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포커스
한국 음식 - 3
K-푸드의 탄생: 20세기 한국 음식의 역사
Ⅲ. 식민지의 식탁
1. 식민지화와 서울의 근대 음식점
조선총독부는 일본 천황의 칙령 제319호 설치령에 따라 1910년 9월 30일 본부와 소속 관서의 관제를 공포하고 10월 1일부터 입법·사법·행정, 그리고 군 통수권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행사했다. 일본은 행정관료·군인·경찰관·교사 등으로 구성된 비교적 적은 숫자의 통치 권력이 일정 기간 한반도에서 근무한 뒤 귀국하는 식민 통치 방식을 택했다. 이들 소수 권력이 중심이 된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은 한반도의 인적·물적 자원을 착취 대상으로 활용하는 데 목표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식민정책을 펼치기 위해 한반도를 근대적인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1910년대 후반이 되면, 한반도 곳곳에 근대적인 도시가 형성되었다. 식민지 근대 도시는 전근대적인 공간과 근대적인 공간,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지역이 구분된 ‘식민지 이중도시(colonial dual city)’였다. 이들 도시 곳곳에는 산업화된(industrial) 한국 음식, 일본 음식, 중국 음식, 서양 음식을 판매하는 공간이 자리 잡았다.
1900년대부터 서울에는 온갖 음식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급 음식점인 조선요리옥을 비롯해 술집·전골집·냉면집·장국밥집·설렁탕집·비빔밥집 등이 있었다. 조선음식점의 손님은 조선인 신사, 노동자 등 계층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술집과 중하급 음식점의 손님들은 한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을 앉거나 서서 먹었다.
2. 빨리빨리! 한국식 패스트푸드 : 설렁탕과 비빔밥
근대 도시 서울에서 문을 연 대중음식점의 메뉴 중 설렁탕과 비빔밥은 가장 인기를 끈 음식이었다. 조선시대 설렁탕과 비빔밥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식사할 때 가장 알맞은 음식이었다. 겨울에는 설렁탕을 비롯한 국밥, 여름에는 비빔밥이 알맞았다. 따라서 설렁탕과 비빔밥은 한국식 패스트푸드였다.
![]() |
설렁탕은 소머리·사골·도가니를 비롯하여 뼈·사태고기·양지머리·내장 등을 재료로 하여 10시간이 넘도록 푹 끓인 음식이다. 설렁탕의 국물에는 살코기와 뼈에서 우러난 흰색의 콜로이드(colloid)가 녹아 있으므로 그 색이 우윳빛을 띤다. 그래서 식민지기의 신문에서는 설렁탕을 ‘설농탕(雪濃湯)’이라고 적었다. 한자 ‘雪濃湯’의 뜻은 마치 그 색이 눈과 같이 희면서 그 맛은 진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1929년 12월 1일에 발간된 잡지 《별건곤》에는 당시 서울 설렁탕집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손님은 설렁탕집에 들어와서 “밥 한 그릇 줘” 하고 걸상에 걸터앉는다. 1분도 못 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손님 앞에 놓인다. 손님은 파·고춧가루·소금과 다진 양념을 넣고 간을 맞춘 다음 국물을 훌훌 마셔가며 먹는다. |
비빔밥은 곡물로 지은 밥에 여러 가지 나물과 된장이나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는 음식이다. 조선 후기의 요리책에 나오는 비빔밥의 요리법에는 나물과 함께 다시마튀각과 익힌 소의 간 등도 들어갔다. 이 재료와 밥을 섞어서 깨소금과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았다. 1921년에 출판된 《조선요리제법》에서는 무나물과 콩나물을 솥에 넣고 불을 때면서 그 위에 밥을 비롯하여 각종 재료와 양념을 넣고 젓가락으로 비빈다고 적었다. 이 비빔밥은 지금 것과 달리 볶은 비빔밥이었다.
하지만 음식점의 비빔밥 요리법은 달랐다. 1929년 12월 1일자 잡지 《별건곤》에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의 음식점에서 판매한 비빔밥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먼저 쌀밥 위에 콩나물, 고사리나물, 숙주나물, 노란색의 청포묵을 놓는다. 그 옆에는 곱게 썬 소고기 육회와 고추장을 올린다. 가정에서는 많은 양의 비빔밥을 한꺼번에 준비하기 위해서 아예 비벼서 개인의 그릇에 담아내지만, 음식점에서는 밥 위에 재료를 올려놓고, 손님이 직접 비벼 먹도록 했다. 가정에서는 식구들이 한꺼번에 비빈 비빔밥을 바로 먹을 수 있었지만, 음식점에서는 손님이 주문할 때마다 밥 위에 재료를 올려 내는 편이 음식의 맛을 유지할 수 있었다. | ![]() |
3. 숯불에서 구운 평양의 불고기, 서울의 소갈비구이
불고기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등을 얇고 넓게 저며서 간장·파·마늘·깨소금·후춧가루․설탕 등으로 만든 양념에 재었다가 불에 굽는 음식이다. 식민지 시기 평양의 불고기와 서울의 소갈비구이가 전국에 이름이 났다.
불고기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등을 얇고 넓게 저며서 간장·파·마늘·깨소금·후춧가루․설탕 등으로 만든 양념에 재었다가 불에 굽는 음식이다. 식민지 시기 평양의 불고기와 서울의 소갈비구이가 전국에 이름이 났다.
![]() |
식민지기의 평양에서는 숯불에 구운 소고기구이가 유행했다. 당시 평양의 소고기는 ‘평양우(平壤牛)’라고 불릴 정도로 그 맛이 좋았다. 봄만 되면 평양의 ‘모란봉’이란 산에 있던 공원 ‘모란대’에는 불고기 굽는 냄새와 사람들의 먹고 마시는 소리로 난리가 났다. 모란대 숲속에는 불고기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던 을송정, 봉황각, 기림정 등의 음식점이 있었고, 이곳에서 숯불에 소고기를 구워서 판매했다. 이와 달리 서울 사람들은 소의 갈비를 숯불에 구워서 먹었다. 1939년 낙원동에 들어선 냉면집에서는 냉면과 함께 갈비구이를 판매했다. 당시 저녁 늦은 시간에 극장이나 요릿집·카페·바 등이 끝나면 술 깨는 데 냉면이 좋다고 하여 낙원동 냉면집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을 시키고 갈비 두 대를 시켜 먹었다. |
4. 화교 음식의 한국화 : 잡채
조선시대 잡채는 여러 가지 재료를 길게 썰고 여기에 겨자를 뿌려 비벼 먹는 음식이었다. 요사이 한국 잡채는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를 잘게 썰어 볶은 것에 삶은 당면을 넣고 버무린 음식이다. 당면은 감자나 고구마 따위에 들어 있는 녹말을 가려 가루로 내어 그것을 반죽하여 만든 음식이다. 당면은 본래 중국인이 즐겨 먹었던 국수다. 중국 음식인 당면은 1882년 여름 임오군란 이후 인천과 서울에 중국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알려졌다.
조선시대 잡채는 여러 가지 재료를 길게 썰고 여기에 겨자를 뿌려 비벼 먹는 음식이었다. 요사이 한국 잡채는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를 잘게 썰어 볶은 것에 삶은 당면을 넣고 버무린 음식이다. 당면은 감자나 고구마 따위에 들어 있는 녹말을 가려 가루로 내어 그것을 반죽하여 만든 음식이다. 당면은 본래 중국인이 즐겨 먹었던 국수다. 중국 음식인 당면은 1882년 여름 임오군란 이후 인천과 서울에 중국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알려졌다.
1920년대 서울에만 중국음식점이 200여 군데나 있었다. 중국 음식은 당시 조선인에게 익숙한 외국 음식이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의 중국음식점 중 80% 이상이 폐업하거나 휴업했다. 조선인들은 중국음식점에서 주로 탕수육과 잡채를 즐겨 먹었다. 그런데 중국식 잡채를 먹기가 어려워지자, 가정에서 한국식 잡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1930년 3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동덕여고보 가정과 교사인 송금선(宋今璇)이 소개한 한국식 잡채 요리법이 나온다. 송금선은 한국식 잡채에 일본식 간장을 넣어야 맛이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식의 잡채는 웤에 재료를 넣고 볶아서 만든다. 하지만 한국식 잡채는 일본식 간장과 설탕으로 무쳐서 만든다. 따라서 한국식 잡채는 20세기 전반기 제국 일본에 편입되었던 한반도에 살았던 조선인·중국인·일본인의 합작품이다. |
![]() |
5. 식민지의 제국 음식, 제국의 식민지 음식
식민지기에 일본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던 조선인은 일본인이 먹지 않았던 소의 내장을 구이로 먹었다. 1930년대 후반 오사카의 조선인 거주지 근처에는 냉면과 갈비구이를 판매하는 음식점이 제법 많았다. 이들 음식점에서는 테이블 가운데에 숯이 든 화로를 놓았다. 화로에 불을 지핀 다음 석쇠에 갈비를 놓고 손님이 직접 고기를 굽도록 했다. 이런 방식을 처음 접한 일본인 손님들은 불고기를 대단히 좋아했다. 그러자 조선음식점에서는 갈비뿐만 아니라 각종 쇠고기 부위를 구이의 재료로 내놓았다.
일본인은 이 음식을 ‘야키니쿠(焼肉)’라고 불렀다. 오늘날 일본어 ‘야키니쿠’는 소와 돼지 등의 고기와 내장에 소스를 묻히고 직화로 굽는 요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1900년대 도쿄 시내 골목에는 포장마차로 영업하는 야키니쿠집(焼肉屋)과 야키토리집(焼鳥屋)이 많았다. 주인은 소고기와 부속물, 닭고기와 부속물을 대나무 꼬치에 꽂아 일본식 간장에 양념해 숯불에 구워서 손님들에게 낱개로 팔았다. 좁은 포장마차에는 앉을 자리가 변변치 않아서 손님들은 서서 꼬치구이를 먹었다. 음식값이 일반 음식점보다 많이 쌌기 때문에 손님들은 대부분 노동자였다. 조선인과 인도인 같은 외국인도 많았다.
식민지기에 일본에서 노동자로 생활했던 조선인은 일본인이 먹지 않았던 소의 내장을 구이로 먹었다. 1930년대 후반 오사카의 조선인 거주지 근처에는 냉면과 갈비구이를 판매하는 음식점이 제법 많았다. 이들 음식점에서는 테이블 가운데에 숯이 든 화로를 놓았다. 화로에 불을 지핀 다음 석쇠에 갈비를 놓고 손님이 직접 고기를 굽도록 했다. 이런 방식을 처음 접한 일본인 손님들은 불고기를 대단히 좋아했다. 그러자 조선음식점에서는 갈비뿐만 아니라 각종 쇠고기 부위를 구이의 재료로 내놓았다.
일본인은 이 음식을 ‘야키니쿠(焼肉)’라고 불렀다. 오늘날 일본어 ‘야키니쿠’는 소와 돼지 등의 고기와 내장에 소스를 묻히고 직화로 굽는 요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1900년대 도쿄 시내 골목에는 포장마차로 영업하는 야키니쿠집(焼肉屋)과 야키토리집(焼鳥屋)이 많았다. 주인은 소고기와 부속물, 닭고기와 부속물을 대나무 꼬치에 꽂아 일본식 간장에 양념해 숯불에 구워서 손님들에게 낱개로 팔았다. 좁은 포장마차에는 앉을 자리가 변변치 않아서 손님들은 서서 꼬치구이를 먹었다. 음식값이 일반 음식점보다 많이 쌌기 때문에 손님들은 대부분 노동자였다. 조선인과 인도인 같은 외국인도 많았다.
![]() |
야키니쿠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중에는 명란젓을 일본 음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명란젓은 명태의 알을 가리킨다. 명란젓의 일본어는 ‘멘타이코(明太子)’이다. ‘멘타이코’는 ‘명태의 알’이란 뜻이다. 명란젓의 다른 이름으로 ‘가라시멘타이코(辛子明太子)’가 있다. ‘가라시멘타이코’의 ‘가라시’는 고추를 가리킨다. 즉, ‘가라시멘타이코’는 명란을 소금에 절인 후, 고춧가루를 겉에 바른 젓갈이다. 일본인은 어패류의 살이나 내장, 알 등을 소금에 절여 발효한 젓갈을 ‘시오가라(鹽辛)’라고 부른다. 그래서 일본인은 명란젓을 ‘시오가라’의 일종으로 일본 음식이라고 여긴다. |
그러나 명란젓은 조선시대 함경도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이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생선의 알을 소금에 절여 햇볕에 반쯤 말린 어란(魚卵)을 만들어 밥반찬이나 술안주로 먹었다. 명란젓은 어란의 한 종류였다. 다만, 명란은 알집이 단단하지 않아 겨울이 아니면 상온에서 쉽게 썩어버리므로, 명태를 잡자마자 명란을 소금에 절여두었다.
1930년대 초반 일본인이 운영하는 명란 상점에서는 명란을 씻어 물기를 뺀 다음에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를 겉에 바르고 나무로 만든 통에 넣고 가공하는 기술까지 개발했다 조선에서 명란을 취급하던 일본인 상점 중 히구치상점(樋口商店)은 가공 기술이 가공 기술이 뛰어난 곳 중의 하나였다. 히구치상점에서는 명란을 시모노세키(下關)로 보내면서 ‘멘타이코’라고 부르지 않고, ‘시오가라’라고 불렀다.
1905년 러일전쟁 후에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에 연락선(連絡船)이 생기자, 1907년 히구치는 상점을 원산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히구치는 원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명란젓을 보내는 것보다 부산에서 보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명란젓 수요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 또한 부산에서 철로를 이용해 공급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미 원산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부산에서 만주의 선양(瀋陽)까지 철로가 놓였으므로 부산은 유통의 중간 지점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제국의 음식이 일방적으로 식민지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지배 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의 음식이 제국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야키니쿠와 가라시멘타이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1930년대 초반 일본인이 운영하는 명란 상점에서는 명란을 씻어 물기를 뺀 다음에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를 겉에 바르고 나무로 만든 통에 넣고 가공하는 기술까지 개발했다 조선에서 명란을 취급하던 일본인 상점 중 히구치상점(樋口商店)은 가공 기술이 가공 기술이 뛰어난 곳 중의 하나였다. 히구치상점에서는 명란을 시모노세키(下關)로 보내면서 ‘멘타이코’라고 부르지 않고, ‘시오가라’라고 불렀다.
1905년 러일전쟁 후에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에 연락선(連絡船)이 생기자, 1907년 히구치는 상점을 원산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히구치는 원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명란젓을 보내는 것보다 부산에서 보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명란젓 수요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 또한 부산에서 철로를 이용해 공급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미 원산에서 서울까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부산에서 만주의 선양(瀋陽)까지 철로가 놓였으므로 부산은 유통의 중간 지점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제국의 음식이 일방적으로 식민지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지배 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의 음식이 제국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야키니쿠와 가라시멘타이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Infokorea 2024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