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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전쟁의한국 음식 - 4

K-푸드의 탄생: 20세기 한국 음식의 역사

Ⅳ. 전쟁의 식탁


1.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대용식
1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은 1933년 말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를 휩쓸고 지나갔으며, 1939년까지 여파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육군은 군사력 강화와 전쟁 준비를 최우선에 두는 군국주의(軍國主義)로 무장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한 일본은 다음 해 괴뢰 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이후 1937년 7월 베이징 교외에서 일어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의 싸움을 빌미로 일방적인 중국 침략에 돌입했다(중일전쟁). 일본은 1941년 12월 8일(미국시간 12월 7일)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과도 전면전을 벌이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태평양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쇼와 천황(昭和 天皇, 재위 1926~1989)이 항복 선언을 하기까지, 중일전쟁부터 8년여의 전쟁은 일본 군국주의의 총력전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도 “일본과 조선이 하나다”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총후(銃後, 후방)의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될 것을 강요받았다. 조선총독부는 군수품 생산을 늘리고 모든 물품을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경제구조를 전시경제로 재편했다.

전시경제의 핵심은 전쟁에 필요한 물품 위주로 생산 체제를 가동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식량류·채소·과일·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설탕·고추·간장·된장·식용유·과자류·연료류 같은 생활필수품의 생산과 소비를 강제로 통제했다. 이러한 생필품 통제 정책은 특히 농산물 산지에서 떨어져 있는 도시 거주민들의 식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총독부는 식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나물 캐기와 김장하기 등 식민지 조선인의 대용 식품 확보를 강제했다.

《매일신보》 1938년 5월 4일자 기념호 2면에는 ‘가정특집’으로 〈가정생활을 어떻게 개선할까〉란 주제로 지식인들의 좌담회 기사가 실렸다. 이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은 당시 내로라하는 가정학 관련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소고기 대신에 말린 멸치를 쓰자고 주장했다. 의사 김복인(金福仁)은 멸치가 소고기보다 지방질이 조금 적을 뿐 단백질과 칼로리에서 소고기에 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실 식민지 시기 조선인은 멸치를 식재료로 여기지 않았다. 이에 비해 일본인은 말린 멸치를 국물 요리의 육수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다. 김복인은 일본인의 멸치 사용법을 가지고 와서 조선인도 소고기 대신에 찌개나 국에 넣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지금의 한국인은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날로 먹거나 기름에 볶거나 국물을 내서 국수에 부어 먹는다. 사실 이런 멸치 식용 방식은 해방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해방 이후 어획량은 날로 증가했지만 일본 수출 길이 활짝 열리지 않자, 1960년대부터 언론에서는 영양과 맛, 그리고 요리법을 소개하면서 말린 멸치 소비를 북돋웠다. 마침내 1970년대 이후 한국인은 말린 멸치를 중요한 식재료로 여기기 시작했다.

2. 잔치국수의 출발 : 대용식 소면
1940년대 혼식과 함께 밀가루를 주재료로 한 분식(粉食)도 쌀을 아끼는 데 효과적인 음식으로 주목받았다. 1930년대부터 조선총독부에서는 남한 일대의 농촌에 밀 재배를 강력하게 권장했다. 기존에 한반도에서 재배하던 밀은 겨울에 씨를 뿌려 7월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수확하는 겨울밀(winter wheat)이었다. 겨울밀은 보리와 같은 시기에 심어야 했기에 남부 지역 농민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수확량이 날로 증가했다. 1939년 여름, 조선의 겨울밀 수확량은 일부를 간장 양조에 사용해도 종자용(種子用)과 자가용(自家用) 소비량에 맞출 수 있었다.
잔치국수 1942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나서서 매월 3회의 대용식의 날을 강제로 시행하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문제는 쌀을 대신하는 대용식으로 어떤 음식을 제공할 것인가였다. 그중 하나가 소면(素麪)이었다. 소면은 밀가루로 만든 국수다. 당시 일본에서 통용된 소면 제조법은 다음과 같다. 밀가루에 소금물을 넣고 반죽하여 약 하룻밤을 숙성한 다음 홍두깨로 눌러서 넓게 편 다음에 돌돌 감아서 가늘게 썬 뒤 상자에 잠시 넣어둔다. 이것을 손이나 기계로 펴서 말린 다음에 데쳐서 열탕에 넣은 후 냉수에 씻어낸다.

1930년대 이후 소면 제조는 기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손으로 밀가루를 반죽한 다음에 기계에 넣고 얇게 펼친 다음에 다시 국수 절단 기계에 넣으면 면발이 가는 소면이 줄줄이 나왔다. 이것을 나무 봉에 매달아 햇볕에 말리면 건면(乾麪)이 된다. 1960년대 후반부터 소면과 말린 멸치로 만든 육수가 결합한 국수가 ‘잔치국수’라는 이름을 얻고 식사 대용으로 유행했다.
3. 해방공간의 길거리 음식 : 빈대떡
1945년 8월 15일, 식민지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한국인의 삶은 식민지 시기보다 나아진 점이 거의 없었다. 한반도의 허리에 ‘38선’이 그어지고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에 의해서 신탁통치가 실시되었다. 해방 당시 재외동포는 500여만 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중 절반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북한의 공산화를 피해서 일찌감치 남하한 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해방 약 1년 전부터 해방 후 약 4년에 걸친 총 5년 동안 남한 인구는 약 430만 명 이상 증가했다. 서울은 재외동포, 월남한 북한 사람들, 그리고 조국의 새로운 정치를 꿈꾸고 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서울의 청계천 주변에는 일본군의 군수품, 일본인이 남겨놓고 간 세간살이, 미군정청에서 풀려나온 배급 물자를 판매하는 노점과 시루떡·빈대떡·곰탕·설렁탕·순댓국·선짓국·막걸리 등을 판매하는 길거리 음식점도 있었다. 이런 노점들이 일정한 구분 없이 마구 들어서서 청계천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길이면 길, 골목이면 골목마다 음식 장수·담배 장수·신문 장수·잡화 장수들이 거미 떼처럼 와글거렸다.
이 중 빈대떡은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장사를 할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이었다. 빈대떡은 녹두를 맷돌에 갈아서 기름에 부친 음식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돼지고기·숙주·고사리 등 다른 부재료를 더 장만하여 녹두 반죽에 넣는다. 빈대떡은 다른 이름으로 빈재떡, 빈자(貧者, 가난한 사람)떡, 빈대(賓待, 손님 접대)떡’, 지짐, 문주, 녹두떡 등으로 불린다. 그중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빈자떡’ 혹은 손님을 접대한다는 ‘빈대’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하지만 조선 시대 문헌 자료를 뒤져보면, 병 저(餠(食+者))의 중국어 발음 ‘빙져’에서 생긴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한자를 모르고 중국어 발음만을 흉내 내서 ‘빈대’ 혹은 ‘빈재’ 따위로 부르자 음식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끝에 ‘떡’을 붙였다.

1970년대까지도 빈대떡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판매했던 싼값의 음식이었다. 하지만 녹두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빈대떡의 비싼 값의 음식이 되었다. 지금은 서울의 광장시장이나 냉면집에서는 빈대떡을 판매하고 있다.
빈대떡
4. 미국 밀가루로 만든 붕어빵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 동안 한국인의 식생활을 극단에 이르게 한 사건이었다. 최악의 식량 부족 상황에서 유엔군의 참전과 구호물자로 피란민이나 피란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간신히 생명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붕어빵 특히 1950년 11월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공산군 치하에 들어갔다. 이때 가장 많은 피란민이 생겼다. 1951년 3월 16일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서울을 수복했다. 수복되는 지역마다 피란민 구호품이 지원되었다. 의복과 침구류 같은 기본적인 생필품과 밀·설탕·분유 같은 미국산 식료품이었다.

북한의 침략에서 벗어나 있던 항구도시 부산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들어온 구호물자 밀도 풍부했다. 길거리에는 풀빵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묵하게 팬 철로 된 틀에 묽은 밀가루 반죽과 팥소 따위를 넣어 구운 풀빵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이 들여온 길거리 음식이었다. 가난한 피란민들은 길거리에서 풀빵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이 풀빵은 오늘날 겨울이면 한국의 대도시에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길거리 음식인 붕어빵으로 진화했다. 붕어빵은 붕어 모양의 틀에 묽은 밀가루 반죽과 팥소를 넣어 만든 풀빵이다.
5. 전쟁이 제공해 준 서양 식품
한국전쟁의 피란민 중에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어린이도 적지 않았다. 정부와 유엔, 그리고 미국의 구호단체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을 위한 ‘유아식량’을 별도로 공급해 주었다. 유아식량은 우유를 건조해 가루로 만든 분유였다. 피란민 수용소에서는 분유에 옥수수가루나 보릿가루를 넣고 물을 넣어 끓인 우유죽을 배급했다. 1950년 9월 28일 수복 이후 서울에는 ‘우유죽급식소’가 아홉 군데 있었다. 우유죽급식소에서는 매일 700~800명의 어린이·노인·병자에게 우유죽을 배급했다.

그런데 우유죽은 장(腸) 속에 유당(乳糖) 분해효소가 없는 한국인에게 알맞은 음식이 아니었다. 우유죽을 먹은 사람 중에는 설사나 복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보관 중에 변질한 분유로 끓인 우유죽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 중에 쌀값은 몇백 배씩 폭등한지라 미국의 구호물자인 우유죽이라도 먹으려고 어린이들이 양은 냄비를 들고 급식소 앞에서 줄을 섰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미군에서는 비상식량을 제공했고, 초콜릿이 군인들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당시 한국의 어린이들은 유엔군을 만나면 배고픔을 잠시라도 잊으려고 “기브 미 초콜릿!”을 외쳤다. 이 초콜릿은 미국산 허쉬(Hershey’s)의 밀크 초콜릿이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인에게 초콜릿은 맛있고 신기한 음식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거지처럼 미군과 유엔군을 향하여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경험을 몸소 실천했던 193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 그들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을 할 때 ‘초콜릿 영어 세대’로서 무역의 주역을 맡았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기브 미 초콜릿!”을 외쳤던 비참한 경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독재와 억압 속에서도 “잘살아 보자!”라는 각오를 다졌다.

한반도의 식생활 역사에서 적어도 1937년부터 1953년은 중일전쟁·태평양전쟁·한국전쟁으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때였다. 이 시기에 정권을 장악했던 조선총독부와 미국과 소련의 군정, 그리고 남북한의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자들은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선 정권들이 행했던 조치를 그대로 따르는 선택을 자주 시행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절미운동, 혼식과 분식 장려운동, 대용식운동 같은 정책은 미군정기, 대한민국의 이승만과 박정희 통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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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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