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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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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역사속에서

모든 시련과 역경을 겪은 한국 역사는 다양한 사건들과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특히 현대의 한국 전쟁을 통해서 모든 나라들이 한국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한국은 전 세계를 놀랍게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만들어낸 세계의 유일무이한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훌륭한 한국의 역사를 외국인 우리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작한 한국 이해 자료 중 '한국 역사(History of Korea) 제10권'을 통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 역사에 대해 연구하거나 개인적으로 지식을 얻고자 할 때는 해당 자료를 통해서 시대별 인물과 사건 또한 전쟁들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 대해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알기 위해서는 외국인들이 한국 역사를 더 쉽게 접근하여 한국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알 수 있는 그러한 역사적 자료들이 개발되면 우리에게 한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생각했던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첫째로 한국의 조선말의 사건 중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보면서 그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몹시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이 난국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지를 알 수 있다. 강화도 삼랑성에서 벌어진 사건 병인양요는 프랑스하고 한국 사이에 발생한 전쟁이다. 그때 한국은 전쟁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무기와 총을 가지지 못한 상태였고 프랑스는 19세기 제조 최신식 총을 가진 나라였다. 그저 1분에 1발 사격한 16세기 제조 구식 조총만 있는 한국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 했을까? 가진 무기를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된다는 생각에 양헌수 장군이 일반 백성들 중에 포수들을 배치 시켰으며 매복 작전으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결국 프랑스가 패배를 하였다. 이 사건은 백성들은 ''내 나라를 내가 지킨다.'' 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싸워 승리한 사건이다. 둘째로, 미국이 광성보 손돌목에서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미국은 조선의 개항을 원했으며 그것은 바로 치외법권처럼 무리한 요구였다. '내 나라 사람들은 조선 땅에서 잘못 하더라도 내 법대로 해라'라는 요구였지만 협상 실패가 되며 무력시위를 한 미군이 조선국 경고용 포격을 실시했다. 미군의 공격을 피할 수 없고 또한 총을 막을 수 있는 방탄조끼용으로 그저 면제배갑만 썼던 조선은 무기와 조치의 부족함으로 결국 패배하게 되었다. 한국의 350여 명 사망자, 미국의 그저 3명 사망자로 전투가 끝났다. 48시간만 걸리는 이 전투는 미국이 48시간 전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두 전쟁을 볼 때 한국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는 끈기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이 전투를 더 쉽게 알기 위해서 특별히 그 현장에 있었던 배경이 되는 전등사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이미지와 자료들을 제공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전등사에 대웅보전이란 곳 안에 있는 기둥들을 볼 때는 신기한 글씨체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참여한 자기 이름과 소원을 쓴 군인들의 글씨다. 그 글씨들은 "우리나라를 지켜 달라"라고 적혀 있는 소원들이다. 이처럼 인상 깊은 배경들에 대해도 알려 주는 것이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 외국인들에게는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한다.

또한, 한국 역사 속에 나오는 인간으로서 또는 아버지로서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무척 흥미진진하면서도 슬픈 이야기인 그 시대의 조선 왕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있다. 영조가 아들을 정말 사랑했고 아들을 천재라고 생각하며 한참 놀아야 할 어린 나이부터 영조가 사도에게 엄격히 교육을 시켰다. 사도가 아빠가 무엇을 물어볼 때 대답하기 전에 자기 입안에 음식을 예의상 뱉고 나서 아빠에게 답해드렸던 그 모습들이 아빠 사랑을 더욱더 받게 하였다. 그런데, 사도가 아빠의 교육 압박 때문에 점차 외로워지고 아빠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도가 공부의 흥미를 잃었고 무예에 관심을 둔 사도와 영조 사이에 갈등이 시작해 아빠가 아들에게 큰 벌을 주게 되었다. 영조가 사도에게 자결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창경궁이었다. 사도를 작은 뒤주에 가두었고 그는 1주일 이상 거기에서 아무것도 못 먹고 아무것도 못 마시면서 지냈다. 결국 사도가 목숨을 잃게 되었다. 원래 영조 아들의 이름은 '이선'이었지만 아들이 죽고 나서 '생각하고 실퍼하다'란 뜻으로 사도란 이름을 지었다. 사실상,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어서 영조가 아들을 직접 죽이지 않았고 자결을 명했다. 그렇게 해서야 사도의 아들 정조가 왕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슬픈 이야기도 있지만 또 한편에는, 영조가 아버지 역할 외에 왕으로서 어떠한 왕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에서 백성들과 항상 소통하고 의견을 물어보고 정책 수립을 했다는 것도 덧붙일 수 있다.

왕의 후계자 사도의 아들 정조의 이야기를 살펴보자면, 정조는 취미로 독서와 일기 쓰는 것을 좋아했고 9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정조의 썼던 일기가 모이며 역사 자료로 일성록이 되었다. 그 자료를 보면 두 달 정도의 부분이 없었다.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의 충격으로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도 해당 한국 역사 자료에 언급해야 할 내용이라고 본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한국 역사를 외국인들이 배우고 나서 창경궁을 방문할 때 그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미리 알고 있게 되면서 그 아름다운 역사가 담겨 있는 곳에 갈 때는 더욱더 실감이 나게 될 것이다.

한국이해자료 History of Korea 제10권을 볼 때는 영조 관련 반포한 제도에 대해 정보가 있다. 예를 들자면, 영조가 반포한 균역법과 군포(세금)에 대해 알려주며 아들과 아버지로서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한편에는, 왕의 의외인 이미지로서 개인적으로, 영조가 백성들과 소통하는 왕이란 것을 흥미진진한 정보라고 보며 그러한 이야기들도 해당 자료에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해 살펴볼 때는 조선의 무기 부족함만 언급이 있고 조선은 어떠한 상황에서 미군을 공격했는지에 대해 상세한 내용은 없다. 덧붙여, 해당 자료에서 한국 역사에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경복궁, 창경궁 등. 궁들에 대해 정보가 포함된다면 상당히 유익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장소들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나 해당 궁에 있는 특별한 모양 또는 문양들의 의미 등. 물론 언급이 되어야 한국문화를 알고 싶은 우리 외국인들에게는 더욱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 역사 자료에 들어가야 할 무척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존재하여 전 세계가 한국 역사에 적혀 있는 이 사건들을 알아야 하는 것이 상당히 영향력이 있다고 본다. 한국 이해 자료인 'History of Korea'에서 백과사전식으로 지식만 얻을 수 있는 자료로 보이기 때문에 전쟁 기간, 전쟁 내용 및 해당 국가들에 관한 정보를 주되 이 사건들이 나타날 때 그 당시에 백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한국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몹시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승리를 했는지 또한, 왕들이 재위 생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어떠한 분들이었는지, 흥미롭고 뜻깊은 이야기들을 관련된 사진들과 포함하면서 한국 역사에 대해 알려 줄 경우에는 외국인들이 이 아름다운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갈수록 더 깊이 알게 될 것으로 판단한다.

[장려상]
Ozyurt Busra Dilara

(활동국가: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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