
후발 업체인 롯데공업(지금의 농심)은 1965년 ‘소고기라면’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출시되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소고기라면’은 스프의 재료로 소고기·소뼈·고춧가루 등을 사용했다. 닭고기 국물보다 소고기 국물을 더 좋아했던 한국인은 ‘소고기라면’을 마치 소고기 국물로 여겼다. 라면 업체에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추·마늘·양파 등을 건조해 스프에 넣었다. 이처럼 라면 스프의 맛을 국물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하면서 점차 한국의 인스턴트라면은 일본식 인스턴트라면과 차별화된 독특한 맛을 내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인스턴트라면을 선택할 때 국수 품질보다 국물 맛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3. 미국 콩으로 짠 식용유와 양계업, 그리고 통닭
1959년 3월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지원하던 한국군의 경비 일부를 더는 부담할 수 없다며 연차적으로 한국 정부에서 부담하라고 제의했다. 결국, 미국의 제의에 합의한 한국 정부는 1960~1961년 한국군의 군복과 급식 부분 비용인 1,080만 달러를 부담하게 된다. 그동안 미국 정부가 한국군에 지원한 품목 가운데 84만 달러어치의 대두가 포함되어 있었다. 1967년 한국 정부는 미국산 대두 1만 4,850톤을 사기로 했다. 계약 당사자는 미국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대형 곡물 기업이었다. 미국산 대두는 값싼 식용유의 생산과 함께 기름을 짜고 남은 대두박(soybean cake)이 닭의 먹이로 활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소고기 위주 육식 소비로 인해 소고기의 값이 폭등하자, 한국 정부는 이것을 해결할 방안으로 질 좋은 닭고기 생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북미의 양계업자들은 닭고기 판매를 목적으로 할 경우, 브로일러(broiler)라고 불리는 육계(肉鷄)를 키우고 있었다. 브로일러는 부화한 지 8~10주쯤 된 무게 1.5~2.0kg의 닭을 가리킨다. 1969년 한국 국내의 소고기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육류 파동이 일어나자, 대체재로 브로일러 소비가 증가했다.
후발 업체인 롯데공업(지금의 농심)은 1965년 ‘소고기라면’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출시되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소고기라면’은 스프의 재료로 소고기·소뼈·고춧가루 등을 사용했다. 닭고기 국물보다 소고기 국물을 더 좋아했던 한국인은 ‘소고기라면’을 마치 소고기 국물로 여겼다. 라면 업체에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추·마늘·양파 등을 건조해 스프에 넣었다. 이처럼 라면 스프의 맛을 국물 음식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하면서 점차 한국의 인스턴트라면은 일본식 인스턴트라면과 차별화된 독특한 맛을 내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인스턴트라면을 선택할 때 국수 품질보다 국물 맛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3. 미국 콩으로 짠 식용유와 양계업, 그리고 통닭
1959년 3월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지원하던 한국군의 경비 일부를 더는 부담할 수 없다며 연차적으로 한국 정부에서 부담하라고 제의했다. 결국, 미국의 제의에 합의한 한국 정부는 1960~1961년 한국군의 군복과 급식 부분 비용인 1,080만 달러를 부담하게 된다. 그동안 미국 정부가 한국군에 지원한 품목 가운데 84만 달러어치의 대두가 포함되어 있었다. 1967년 한국 정부는 미국산 대두 1만 4,850톤을 사기로 했다. 계약 당사자는 미국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대형 곡물 기업이었다. 미국산 대두는 값싼 식용유의 생산과 함께 기름을 짜고 남은 대두박(soybean cake)이 닭의 먹이로 활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소고기 위주 육식 소비로 인해 소고기의 값이 폭등하자, 한국 정부는 이것을 해결할 방안으로 질 좋은 닭고기 생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북미의 양계업자들은 닭고기 판매를 목적으로 할 경우, 브로일러(broiler)라고 불리는 육계(肉鷄)를 키우고 있었다. 브로일러는 부화한 지 8~10주쯤 된 무게 1.5~2.0kg의 닭을 가리킨다. 1969년 한국 국내의 소고기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육류 파동이 일어나자, 대체재로 브로일러 소비가 증가했다.
마침 콩기름을 비롯하여 식용유 생산이 늘어나 브로일러 닭을 통째로 기름에 튀긴 통닭을 판매하는 곳이 생겨났다. 일명 ‘통닭집’이 시장 안 곳곳에 들어섰다. 사람들은 고온의 기름에 튀긴 바삭한 식감과 부드러운 고기 맛을 즐겼다. 이 통닭은 국내에 주둔한 미군들이 즐겨 먹던 프라이드치킨을 모방한 음식이었다. 당시 한국인은 야유회나 가족 모임, 소풍이나 휴가를 갈 때 통닭을 싸가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콩기름이 식용유의 대표 자리를 차지했다. 식용유 수요가 날로 증가하자, 정부는 외국산 식용유를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3년부터 미국 정부는 자국의 옥수수기름, 해바라기기름, 콩기름을 한국 수출 상품으로 내세웠다. 국내 식용유 수요가 늘어나면서 수입량은 해마다 증가했다. 냉전의 경계선에 있던 한국 사회는 미국산 식용유 수입과 함께 미국식 통닭을 한국 음식으로 진화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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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맛없는 쌀을 돌솥에 : 돌솥비빔밥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은 곡물 품종 개량을 통해 수확 증대를 이루어 식량 공급에 성공하자는 정책이다. 녹색혁명은 곡물의 품종 개량, 화학비료와 살충제 등으로 주곡의 생산량을 증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고도의 근대화 프로그램이다. 한국 정부는 1970년부터 세계은행과 국제개발처(AID) 등에서 장기간의 재정 차관을 통해서 농촌에서의 녹색혁명을 추진할 준비를 시작했다. 녹색혁명의 열쇠는 벼 품종의 개량이었다. 재래 벼와 비교해 수확량이 많으면서도 홍수와 태풍 및 병충해를 잘 견디는 품종, 이것이 녹색혁명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196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허문회(許文會, 1927~2010)는 벼 품종을 개량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 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에 가서 약 24개월 동안 벼 품종 개량에 참여했다. 허문회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얻어온 인디카인디카(Indica, 중국 남부와 필리핀·동남아시아·인도 등지에서 재배하는 찰기가 적은 쌀 품종) 품종인 IR8의 암술을 이용해 1966년 3월 상순 20여 개의 볍씨를 얻었고, IR667이란 이름을 붙인 이 잡종 벼는 한국 녹색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샘플 중 한 볍씨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 시험 재배와 볍씨 증식에 들어갔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이 품종을 ‘통일(統一)’이라고 이름 지었다. 즉, 이 볍씨로 쌀을 많이 생산하여 북한으로 보내 밥으로 통일하자는 염원을 이름에 담았다. 1971년부터 재배에 들어간 통일벼는 1973년에 더 확대 재배되었다. 그러나 통일벼에 대한 농민들의 초기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수확량이 많은 점은 농민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새로운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과 안정적인 수확 지표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통일벼 재배를 확대하기 위해 농협을 통한 영농자금 융통, 화학비료와 농약 공급 시 우대하겠다며 농민들의 통일벼 재배를 유도했다. 1976년 11월 정부는 그해 쌀 수확량이 3,621만 5,000섬, 즉 521만 5,000톤으로 역사상 최대 풍작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성과는 통일벼 재배지 확산의 결과였다.
소비자들은 통일벼의 밥맛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1977년 초 새로운 벼 품종인 수원 264호와 이리327호를 개발하여 재배를 장려하고 기존 통일벼 계통의 벼는 재배지를 축소해나갔다. 통일벼는 수확량 면에서는 두드러졌지만,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1981년 전두환의 군사정부는 통일벼 장려 정책을 폐지했다. 그리고 1992년 정부는 추곡 수매 품목에서 통일벼를 제외했다.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은 곡물 품종 개량을 통해 수확 증대를 이루어 식량 공급에 성공하자는 정책이다. 녹색혁명은 곡물의 품종 개량, 화학비료와 살충제 등으로 주곡의 생산량을 증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고도의 근대화 프로그램이다. 한국 정부는 1970년부터 세계은행과 국제개발처(AID) 등에서 장기간의 재정 차관을 통해서 농촌에서의 녹색혁명을 추진할 준비를 시작했다. 녹색혁명의 열쇠는 벼 품종의 개량이었다. 재래 벼와 비교해 수확량이 많으면서도 홍수와 태풍 및 병충해를 잘 견디는 품종, 이것이 녹색혁명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196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허문회(許文會, 1927~2010)는 벼 품종을 개량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 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에 가서 약 24개월 동안 벼 품종 개량에 참여했다. 허문회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얻어온 인디카인디카(Indica, 중국 남부와 필리핀·동남아시아·인도 등지에서 재배하는 찰기가 적은 쌀 품종) 품종인 IR8의 암술을 이용해 1966년 3월 상순 20여 개의 볍씨를 얻었고, IR667이란 이름을 붙인 이 잡종 벼는 한국 녹색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샘플 중 한 볍씨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 시험 재배와 볍씨 증식에 들어갔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이 품종을 ‘통일(統一)’이라고 이름 지었다. 즉, 이 볍씨로 쌀을 많이 생산하여 북한으로 보내 밥으로 통일하자는 염원을 이름에 담았다. 1971년부터 재배에 들어간 통일벼는 1973년에 더 확대 재배되었다. 그러나 통일벼에 대한 농민들의 초기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수확량이 많은 점은 농민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새로운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과 안정적인 수확 지표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통일벼 재배를 확대하기 위해 농협을 통한 영농자금 융통, 화학비료와 농약 공급 시 우대하겠다며 농민들의 통일벼 재배를 유도했다. 1976년 11월 정부는 그해 쌀 수확량이 3,621만 5,000섬, 즉 521만 5,000톤으로 역사상 최대 풍작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성과는 통일벼 재배지 확산의 결과였다.
소비자들은 통일벼의 밥맛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1977년 초 새로운 벼 품종인 수원 264호와 이리327호를 개발하여 재배를 장려하고 기존 통일벼 계통의 벼는 재배지를 축소해나갔다. 통일벼는 수확량 면에서는 두드러졌지만, 국민의 입맛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1981년 전두환의 군사정부는 통일벼 장려 정책을 폐지했다. 그리고 1992년 정부는 추곡 수매 품목에서 통일벼를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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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없는 쌀인 통일벼가 음식점에 제공되자, 새로운 요리법이 개발되었다. 바로 돌솥비빔밥이 그것이다. 돌솥비빔밥은 고기나 나물 따위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어 비벼 먹는 비빔밥을 돌솥에 넣고 불에 익혀 먹는 음식이다. 1981년 서울 명동에 진출한 전주의 ‘전주중앙회관’에서는 전라북도 장수의 곱돌로 만든 그릇에 비빔밥을 담아서 팔았다. 지글지글 끓는 돌솥에 놓인 육회비빔밥은 보통의 육회비빔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쌀밥의 맛이 좋지 않으면 비빔밥의 맛도 좋지 않지만, 돌솥의 비빔밥은 쌀밥의 맛이 족금 떨어져도 맛있는 밥맛을 제공해 주었다. 돌솥을 이용한 창조적인 이 시도는 전주비빔밥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5. 쌀밥의 자급자족을 향한 욕망
1965년경 도입된 일본 벼 품종 아키바레(秋晴)는 밥맛이 찰진 편이라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쌀이 되었다. 농민과 소비자 들은 통일벼와 아키바레벼의 밥맛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아키바레를 훨씬 높이 쳐주었다. 통일벼의 인기가 크지 않자, 농촌진흥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자포니카계의 신품종 육성에 열중했고, 다수확이 가능한 품종을 계속해서 육성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아키바레와 함께 1956년 일본에서 개발된 고시히카리(越光) 품종의 벼를 1990년대 이후 즐겨 먹고 있다.
멕시코의 음식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의 역사학자 엔리케 C. 오초아(Enrique C. Ochoa)는 1940년대 초, 미국의 록펠러재단과 미국 농무부, 멕시코 정부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녹색혁명이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터키·인도·필리핀을 포함해 전 세계 주요 냉전 동맹국들에 신속하게 전파된 사실에 주목했다. 초기 벼 품종 개량의 일부 성공 사례는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모든 농민을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통일벼’라는 이름의 숨은 뜻처럼 1970년대 중반 한국의 녹색혁명은 엄혹한 냉전 상황에서 쌀밥으로 북한을 이기려 했던 박정희의 민족주의와 권위주의가 담긴 망탈리테(mentalite, 심성)였다.
1965년경 도입된 일본 벼 품종 아키바레(秋晴)는 밥맛이 찰진 편이라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쌀이 되었다. 농민과 소비자 들은 통일벼와 아키바레벼의 밥맛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며 아키바레를 훨씬 높이 쳐주었다. 통일벼의 인기가 크지 않자, 농촌진흥청에서는 1980년대 이후 자포니카계의 신품종 육성에 열중했고, 다수확이 가능한 품종을 계속해서 육성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아키바레와 함께 1956년 일본에서 개발된 고시히카리(越光) 품종의 벼를 1990년대 이후 즐겨 먹고 있다.
멕시코의 음식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의 역사학자 엔리케 C. 오초아(Enrique C. Ochoa)는 1940년대 초, 미국의 록펠러재단과 미국 농무부, 멕시코 정부의 과학자들이 개발한 녹색혁명이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터키·인도·필리핀을 포함해 전 세계 주요 냉전 동맹국들에 신속하게 전파된 사실에 주목했다. 초기 벼 품종 개량의 일부 성공 사례는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지만, 실제로 모든 농민을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통일벼’라는 이름의 숨은 뜻처럼 1970년대 중반 한국의 녹색혁명은 엄혹한 냉전 상황에서 쌀밥으로 북한을 이기려 했던 박정희의 민족주의와 권위주의가 담긴 망탈리테(mentalite, 심성)였다.
Infokorea 2024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