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역사적 유의미성이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는 정답을 정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절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없으며,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다른 사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성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이 관점에는 또한 근접성, 지리와 문화, 유사성, 상호 얽힘 등 여러 요소가 영향을 끼칩니다.
역사에 대한 교육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전제 하에, 다른 나라의 역사란 나의 역사와 관계를 가질 때 더 큰 중요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들이 서로 얽히거나, 혹은 분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환기시키며 어떠한 방향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때 그렇습니다.
한국의 역사적·현대적 풍경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에 자국적, 정체성 위주의 성향을 강조하려는 이탈리아 교육부 최근 지침에 대한 수용이나 거부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유럽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 먼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에 열린 세계적 시각으로의 접근 방식을 옹호한다 하더라도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와 얽혀있는 역사를 가진 지역들에 대해 보다 큰 중요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속 한국
그렇다면 이탈리아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속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중요성은 어떨까요? 저의 직간접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매우 낮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신세계 발견 등의 탐사 여정을 다루는 부분에서 몇 차례의 지리적 언급을 제외하면 한국은 마지막 학년의 교과서에서 비로소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한국은 1905년 전쟁으로 이어진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 시기에 경쟁의 대상이 된 지역으로, 그 이후 한반도의 일본 식민지화로 이어지는 맥락 속에서 다뤄집니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를 뒤흔들며 냉전의 시작을 알린 전쟁에 이르러서 더 비중 있게 언급되지만, 이 경우에도 군사적 충돌과 그 양상, 그리고 결과에 초점이 맞춰질 뿐, 그 갈등의 주체이자 희생자였던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매우 적게 이야기 합니다.
남북한에 대해서는, 동남아시아의 신흥 경제를 설명하는 단락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북한은 위협적인 고립 속에 머물러 있는 나라로 배경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탈리아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와 그 안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한 한국 측의 초청을 받았을 때, 우리의 초청자들에게 소개했던 대략적인 개요입니다. 이 틀을 더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아래 몇 가지 참고할 만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한국은 어디에 있나요? - 변두리의 장소
1950에서 60년대의 밀라노에서는 한국이 제법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시내의 한 고등학교에도 ‘코레아’(corea)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는 베이비 붐으로 학생수가 급증하며 교실로 전환된 지하실과 창고들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그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딘가 이국적이면서도 분명 불행한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었고, 대규모 공장시설에 이끌려 몰려든 남부 출신 이주민들이 임시 거처를 찾아 밀집해 살던 도시 외곽 지역에 붙여진 명칭이기도 했습니다.
1965년 밀라노 일대의 여러 ‘코레아’ 지역에는 최대 10만 명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사실 이유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1953년 북한이 남한을 정복하고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일으켰던 3년간의 전쟁, 즉 한국전쟁이 중단되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북측의 승리 가능성은 곧바로 남측의 방어를 위한 미국의 개입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먼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은 냉전이라는 넓은 맥락 속에서 곧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참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국전쟁은 매우 격렬했으며 수백만의 난민과 이주민을 낳았습니다. 신문과 뉴스가 전하던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산업도시로 변모한 밀라노에서 자리를 찾으려 애쓰던 이주민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결국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음에도 그곳에서 전해지던 소식만으로 한국이라는 단어는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곳의 별칭으로 쓰이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은둔의 왕국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던 시기의 '은둔의 왕국' 한국
제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제가 재학하던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에도, 교과서나 교사들로부터 학교의 일부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던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한편 마이클 J 세스에 따르면 한국은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던 전쟁을 제외하면, 비교적 최근까지도 세계의 주목을 끌지 못한 역사를 가진 땅’입니다. 이 미국 역사학자에 따르면, ‘이유의 일정 부분은 중국과 일본이라는 더 거대한 이웃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대항해 시대에 유럽 항해자들이 오가던 주요 항로에서 벗어난 지리적 위치 역시 그 고립에 한몫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부 세력, 특히 서구의 간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고자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하던 것은 당시 조선 왕조(한국)의 선택이기도 했으며, 이 정책을 근대시기 내내 유지해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19세기말 한 저서(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 – 한국: 은둔의 왕국, 1882)에서 묘사하듯 ‘은둔의 왕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한국 역사의 한 측면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1653년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의 선박 데 스페로우 호가 한국 남쪽 해상의 제주도에 난파되었습니다. 조선(한국) 당국은 난파된 선원들을 받아들였으나 그들이 항해를 재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서울(당시 한양)으로 이송시켰습니다. 그곳에서 선원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나라를 떠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회계원이었던 헨드릭 하멜 (1630-1692)도 있었습니다. 하멜은 13년 간의 체류 후 일부 동료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나가사키의 VOC 지부에 도착해 그곳에서 네덜란드로 돌아가 자신의 여행기를 집필하여 1688년 ‘하멜 표류기와 조선국기, 1653-1666’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이 기록은 서양 세계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소개한 최초의 서술이자 이후 약 2세기가 지나도록 거의 유일하게 집필된 자료입니다.
17세기 이탈리아의 한국인 이주자
피터 폴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남자', 1617
하멜 이전에 한국을 방문한 다른 서양 여행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보다 거의 한세기 앞서 반대 방향의 여정을 떠나왔던 한 한국인의 사례는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 정착해 평생을 보냈습니다. 이 인물은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수천 명의 다른 이들과 함께 포로로 잡힌 한 젊은이로, 그는 나가사키로 끌려가 노예로 팔려가다 피렌체의 상인인 프란체스코 카를레띠 (1573-1636)의 소유가 되었다.
카를레띠는 그에게 그의(카를레띠의) 아버지의 이름인 안토니오 따서 세례를 받게 한 후 자유를 주며 그의 여행에 동행시켰습니다. 이 일화와 그 이후 이어진 여러 여정에 대해서는 카를레띠 본인이 남긴 일지(여행 중 그가 본 것들에 대한 추론 Ragionamenti sopra le cose da lui vedute ne’ suoi viaggi)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 기록은 카를레띠 사후 피렌체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한국인 안토니오가 로마에 정착했다는 사실까지만 알고 있으며,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 남아있는 문헌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20세기에 들어 이 인물을 둘러싼 역사적 근거는 불확실하나 매우 흥미로운 여러 가설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피터 폴 루벤스가 1617년 그린 한 스케치로, ‘한복을 입은 남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그림을 두고 이 플랑드르 화가가 로마 체류 당시 젊은 안토니오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른 한가지는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카탄자로 인근 작은 마을인 알비(Albi)에 동일한 성을 가진 주민들이 오늘날까지 다수 존재하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이들이 이 최초의 한국 이주자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가설로, 이 중에는 19세기 말 알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할아버지를 둔 현대 재즈의 거장인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칙 코리아 (본명: 아르만도 앤서니 코레아, 1941-2021)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도 위에 그어진 선
한반도를 가르는 인위적인 경계, 38도선
한국이 갑자기 모든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순간은 한반도의 남과 북이 서로 대립하여 전쟁이 발발한 시기로, 이 전쟁은 러시아의 간접적인 개입과 미국과 중국의 직접적 개입으로 인해 곧 냉전 시기 가장 뜨거운 국면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갈등에 할애된 몇 안 되는 페이지를 넘겨보면 국제 세력들과 그들의 밀고 당기며 다시 재편되는 힘의 균형이 뚜렷이 서술되지만, 한국과 한국인들, 그리고 이 폭력적인 내전이 한반도의 두 편에 남긴 지속적인 격변은 뒷배경으로 밀려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냉전의 40년 동안 발생한 수많은 주변 분쟁들이 일종의 ‘대리전’으로 정의할 수도 있는 반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을 갈라놓았던 전쟁에서는 그들의 외부에서 강요된 정치, 군사적 선택의 무게를 특히나 더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는 38°선이 대표적인데, 결과적으로 이 선은 전쟁의 결과물이 아닌, 오히려 그 원인을 규정한 것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전쟁이 멈춘 전선은 대체로 북위 38도에 가깝지만 이 선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전선은 한반도 동서해안을 가로지르는 불규칙한 선으로,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희생을 초래한 치열한 전투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위도에 자리잡은 38선은 군사적 충돌의 결과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하며 승전국이 된 미국과 소련이 각자의 영향권을 나누기 위해 내린 결정입니다. 1945년 여름, 나치 독일은 이미 패배한 상태였고 그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패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종전을 바라는 기대와 끝까지 항전하려는 강경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원자폭탄을 완성하여 이를 실제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8월 6일과 9일) 있었으며, 소련은 동맹국들의 요청에 따라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지역으로 깊숙이 전진하여 이윽고 한국 영토에 진입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미국은 소련의 진격이 한반도 전체를 가로지르며 일본 영토까지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동맹국이자 경쟁관계였던 소련에게 서로의 영향권을 나눌 경계선을 설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를 위한 회담에서 미국 장교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Ⅲ)은 멋지게 그려진 한반도 지도가 실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손에 들고 들어와 이 지도 위에 38도를 기준으로 자를 대고 임의로 선을 그었습니다.
소련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어진 선은 그대로 경계가 되었습니다. 러스크는 훗날 그의 회고록에서 이 분할에 대해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도, 지리적, 경제적으로도 그 어떠한 타당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었다고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 발발한 한국전쟁은 이 인위적인 분할선을 영구적인 국경으로 굳혔으며, 결과적으로 외부 세력들이 지도 위에 펜으로 내려그은 선이 한 국가를 둘로 쪼개어 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