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포커스
한국 음식 - 2
K-푸드의 탄생: 20세기 한국 음식의 역사
Ⅱ. 개항의 식탁
1. 20세기 한국 음식의 역사가 만들어 낸 K-푸드
개항(開港)은 외국과 통상하기 위해 항구를 개방한다는 말이다. 조선은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1883년에 독일 및 영국과, 1884년에 러시아 및 이탈리아, 그리고 1886년에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약 체결 후 서양의 외교관·선교사·여행가·상인 등이 중국이나 일본을 거쳐 조선의 개항장에 도착했다. 그들 중에는 귀국 후에 조선 방문의 경험을 여행기로 집필해 책을 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서양인이 집필한 조선 여행기에는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 ‘금단의 나라(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a sketch of Korea)’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중국과 일본보다 덜 알려진 나라였다.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이국에서의 식사를 걱정해 중요한 식품을 직접 가지고 왔다. 1888년에서 1889년 사이에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 여행가이자 지리학자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uois Varat, 1842~1893)는 프랑스를 떠나면서 와인을 비롯해 보르도(Bordeaux) 항구 근처의 공장에서 만든 통조림 푸아그라(foie gras)까지 챙겨 왔다. 하지만 선뜻 조선 음식 먹기에 도전한 서양인도 있었다.
왕실(혹은 황실)과 관청의 관료들은 서양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서양인들은 젓가락질이 서툴렀지만, 이국적인 조선 음식을 먹었다. 낯선 조선 음식을 대하는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챈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를 내세운 조선 사람들은 서양인 요리사를 초빙해 서양 손님에게 서양 음식을 대접했다.
2. 미국인 조지 포크 체험한 조선 음식: 경단
미국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는 한반도 곳곳을 여행하면서 조선 음식을 먹었던 대표적인 외국인이다. 그는 187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아시아 함대에 배속되었다. 포크는 6년 동안 아시아 함대에서 근무했고, 함대가 자주 들른 일본 항구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포크는 아시아함대 복무 후 귀임하는 길에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허락받아 1882년 6월 3일~9월 8일까지 해군 동료 2명과 함께 일본 고베항에서 미쓰비시 증기선을 타고 나가사키와 부산,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그는 부산과 원산 방문을 계기로 조선에 관해 관심을 두었다. 귀국 후 워싱턴 D.C.의 해군성 자료부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일본어와 함께 조선어를 공부했다. 조선 정부의 미국 방문 외교단인 보빙사(報聘使)가 1883년 9월 15일 워싱턴 D.C.에 도착하자, 미국 정부는 포크에게 조선어 통역을 맡겼다.
이때 그는 보빙사의 대표였던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을 만났다. 10월 12일 체스터 아서(Chester A. Arthur, 1829~1886) 미국 대통령은 보빙사 일행과 고별인사를 하면서 미국 함대 트렌턴(Trenton)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거쳐 귀국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민영익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포크를 안내자로 동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민영익의 요청에 미국 정부는 포크를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해군 무관으로 임명해 동행토록 했다. 민영익 일행은 12월 1일 뉴욕항에서 출발해 유럽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서 1884년 5월 31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조선에 도착한 포크는 민영익의 지원을 받아 1884년 9월 22일부터 10월 7일 사이에 서울을 떠나 파주·개성·강화도·수원·경기 광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첫 번째 조선 여행을 했다. 포크의 두 번째 조선 여행은 1884년 11월 1일 서울에서 출발해 안성·천안·공주·전주·나주·담양·남원·해인사·진주·마산·부산·밀양·대구·상주·충주·이천을 거쳐 12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그는 매일 일기를 썼다. Samuel Hawley는 포크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Hawley, Samuel., Inside the Hermit Kingdom: The 1884 Korea Travel Journal of George Clayton Foulk, Lanham: Lexington Books, 2008)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민영익의 지원이 있었기에 포크의 조선 여행은 아주 순탄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지방관들에게 환대받았다.

1884년 11월 10일, 이날 포크는 전주에 도착했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는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었다. 포크는 일기에서 김성근을 감사(監司)라고 적었다. 김성근은 1883년 음력 2월부터 1885년 음력 1월 사이에 전라도 감사로 재직했다. 조지 포크는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김성근을 관아에서 만났다. 포크와 김성근은 각자의 나라 사정을 소개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포크는 김성근이 “조선의 음식 종류가 미국 음식보다 더 많은가? 미국은 조선만큼 좋은 나라인가?” 같은 질문을 받고 매우 황당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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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는 오전 11시부터 전주 감영 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감사와 대화를 나눈 다음, 함께 군인과 기생의 공연을 관람했다. 아마도 오후 3~4시쯤 포크는 마루에서 호랑이 가죽 방석 위에 앉아 붉은색의 식탁, 즉 붉은 옻칠을 한 소반을 받았다. 포크는 붉은색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에 대해 일기에 이렇게 썼다. “각 식탁 옆의 작은 식탁에는 화로가 달린 놋쇠 솥(a brass furnace pot)에 채소와 고기가 김을 내며 끓고 있었다. 내가 전에 적었던 요리와 비슷했지만, 하얀색, 갈색, 검은색, 노란색, 그리고 빨간색의 포슬포슬하고 달콤한 작은 떡을 쌓아 올린 떡 더미가 놓여 있었다. 베르미첼리는 주요리다. 국화 모양의 튀긴 모찌(mochi, 일본어로 떡) 하나가 곁들여졌다. 먹을 때 이것들을 꿀에 살짝 담근다. 작은 식탁에 와인도 한 병 놓여 있었다. |
포크가 달콤하고 작은 떡이라고 적은 음식은 ‘경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단은 찹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반죽해 동그랗게 빚어서 끓는 물에 익힌 다음, 콩·팥·깨·대추·계피 등 색깔이 서로 다른 재료로 고물을 묻혀 만든 떡이다. 포크가 ‘포슬포슬한(notched)’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고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색깔도 다섯 가지로 맞추었으니 ‘오색경단’이 아니었을까?
3. 루스벨트 엘리스가 체험한 조선음식: 골동면(메밀비빔면)
포크는 ‘베르미첼리(vermicelli)’를 먹었는데 이 음식이 ‘주요리(the chief dish)’라고 적었다. 그런데 정말로 포크가 베르미첼리를 먹었던 것일까? 베르미첼리는 파스타의 한 종류로, 스파게티보다 면발이 좀 더 가늘다. 1884년 11월에 전라도 감영에서 포크에게 제공한 음식이 파스타일 리는 없다. 포크는 전날 김성근을 만나 자신이 전주에 오기 전에 ‘베르미첼리’를 먹어봤다고 했다.
3. 루스벨트 엘리스가 체험한 조선음식: 골동면(메밀비빔면)
포크는 ‘베르미첼리(vermicelli)’를 먹었는데 이 음식이 ‘주요리(the chief dish)’라고 적었다. 그런데 정말로 포크가 베르미첼리를 먹었던 것일까? 베르미첼리는 파스타의 한 종류로, 스파게티보다 면발이 좀 더 가늘다. 1884년 11월에 전라도 감영에서 포크에게 제공한 음식이 파스타일 리는 없다. 포크는 전날 김성근을 만나 자신이 전주에 오기 전에 ‘베르미첼리’를 먹어봤다고 했다.
포크가 먹었던 ‘베르미첼리’는 아마도 면발이 가는 국수로, 당시 조선의 왕실과 관청에서 연회의 마지막에 제공되었던 메밀국수일 가능성이 크다. 요사이 한국인은 메밀국수 하면 냉면을 떠올리지만, 당시 왕실 연회에 오른 메밀국수는 조선간장으로 비빈 비빔냉면이었다. 비빔냉면은 메밀국수에 여러 가지 재료가 한데 섞였다는 뜻으로 ‘골동면(骨董麵)’이라고도 불렸다. 냉면은 차게 해서 먹는 국수이다. 흔히 메밀국수를 냉국이나 김칫국 따위에 말거나 고추장 양념에 비벼서 먹는데, 예전부터 평양의 물냉면과 함흥의 비빔냉면이 유명했다. 평양냉면은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틀에 눌러서 만든 실국수에 배추김치 국물이나 고깃국물, 동치미 국물 등을 부은 음식이다. 함흥냉면은 감자의 전분을 반죽하여 국수틀에 눌러서 만든 실국수이다. 꾸미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명태, 가자미, 홍어 등의 살코기를 쓴다. 골동면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과 달리 왕실과 관청의 행사에서 주로 먹었던 주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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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면은 미국 뉴욕공공도서관(The New York Public Library)에 소장된 대한제국 시기의 메뉴판에도 나온다. 이 메뉴판을 기증한 사람은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Alice Lee Roosevelt, 1884~1980)다. 앨리스 루스벨트는 이 메뉴판의 뒷면에 “메뉴-루스벨트(앨리스 리) 양. 9월 20일 궁정에서의 점심. 황제가 참석하다. 이것은 그가 외국 숙녀와 공개적인 식사를 한 첫 번째 행사였다.” 고종 황제는 서양인을 초대한 연회가 열리더라도 보통은 직접 참석하지 않고 인사만 전했다고 한다. 엘리스는 다른 글에서 “우리는 황실 문양으로 장식한 조선 접시와 그릇에 담긴 조선 음식(Korean food)을 먹었다. 내가 사용했던 물건은 내게 선물로 주었고 작별 인사에서 황제와 황태자는 각각 자신의 사진을 주었다”라고 적었다.

메뉴판의 맨 위 가운데에 금박을 입힌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문인 ‘오얏꽃 문양’이 박혀 있다. 그 아래 식단이 적혀 있는데, 당시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를 쓰고, 세로쓰기를 더 많이 했다.

윗줄 오른쪽의 ‘열구자탕〔신선로〕→골동면〔간장비빔국수〕→수어증〔숭어찜〕→편육→전유어〔생선구이〕→전복초〔전복 볶음〕→화양적〔산적〕’은 이 식단의 중심을 이루는 음식이다. 편육과 전유어 아래에 쓰인 초장은 간장에 식초를 넣은 것으로 이 두 가지 음식의 양념이다. 전복초와 화양적 아래의 개자〔겨자〕는 이 두 가지 음식을 먹을 때 찍어 먹는 것이다. ‘후병〔두덥떡〕→약식〔약밥〕→숙실과〔과실을 익혀 으깬 후 모양 빚어 만든 한과〕→생리〔배〕→생률〔밤〕→포도→홍시→정과〔꿀에 조린 과실〕→원소병〔새알을 넣은 꿀물 음료〕’은 후식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후병 아래에 적힌 백청〔꿀〕도 떡을 찍어 먹기 위해 곁들여 낸 것이다. ‘장침채’는 주식을 먹을 때 곁들이는 반찬으로, 간장에 채소를 넣은 김치다.
이 메뉴판의 음식이 원형의 식탁 위에 어떻게 차려졌는지를 열려주는 자료는 아직 없다. 만약 한꺼번에 모두 차렸다면 원형 식탁이 매우 컸을 것이고, 식기는 매우 작았을 것이다. 황실에서는 잔치 때 옻칠을 한, 다리가 짧은 큰 원형 식탁에 20여 가지의 음식을 한꺼번에 차렸다.
이 메뉴판의 음식이 원형의 식탁 위에 어떻게 차려졌는지를 열려주는 자료는 아직 없다. 만약 한꺼번에 모두 차렸다면 원형 식탁이 매우 컸을 것이고, 식기는 매우 작았을 것이다. 황실에서는 잔치 때 옻칠을 한, 다리가 짧은 큰 원형 식탁에 20여 가지의 음식을 한꺼번에 차렸다.
1901년 4월 28일 고종 황제가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의 계후(繼后) 명헌태후(明憲太后, 1831~1904)가 71세가 되어 이를 경축하기 위한 잔치에서 차려진 한 상에 25가지의 음식이 차려졌다. 이때의 상차림을 기록한 〈신축 사월 이십팔일 진찬도감 사찬하오신 발기〉는 대한제국 황실의 메뉴판이다. 이 발기의 음식 이름 아래에 줄을 친 부분은 서로 다른 음식을 하나의 그릇에 담았다는 뜻이다.
〈신축 사월 이십팔일 진찬도감 사찬하오신 발기〉에는 주식인 탕, 온면, 냉면, 창면이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다. 이에 비해 앨리스 루스벨트의 메뉴판에는 주식인 열구자탕과 골동면이 제일 앞에 나와 있다. 아마도 고종 황제와 앨리스 루스벨트의 점심 식사는 시간별로 음식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주식인 열구자탕과 골동면을 먼저 제공하고, 다음에 생선과 고기 요리, 다시 떡과 약식·숙실과, 그리고 마지막에 과일과 정과·원소병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신축 사월 이십팔일 진찬도감 사찬하오신 발기〉에는 주식인 탕, 온면, 냉면, 창면이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다. 이에 비해 앨리스 루스벨트의 메뉴판에는 주식인 열구자탕과 골동면이 제일 앞에 나와 있다. 아마도 고종 황제와 앨리스 루스벨트의 점심 식사는 시간별로 음식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주식인 열구자탕과 골동면을 먼저 제공하고, 다음에 생선과 고기 요리, 다시 떡과 약식·숙실과, 그리고 마지막에 과일과 정과·원소병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포크가 전주 감영에서 ‘조선식 파스타, 베르미첼리’라고 불렀던 골동면도 고종과 앨리스 루스벨트의 오찬 식탁에 차려졌다. 〈신축 사월 이십팔일 진찬도감 사찬하오신 발기〉에 나오는 냉면의 재료는 메밀국수 30사리, 소 등심 4분의 1, 계란 다섯 개, 후춧가루 한 움큼, 들깨가루 한 움큼, 간장 두 숟가락, 참기름 두 숟가락, 파 세 뿌리 등이다. 만약 고종과 앨리스 루스벨트가 먹었던 골동면의 재료도 이와 같았다면 다음과 같은 요리법을 상상할 수 있다. 간장〔한식간장〕·참기름·후춧가루를 넣고 양념을 만들어 메밀국수에 넣고 버무린 다음 그릇에 담고, 소 등심을 삶아서 만든 편육과 달걀노른자를 얇게 지져 만든 알고명을 위에 올리고, 다시 잘게 썬 파와 들깻가루를 뿌려서 식탁에 내놓았을 것이다.
18세기 이후 메밀국수 사리에 동치미 국물을 부은 물냉면은 평양과 해주에서 유행했다.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때가 되면 서울의 궁궐 근처에 메밀국수를 만들어 판매하는 국숫집이 여러 군데 생겼다. 한여름에 일부 지역에서만 수확하는 밀과 달리, 메밀은 여름에 파종해 2~3개월만 지나면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생육 기간이 짧고 토양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이처럼 메밀이 밀보다 공급이 원활한 까닭에 18세기 후반이 되면 국수의 주재료로 많이 쓰였다.
겨울에 동치미나 배추김치가 있으면 그 국물에 메밀국수의 사리를 말았고, 다른 계절에는 간장·참기름과 후춧가루 혹은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해 비빔냉면을 만들었다. 소고기를 삶은 국물에 메밀국수의 사리를 말아서 따뜻한 온면을 만들기도 했다. 고종이 즐겨 먹었던 골동면을 먹은 앨리스 루스벨트의 반응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4. K-푸드의 잃어버린 100년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후 한반도에는 일본에서 온 ‘화양절충요리(和洋折衷料理)’가 서양 음식으로 소개되어 일본인 손에 의해서 팔렸다. ‘화’는 일본, ‘양’은 서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만들어진 ‘화양절충요리’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었다. 서양식으로 요리했지만, 겉모양은 일본 음식인 것, 일본의 재래 간장 따위로 맛을 냈지만, 서양 겨자, 후추 따위와 같은 서양의 식재료를 가미한 것, 식재료는 일본 것이지만 요리 방식이나 조미료가 서양 것인 것 등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당하지 않았다면 서양식 요리법을 가미한 ‘조선과 서양의 절충요리’가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포크와 앨리스 루스벨트가 맛본 골동면은 파스타와 만나 새로운 음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한국 음식은 서양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는 지금의 시선에서 개항과 대한제국 멸망은 ‘K-푸드의 잃어버린 100년’이라고 부른다.
18세기 이후 메밀국수 사리에 동치미 국물을 부은 물냉면은 평양과 해주에서 유행했다.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때가 되면 서울의 궁궐 근처에 메밀국수를 만들어 판매하는 국숫집이 여러 군데 생겼다. 한여름에 일부 지역에서만 수확하는 밀과 달리, 메밀은 여름에 파종해 2~3개월만 지나면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생육 기간이 짧고 토양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이처럼 메밀이 밀보다 공급이 원활한 까닭에 18세기 후반이 되면 국수의 주재료로 많이 쓰였다.
겨울에 동치미나 배추김치가 있으면 그 국물에 메밀국수의 사리를 말았고, 다른 계절에는 간장·참기름과 후춧가루 혹은 고춧가루 등으로 양념해 비빔냉면을 만들었다. 소고기를 삶은 국물에 메밀국수의 사리를 말아서 따뜻한 온면을 만들기도 했다. 고종이 즐겨 먹었던 골동면을 먹은 앨리스 루스벨트의 반응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4. K-푸드의 잃어버린 100년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후 한반도에는 일본에서 온 ‘화양절충요리(和洋折衷料理)’가 서양 음식으로 소개되어 일본인 손에 의해서 팔렸다. ‘화’는 일본, ‘양’은 서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만들어진 ‘화양절충요리’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었다. 서양식으로 요리했지만, 겉모양은 일본 음식인 것, 일본의 재래 간장 따위로 맛을 냈지만, 서양 겨자, 후추 따위와 같은 서양의 식재료를 가미한 것, 식재료는 일본 것이지만 요리 방식이나 조미료가 서양 것인 것 등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당하지 않았다면 서양식 요리법을 가미한 ‘조선과 서양의 절충요리’가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포크와 앨리스 루스벨트가 맛본 골동면은 파스타와 만나 새로운 음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한국 음식은 서양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는 지금의 시선에서 개항과 대한제국 멸망은 ‘K-푸드의 잃어버린 100년’이라고 부른다.
Infokorea 2024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
<인포코리아>(Infokorea)는 외국의 교과서 개발자와 교사 등 한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위해 개발된 한국 소개 잡지입니다. 외국의 교과서 저자나 편집자들이 교과서 제작에 참고할 수 있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 관련 최신 통계 자료와 특집 원고를 제공합니다. 2024년 호의 주제는 '한국의 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