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클럽
국사봉과 수녀
특별한 국사봉
  한결같은 국사봉은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다. 어쩜 그렇게도 계절의 분위기에 꼭 맞게 차려입는 건지, 산이 품은 연구원 곳곳에서 펼쳐지는 계절들의 향연을 값없이 만끽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연구원 식구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이 특권이 등굣길을 설레게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사실 이 설렘이 수려한 경관에서 유래한 것만은 아니다. 연구원을 감싸는 청계산을 바라보며 산 깊숙이에 새겨진 순교자의 자취가 떠올랐다. 볼리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저 산등성에 깃들어 살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사랑했던 젊은 프랑스 선교사는 1866년 조선을 위한 순교자가 되었다.
  1911년 벽안의 수도자가 청계산 국사봉에 올랐다. 젊은 순교자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였다. 기슭을 두루 돌아 산마루에 이르자 해는 벌써 뉘엿하여 숨어들고 있었다. 수도자는 자신의 눈에 비친 그날의 광경을 두고 ‘여태 본 적 없는 현란한 색의 산악 파노라마’라고 감격했다. 붉게 물들어가던 국사봉의 정취는 앞선 순교자의 향기로운 여운임이 틀림없다. 순교자를 따라나선 순례자의 마음처럼 나도 또 하나의 순례자가 되어 연구원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내 설렘의 두 번째 이유이다.

[그림 1] 종신서원식 사진(2024. 1.)

소중한 소임
  국사봉과 특별한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건, 내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이기 때문이 아닐까. 가톨릭 수도자의 삶은 기도와 노동(소임)으로 이루어진다. 그 소임은 기도의 연장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삶 전체가 기도이어야 한다. 종신서원 후 받은 나의 소임은 ‘한국학대학원 입학’이었다. 이곳에서 수학하는 일련의 시간은 또 다른 형태의 기도라 할 만큼 나에게 부여된 소중한 소임이다.
  그렇게 주어진 귀중한 시간은 지난 학기부터 몸담은 종교학과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종신토록 수도자로 살겠다고 서약하였고, 천주교 신앙의 울타리를 벗어나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삶의 모태와도 같은 천주교 신앙을 다른 종교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수행했던 ‘영신수련’이나 ‘피정’, 아니면 매일의 양심성찰도 자기에 대한 객관화에서 시작된다. 강의실에서 시도하는 신앙의 객관화와 고민은 내 기도의 또 다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시선
  수업에서는 한국 천주교뿐만 아니라 신종교, 무속 등 개별 종교들을 살피기도 하고, 종교이론이나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종교개념에 대한 이해를 더해가고 있다. 편견 없이 모든 종교를 대하는 자세를 익히면서, 다양한 층위의 비교로 세상을 더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려는 교수님들과 동학들의 태도도 참 매력적이다.
  종교학, 그리고 함께 하는 종교학과 사람들을 통해 수도자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한국 종교사의 흐름 안에서 나의 관심사인 한국 천주교사를 성찰하는 일이다. 가능한 한 선입견 없이 모든 종교를 대하려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를 숙고하다 보면 세상과 세상 안의 사람들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세상과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나의 종교를 사랑하는 방법이고, 세상을 사랑하라는 내 절대자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림 2] 한국학대학원 종교학과 전공 답사 사진(2024. 10.)
철 없는 제비꽃
  늦가을 정취에 젖어 정신없이 연구원 뜰을 향유하다가 제 철을 잊은 제비꽃을 만났다. 11월에 핀 작은 꽃이 너무나 반가워 손끝으로 여러 번 쓰다듬었다. 나는 제비꽃을 좋아한다. 벽안의 수도자 노르베르트 베버가 이 꽃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쳐 준 덕분이다. 그는 공주 처형터에서 제비꽃을 발견한 감동을 글로 남겼다.
“무덤가에 수줍게 핀 푸른 제비꽃이 숨은 영웅들의 고귀한 정신을 상기시켜 주려는 듯 달콤한 향기를 뿜었다. 향은 우리 알프스 제비꽃과 비슷했다. 여기 영웅들이 잠들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소리 없는 인사를 알아들었다. 이 제비꽃을 집으로 가져가 여기 잠든 성인, 성녀와 죄 없는 아이들의 굳은 신앙을 기억하려 한다.” - 노르베르트 베버, 『고요한 아침의 나라』 -

  1백 년도 훨씬 전에 아마도 이 길 언저리를 지나 국사봉에 올랐을지도 모를 베버 신부를 때 잊은 제비꽃이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그 꽃과 함께 순교자들과 교감했을 것이고, 아름다운 국사봉에서 바라보는 한국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애정 어린 시선이 한국 사람과 한국문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되었으리라.
  오늘 제비꽃을 만난 건 행운이다. 꽃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방식대로 국사봉과 연구원과 거기 새겨진 역사와 사람들이 나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까닭이다. 그것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더 큰 행운이고 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