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포럼

한글고문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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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선임연구원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문서생활, 특히 행정과 법률에 관계된 것은 대부분 한자로 썼다. 1894년(고종 31, 갑오)에 모든 법률과 칙령을 기본적으로 한글로 표기하도록 한 것은 우리나라의 문서 생활에 있어서 한글이 공식적인 문자로 인정받은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행정과 법률에 관한 글, 민간에서 관아에 제출하는 문서 등은 모두 한자로 써야했다. 법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문서 생활은 한자로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시대의 문서생활을 들여다보면 1894년 이전에도 한글로 된 문서가 드물지만 존재하였다. 현재 고문서연구실에서 구축하고 있는 “고문서자료관”에는 조선 후기에 작성된 한글 고문서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한글로 된 소지, 명문, 배자, 고목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즉 1894년 이전에는 한글로 쓰인 이들 문서는 법적인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법령으로 그것을 규정하고 있다. (안병희1992: 397)

諺文及無訂筆者勿施 『百憲摠要』 「刑·文記」
出債成文(.....) 諺文及無證筆者 勿許聽理 『受敎輯錄』 「戶·徵債」; 『百憲摠要』 「刑·徵債」


한글로 표기된 문권은 필집인과 증인이 없이 작성된 문권과 같이 효력을 인정하지 말고 소송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百憲摠要(백헌총요)』이 만들어진 것이 18세기 전반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受敎輯錄(수교집록)』은 1675년(숙종1)의 수교다. 17세기가 들어서 한글 문서가 나타나 문서 생활이 문란하여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내려진 법령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한글 문서를 금지하는 법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국가가 나서서 한글 사용을 제지해야 할 만큼 그 출현이 빈번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러한 법령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1894년 이전에 작성된 다양한 한글고문서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한글고문서를 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글고문서는 단순히 한글로 작성된 고문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되고 그 당시의 문서생활에서 한문고문서가 갖지 못하는 특별한 기능을 한글고문서가 담당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글고문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아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문서연구실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다양한 한글고문서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이 계속된다면 조선시대의 문서생활에서 차지하는 한글고문서의 성격이 규명될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한글고문서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고목과 배자이다. 하리나 하인이 상전에게 올리는 고문서를 고목이라 하고, 상전이 하리나 하인에게 내리는 고문서를 배자라고 한다. 즉 고목과 배자는 상하 계층 간에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하던 문서였다고 할 수 있다.

한문 고목과 배자와 한글 고목과 배자는 단순히 사용된 문자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 기능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한문 고목과 배자가 주로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 사이에 주고받은 문서였다면 한글로 작성된 고목과 배자는 사적인 관계에 있는 상하관계의 사람들이 주고받은 문서이었다. 주로 집안에서 상전이 하인이나 노비에게 어떤 사실을 분부할 때 그리고 이에 대해서 하인이나 노비가 상전에게 그 분부의 이행을 보고할 때 사용하였다.

leehj@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