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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일본 대학의 한국사 연구 및 교육 동향

로쿠탄다 유타카(六反田豊)
도쿄대학, 교수
이 발표에서는 일본의 대학 및 이에 준한 연구・교육 기관에 있어서 지금까지 한국사 연구와 교육이 어떻게 행해져 왔는지를 개관하는 동시에 현재 상황을 소개한다.

일본에서는 20세기 초에 도쿄[東京]와 교토[京都]의 양 제국대학[帝國大學]에 '동양사학[東洋史學]'의 교육・연구 조식이 설치되었음과 동시에 한국사의 연구와 교육도 시작되었다. 일본 통치하의 한반도에서도 경성제국대학[京城 帝國大學]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사 연구에 종사했다. 다만 이러한 1945년 이전의 한국사 연구가 여러가지 문제를 내포해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그때까지의 연구・교육에 대한 반성에 의거하면서 한국사의 연구・교육 체제의 재건이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195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대학 등에 한국사 관련 교원이 취직해 연구・교육에 종사하게 되었으나 60년대까지는 한국사의 전문 교육과정이나 전문 연구 조식을 가지는 대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7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도쿄대학[東京大學]이나 규슈대학[九州大學] 등에 한국사의 연구・교육 거점이 정비되어 기 타 대학에서도 한국사 인접 분야에 관한 조직 신설이 잇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에서는 도쿄대학, 규슈대학 이외에도 한국사 연구자 양성 기능을 맡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대학에서 전임으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교원의 전공분야를 보면 근대사가 압도적으로 많다.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 중에 일본에서 발표된 한국사 관계 논문 수를 봐도 근대사가 가장 많은 성과를 내어 있다. 반대로 중세사, 근세사는 연구자 수도 많지 않고 연구도 그다지 활발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어 있다.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 하나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1. 서론

이 발표의 목적은 일본의 대학( 및 이에 준한 연구·교육 기관)에 있어서 지금까지 한국사 연구와 교육이 어떻게 행해져 왔는지를 개관하는 동시에 현재 상황을 소개하는데 있다.

일본열도와 한반도는 문자 그대로 일의대수[一衣帯水]의 위치 관계에 있고 양자 간에서는 옛날부터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한 지리적 조건이나 역사적 경위에서 일본에서는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역사학 연구와 교육이 대학에서 시작되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한국사 연구와 교육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한국 본국 이외로서는 일본만큼 한국사 연구 및 교육에 관한 실적을 가지는 나라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재 일본 국내에서의 외국사[外國史] 연구 전체에 차지하는 한국사 연구의 비율은 결코 높지 않다. 한국사를 전공할 수 있는 대학 수도 다른 외국사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이 현상이다. 우선 이 점을 확인한 다음에 본편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2. 일본에 있어서의 '동양사학[東洋史學]'의 성립과 한국사 연구

일본에 있어서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역사학 연구・교육 체제가 정비되게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무너지고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성립(1868)된 후이다. 그러나 한국사를 포함한 '동양사학'이 그러한 역사학의 한 분야로 성립되는 것은 그보다 약간 늦어졌다.

1877년에 도쿄대학[東京大學]이 설립되었을 때, 문학부의 제1과[第一科]에 있어서 서양식의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정치학과 함께 역사학이 처음으로 강의되었다. 다만 그것은 유럽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중국사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사는 전통적 한학[漢學]의 일환으로 제2과[第二科]에서 취급되었을 뿐이었다. 그 후, 도쿄대학은 1886년에 제국대학령[帝國大學令]으로 제국대학[帝國大學](1897년 이후에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이하 동대[東 大]라고 생략함)이라 개칭되어 조직도 종래의 학부제에서 분과대학제[分科大學制]로 이행했다. 문학부를 전신으로 하는 문과대학에는 기존의 제1과[第一科]에서 독립해 사학과[史學科]가 설치되었는데 거기서도 유럽사가 강의되었고 동아시아사의 교육은 오로지 한문학과[漢文學科]가 맡았다.

그런 가운데 전통적인 한학 방법에다 서양식 근대 역사학적 방법을 도입해 동아시아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학문 분야로서 구상된 것이 바로 '동양사학[東洋史學]'이다. 이것을 제창한 자는 나카 미치요[那珂通世](なか・みちよ/ 1851-1906)로 밝혀져 있다. 나카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배운 후, 1894년에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 學校] 교수가 되고 96년부터는 동대 문과대학 강사를 겸임했다. 그 동안 그는 일본, 중극, 한국의 고대사나 중국 원나라 역사를 연구했다. 그가 제창한 '동양사학'은 제자인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しらとり・くらきち/1865-1942) 를 거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つだ・そうきち/1873-1961), 이나바 이와키치 [稲葉岩吉](いなば・いわきち/ 1876-1940/호는 군잔[君山]),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いけうち・ひろし/1878-1952) 등으로 인계되게 된다.

그런데, 일본 대학에 '동양사학'을 칭하는 강좌가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뜻밖에도 동대가 아니라 1897년에 두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이하 경대[京大]라고 생략함)이었다. 이 대학에 1906년, 문과 대학이 개설되었을 때에 사학과에 동양사학제1강좌[東洋史學第一講座]가 설치되어 나이토 도라지로[内藤虎次郞] (1866-1934/호는 고난[湖南])가 전임강사로 취임했다(1909년부터 교수). 경대에서는 그 후 1908년에 동양사학제 2강좌[東洋史學第二講座], 1909년에 동양사학제3강좌[東洋史學第三講座]가 잇따라 개설되어 1908년에 도미오카 겐조[富岡謙藏](とみおか・けんぞう/1873-1918)가 전임강사로 착임하고 1909년에는 구와하라 지쓰조[桑原隲藏] (くわはら・じつぞう/1871-1931)가 교수, 하네다 도루[羽田亨](はねだ・とおる/1882- 1955)가 전임강사로 착임했다.

한편 동대에서는 경대에서 4년 늦어진 1910년에 문과대학의 개조를 실시하고 철학과, 사학과, 문학과의 세 학과 체제 아래 각 학과에 몇 개씩 전수학과[專修學科]가 설치되었다. 그 때, 사학과에 설치된 전수학과 중에 '동양사학'이 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당시 동양사학 전수학과는 동양사학제1강좌와 제2강좌로 구성되어 있고 교수로서 시라토리[白鳥], 그리고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瓚次郞](いちむら・さんじろう/1864-1947) 등이 재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20세기 초가 되어 동서 양 제국대학에 잇따라 동양사학 강좌가 개설되었음으로써 일본에 있어서의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동양사학'은 일단 성립된 셈이며 이후 이 조직들이 '동양사학'의 연구・교육의 중추를 맡아 가게 된다. 그러면 그런 가운데서 한국사는 어떻게 취급되었을 것일까?

동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라토리는 일찍 한국사(주로 고대사)의 연구에도 종사하고 있고 수업에서도 한국사를 채택하는 적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동대에서는 그 후1914년에 기존의 동양사학 강좌 이외에 따로 '조선사강좌[朝鮮史講座]'의 개설이 결정되고 동양사강좌의 전임강사였던 이케우치[池内]가 1916년에 거기에 이동해 한국사(고대~조선시대)를 담당했다.

한편, 경대에서 한국사 수업이 시작되는 것은 이마니시 류[今西龍](いまにし・りゅう/1875-1932)가 1913년에 고고학표본취급주임[考古學標本取扱主任]으로 문과대학에 부임해 와서 부터였다. 이마니시는 본무를 맡는 한편 강사로 '조선사[朝鮮史]'를 개강했다. 1916년에 조교수[助敎授]로 승임해 동양사학제3강좌에 소속하게 된 후에도 계속해 고대사를 중심으로 한국사 관계 수업을 맡았다.

동대 조선사강좌는 이케우치가 1936년에 정년퇴관한 후 공석이 되고 그 후 1965년에 이르기까지 후임자가 보충 되지 않고 방치되었다. 경대에서 한국사를 담당했던 이마니시는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문학부[法文學部] 교수로 옮겼으나 그는 이후에도 경대 교수를 겸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1932년에 죽었다. 그 후 경대는 이마니시의 후임자를 채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사 관계 수업은 담당자가 없는 채 자연 소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10년대 초, 우연하게도 일본 국내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된 한국사 연구・교육 거점 두 군데는 이렇게 해서 30년대가 되어 둘 다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 한편으로 1910년의 '한국병합[韓國国併合]'으로 일본 통치하에 들어온 한반도에서는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하 성대[城大]라고 생략함)이 개학하고 같은 해 예과[豫 科], 1926년에 본과인 법문학부와 의학부[醫學部]가 개설되었다. 그 때 법문학부에는 '조선사학제1강좌・제2광좌[朝 鮮史學第一講座・第二講座]'가 설치되었다. 강좌 개설 당초의 담당자는 경대[京大]에서 옮겨온 이마니시[今西](재적 1926-32/제1강좌, 다만 경대와 겸임/고대사)와 조선총독부[朝鮮總総督府]에서 부임해 온 오다 쇼고[小田省吾] (おだ・しょうご/1871-1953/재적 1926-32/제2강조/조선시대사)의 2명이었다.

그 후 1932년에 고고학강좌에서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ふじた・りょうさく/1892-1960)가 교수로 제1강좌에 이적하고(재적 1932-45/고대사), 1933년에는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후술) 수사관[修史官]이었던 스에 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すえまつ・やすかず/1904-92)가 조교수로 제2강좌에 착임했다(재적 1933-45, 1939년부터 교수/고대~조선시대사).

성대에는 조선사학 강좌 이외에도 한국사 인접 분야 내지 관련 분야 교원들이 많이 재적하고 있었다. 예컨대, 본과 개설 당초부터 재적한 인물로서 언어학의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おぐら・しんぺい/1882-1944), 유학사・한문학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たかはし・とおる/1878-1967), 사회학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あきば・たかし/ 1888-1954), 외교사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たぼはし・きよし/1897-1945), 경제학의 시카타 히로시[四方 博](しかた・ひろし/1900-73), 정치학의 오쿠다이라 다케히코[奥平武彦](おくだいら・たけひこ/1900-34) 등이 있다. 게다가 대학 개설 후에 착임한 인물로서 언어학의 고노 로쿠로[河野六郎](こうの・ろくろう/1912-1998), 동양사의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とりやま・きいち/1887-1959), 교육사의 다바나 다메오[田花為爲雄](たば な・ためお/1896-1983), 경제학의 나이토 기치노수케[内藤吉之助](ないとう・きちのすけ/1894-1946)나 스즈키 다케오[鈴木武雄](すずき・たけお/1901-75)등을 들 수가 있다.

일본 통치하의 한반도에서는 성대라는 관학[官學]아카데미즘[academism]의 장소에서 한국사의 연구와 교육이 행해진데다가 조선총독부의 하부조직으로 1925년에 설치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도 한국사의 수사[修 史] 사업이 진행되었다. 수사관[修史官]으로서 이 사업에 종사한 연구자들 중에는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조선시대사),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고대사),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なかむら・ひでたか/1902-84/조선시대사), 스에마쓰 야수카즈[末松保和], 다가와 고조[田川孝三](たがわ・こうぞう/1909-88/조선시대사), 마루가메 긴사쿠[丸亀金作](まるがめ・きんさく/생몰년 미상/고려~조선시대사)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적 기관이 소속 하지 않고 주로 재야 연구자로 활동한 자로서 호소이 하지메[細井肇](ほそい・はじめ/1886-1943), 아오야기 고타 로[青柳綱太郎](あおやぎ・こうたろう/1877-1932), 이마무라 도모[今村鞆](いまむら・とも/1870-1943) 등의 이름을 들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일본 통치하의 한반도에서는 성대와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하면서 재야 연구자를 포함해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사 연구에 종사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라는 상황 아래, 관학 아카데미즘이나 권력 기구에 있어서의 한국사 연구는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고 한국인 연구자가 활약하는 장소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한국인 부재의 역사 연구였던 점은 당연히 반성해야 된다. 연구 내용에 있어서도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것, 나중에 타율성사 관[他律性史觀]이나 정태론[停滯論]으로서 비판 대상이 되는 잘못된 시각에서의 것이었다는 점은 새삼스럽게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제2차대전 후의 한국사 연구・교육체제 재건

1945년 일본은 포츠담[Potsdam] 선언을 수락해 연합국에 대해 무조건 항복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제2차대전은 종결되고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해방되어 거기에 거주해 있던 일본인들은 당시 '내지[内地]'라고 불려 있던 일본 본토에 인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미군 공습으로 주요 도시들이 초토화되고 식량을 비롯한 물자 부족도 심각해서 당분간 생활 재건이 최우선될 수밖에 없었다. 진정되어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한반도에서 인양해 온 연구자들의 상당수는 연구 자료를 현지에 남겨 두었기 때문에 연구를 하고 싶어도 그 수단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차차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전전[戰前]의 연구를 반성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한국사 연구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조금씩이나마 나오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인양해 온 한국사 연구자들도 이윽고 일본 국내에서 취직해 연구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스에마쓰[末松]가 가쿠슈인대학[學習院大學](1947-), 다가와[田川]가 동양문고[東洋文庫](1948-/1965년부터 동대), 나카무라[中村]가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學](1948-/1966년부터 덴리대하[天理大學]), 후지타[藤田]가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1949-/1959년부터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에 각각 취직했다.

인접 분야 내지 관련 분야의 연구자들도 예컨대 다카하시[高橋]는 후쿠오카상과대학[福岡商科大學]을 거쳐 덴리대 학에서, 아키바[秋葉]는 규슈대학[九州大學]을 거쳐 아이치대학[愛知大學]에서, 시카타[四方]는 나고야대학에서, 고노[河野]는 도쿄교육대학 [東京敎育大學]에서, 각각 대학에 취직하고 연구와 교육에 종사했다. 한반도에서 인양해온 이러한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은 '전후[戰後]'의 일본 한국학 연구를 견인하는 하나의 중심축이 되었다.

패전 후의 한국사 연구・교육 체제 재건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덴리대학(이하 천리대[天理大]라고 생략함)의 동향이다. 먼저 이 대학에 설치된 외국어학부[外國語學部] 조선어학과[朝鮮語學科]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전후, 일본에서는 교육개혁이 진행되고 1947년에 교육기본법[敎育基本法]이 공포되었음으로써 고등교육 제도도 일신되어 신제 대학[新制大學]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덴리교[天理敎]의 해외 포교사[布敎師] 육성을 위해 설치되었던 덴리어학전문학교[天理語學專門學校]도 1949년에 신제 대학인 천리대로 다시 태어났다.

덴리어학전문학교에서는 그 전신인 덴리외국어학교[天理外國語學校]가 개교한 1925년부터 조선어학부[朝鮮語 學部]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 학교가 신제 대학이 된 후 1952년에 외국어학부[外國語學部]가 개설되었을 때 거기에 그 조선어학부를 모체로 한 조선문학어학과[朝鮮文學語学科]가 설치되었다. 그 후 조선학과[朝鮮學科]로 이름을 바꾼 이 조직 14 는 1963년에 오오사카외국어대학[大阪外國語大學]에 조선어학과[朝鮮語學科]가 설치되기까지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일본에서 유일한 조직이었고 한국학 연구자나 한국 담당 외교관 등이 많이 배출했다.

천리대 출신의 한국사 연구자들 중에서 특필할 만한 인물이 히라키 마코토[平木實](ひらき・まこと/1938-/ 조선시대사)이다. 히라키는 1962년에 천리대를 졸업한 후 일본에서 한국에 처음에 유학한 학생으로 서울대학교 대학 원에서 배우고 『조선후기 노비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1년에 천리대 전임강사가 되고(그 후 조교수를 거쳐 교수), 2004년까지 재적했다.

다음으로 천리대에 본부가 있는 전국 학회 조직으로서의 조선학회[朝鮮學會] 발족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천리대는 1950년, 전에 성대 교수였던 다카하시[高橋]를 조선학과 교수로 초빙했다. 그리고 다카하시를 비롯한 성대 관계자들과 천리대 및 천리교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조선학회가 발족되었다. 조선학회는 언어, 문학, 역사를 비롯해 한국 문화・사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전국 규모의 한국학 종합 학회이며 한국사 관련 연구자들도 많이 회원이 되었다. 『조선학보[朝鮮學報]』는 이 학회 기관지로 현재 1년에 두 번씩 간행되어 있다.

조선학회가 한국학 전반에 걸친 학회 조직인 데 반해 1959년에 발족된 조선사연구회[朝鮮史硏究會]는 한국사만을 대상으로 한 전국 학회 조직이었다. 스에마쓰[末松], 타나카 나오키치[田中直吉](たなか・なおきち/1907-96/ 현대사), 하타다 다카시[旗田巍](はただ・たかし/1908-94/고려~근대사)들에 의해 발족된 조선사연구회에는 전후에 한국사를 배우기 시작한 젊은 연구자들이나 제일 한국인 연구자들이 많이 참가하고 한국이나 북한의 연구 성과를 흡수하면서 한국사의 자율적 발전 과정을 구명하는 연구 활동을 진행시키는 한편, 재일 한국인 문제나 한반도내의 정치 동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기관지는 『조선사연구회논문집[朝 鮮史硏究會論文集]』이고 현재는 1년에 한 번씩 간행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195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대학 등에 한국사 관련 교원이 취직해 연구 교육에 종사하게 되었다. 천리 대만이기는 하나 한국어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학과도 탄생했다. 60년대에 들어서 국립대학인 오오사카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15 에 조선어학과가 설치됨으로써 대학에 있어서의 한국어 전문교육과정은 두 군데로 늘었다. 조선학회, 조선사연구회와 같은 학회 조직도 새로 발족되고 한국사 연구 체제는 조금씩 재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한국사의 전문 교육과정이나 전문 연구 조식을 가지는 대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사학과나 '동양사학' 전문과정 등에 재적하는 교원의 전공이 우연히 한국사인 경우에만 한국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런 대학은 한정되어 있고 매우 적었다. 구체적으로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가쿠슈인대학, 도쿄도립대학[東京都立大學], 동대 등을 들 수 있을 뿐이다.

메에지대학에서는 아오야마 고료[青山公亮](あおやま・こうりょう/1896-1980/재적1949-65/고려사), 가쿠슈인대학에서는 스에마쓰[末松](재적1949-75), 도쿄도립대학에서는 하타다[旗田](재적1950-72), 동대에서는 다가와[田川](재적1965-69)가 각각 한국사 수업을 담당했으나 아오야마와 하타다는 주로 고려사, 스에마쓰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가와는 주로 조선시대사를 가르쳤다.

4. 한국사 연구・교육 체제의 확충

197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친 시기는 한국사 연구・교육 체제의 확충기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특필할 만한 것은 동대와 규슈대학이 일본에서의 한국사 연구・교육 거점으로 정비된 것이다.

먼저 동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동대에서는 이케우치[池内]가 정년 퇴직(1936)한 후 그가 담당하던 조선사강좌는 공석이 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65년에 다가와[田川]가 전임강사로 부임한 것으 로써 실로 29년만에 한국사 관계 수업이 부활되었다. 다가와가 1969년에 정년 퇴직한 후에는 1971년에 다케다 유키오 [武田幸男](たけだ・ゆきお/1934-2021/고대~조선시대사)가 착임했다(재적 1971-95). 다케다는 당초 주로 고려사 연구에 종사했는데 그 후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로 대상을 바꿨다. 그러나 수업에서는 폭넓은 시대와 분야를 취급하고 그 문하에서는 요시다 미쓰오[吉田光男](よしだ・みつお/1946-/조선시대사), 이노우에 가즈에[井上 和枝](いのうえ・かずえ/1946-/조선시대~근대사), 요시노 마코토[吉野誠](よしのまこと/1948-/근대사), 가수야 겐이치[糟谷憲一](かすや・けんいち/1949-/조선시대~근대사), 야마우치 고이치[山内弘一](やまうち・こ ういち/1952-/조선시대사), 나미키 마사히토[並木真人](なみき・まさひと/1957-2014/근대사), 하야시 유수 케[林雄介](はやし・ゆうすけ/1962-/근대사), 모리히라 마사히코[森平雅彦](もりひら・まさひこ/1972-/고 려~조선시대사) 등 많은 한국사 연구자가 양성되었다.

당초 다케다는 문학부 동양사학전수과정[東洋史學專修課程]에 소속했는데 1993년에 문학부 부속 문화교류연구 시설[文化交流硏究施設]에 조선문화부문[朝鮮文化部門]이 신설되었을 때 거기에 옮기고 동대에 있어서의 한국문화의 연구기반을 충실하는 데 힘을 썼다. 조선문화부문 신설에 즈음해 당시 도쿄외국어대학[東京外國語大學] 조수[助 手]였던 요시다[吉田]가 조교수로 부임했다(재적1993-2015).

동대의 부치연구소[附置硏究所]인 동양문화연구소[東洋文化硏究所]에도 한국사 연구자가 부임했다. 도쿄도립대학에서 옮겨온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みやじま・ひろし/1948-/조선시대~근대사)이다(제저1983-2002). 미야지마는 이 연구소에서 조선토지조사사업이나 조선시대 족보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는 한편 대학원에서 교육에도 종사하고 근대사를 중심으로 젊은 연구자를 많이 육성했다.

다음으로 규슈대학[九州大學](이하 구대[九大]라고 생략함)에서는 1974년 문학부 사학과에 조선사학강좌[朝鮮 史學講座]가 설치되어 조교수로 오사 마사노리[長正統](おさ・まさのり/1933-87/조선시대사)가 착임했다(재적 1974-87, 81년부터 교수). 당초 구대 문학부에서는 그 소재지인 후쿠오카[福岡]가 한반도에 가장 가깝고 옛날부터 교류의 창구가 되어 왔다는 지리적 조건에 의거해 한국 문화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조직으로 사상, 어학・문학, 역사 3 분야로 구성된 조선문화연구시설[朝鮮文化硏究施設] 설치를 지향하고 있었는데 조선사학강좌는 그 중 역사부문만이 교육 조직으로 문부성[文部省] 인가를 받은 것이었다. 국립대학에 있어서의 조선사학강좌 설치는 전후 최초이며 그 점이 무엇보다 특필될 만한 것이다.

나고야대학에서 나카무라[中村]의 지도를 받은 오사는 조선시대의 한일관계사를 전공했으나 수업에서는 『세종실록』이나 『택리지』 등,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들을 교재로 사용했다. 그 문하에서는 아키즈키 노조미[秋月望](あきづき・ のぞみ/1949-/근대사), 로쿠탄다 유타카[六反田豊](ろくたんだ・ゆたか/1962-/조선시개사), 구와노 에이지[桑 野榮治](くわのえいじ/1963-/조선시대사) 등이 배출되었다. 오사가 재직 중에 병으로 죽은 후 1989년에 하마다 고사 쿠[濱田耕策](はまだ・こうさく/1949-/고대사)가 후임으로 부임해 오고(재적 1989-2015), 또한 1996년에는 로쿠 탄다가 조교수로 착임했다(재적 1996-2002). 하마다는 재직 중에 조선사학강좌를 모체로 하는 규슈대학 조선학 연구회 [九州大學朝鮮學硏究會]를 조직해 『연보조선학[年報朝鮮學]』을 창간했는데 현재도 1년에 한 번씩 간행되고 있다.

이와 같이 동대나 구대에 한국사 연구・교육 거점이 정비된 이외에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나 이 시기에는 여러 대학에 한국사를 전공하는 교원의 착임이 눈에 띄게 되었다. 게다가 몇 개 대학에서 한국사 인접 분야에 관한 조직 신설이 이어졌다. 국립대학으로서는 1977년에 도쿄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에 조선어학과[朝鮮語學科]가 신설되고 그 이듬해인 1978년에는 도야마대학[富山大學] 인문학부[人文學部]에도 조선어문학코스[朝鮮語文學course]가 개설되었다. 사립 대학에서도 1989년의 간다외어대학[神田外語大學] 외국어학부 한국어학과[韓國語學科] 신설을 비롯해 90년대에 걸쳐 한국어 전문 교육과정이 몇 개 대학에 이어 신설되게 되었다.

5. 일본 대학에 있어서의 한국사 연구・교육 현황

이상과 같은 경위를 거쳐 일본 대학에 있어서의 한국사 연구・교육 체제는 착실하게 정비되어 왔다. 현재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상황에 있다.

먼저 동대[東大]에서는 2002년에 기존의 문학부 부속 문화교류연구시설 조선문화부문을 확대・개조해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人文社會系硏究科] 한국조선문화연구전공[韓國朝鮮文化硏究專攻]이 설치되었다. 이 조직은 한국의 문화와 사회를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방법을 쓰면서 학제적[學際的]으로 연구・교육하기 위한 대학원 조직이며 이러한 조직의 설치는 일본에서 처음이었다. 창설에 즈음해 한국사 관계로서는 요시다[吉田]가 조선문화부문에서 이적함과 동시에 구대[九大]에서 로쿠탄다[六反田]가 조교수로 옮겨왔는데(2007년부터 준교수[准敎授], 2015년부터 교수), 그 밖에 고고학이나 철학, 언어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을 전공하는 연구자도 재적하고 일본인 학생들 이외에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유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여 대학원 교육을 하고 있다.

이 전공에서는 한국사 관계로서 지금까지 도요시마 유카[豊島悠果](とよしま・ゆか/고려~조선시대사), 쓰지 야마토[辻大和](つじ・やまと/조선시대사), 스즈키 가이[鈴木開](すずき・かい/조선시대사) 등과 같은 박사 학위 취득자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요시다가 퇴직한 후 로쿠탄다만이 한국사를 담당하는 상태가 계속되어 있고 요시다 후임이 아직 보충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로쿠탄다는 대학원 교육뿐만 아니라 문학부 동양사학 전수과정도 담당하고 있다.

동대에서는 그 밖에도 교양학부[敎養學部]에 한국・조선연구코스[韓國・朝鮮硏究コース(course)]가 있고 한국사는 물론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폭넓게 교육하는 체제가 정비되어 있다. 한국사는 쓰키아시 다쓰히코 [月脚達彦](1962-/근대사)와 미쓰이 다카시[三ツ井崇](1974-/근대사)가 맡고 있고 이들 2명이 소속하는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總合文化硏究科] 언어정보과학전공[言語情報科學專攻]에서도 한국사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수적으로는 적으나 대학원 농학・생명과학연구과[農學・生命科學硏究科] 소속인 마쓰모토 다케노리[松本武祝](まとも と・たけのり/1960-/근대사)의 지도하에서 한국 근대 농업경제사를 배우는 대학원생들도 있다.

한편 구대[九大]에서는 2000년에 설치된 한국연구센터[韓國硏究センター(center)]가 구대 전체의 한국학 연구 중핵으로 기능하면서 대학원 중점화[重點化]에 따라 문학부에서 대학원 인문과학연구원[人文科學硏究院]에 옮긴 조선사학강좌에 2003년 모리히라[森平]가 착임하고 하마다[濱田]가 정년 퇴직한 후인 2015년에 교수로 승임했다.

게다가 2017년에는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おの・やすてる/1982-/근대사)가 준교수로 착임함으로써 한국사의 넓은 시대를 수비 범위로 하는 연구・교육체제가 갖추어졌다.

구대에서 한국사를 전공한 대학원생들 중, 하마다 재직 중에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자로서는 하라 도모히로[原智 弘](はら・ともひろ/근대사), 오시카와 노부히사[押川信久](おしかわ・のぶひさ/조선시대사), 가와니시 유야 [川西裕也](かわにし・ゆうや/고려~조선시대사)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사 내지 그것도 포함한 한국 문화 연구에 특화된 연구・교육 체제를 구축한 대학은 동대와 구대뿐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한국사 연구자 양성 기능을 맡는 대학은 몇 게나 있다. 국립대학으로서는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이나 경대, 사립대학으로서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이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등이 그렇다.

히토쓰바시대학에서는 가스야[糟谷]가 사회학부[社會學部] 및 대학원 사회학연구과[社會學硏究科]에서 오랫동안 한국근대사를 담당해 많은 근대사 연구자을 양성했다. 가스야가 정년퇴직한 후 그의 제자이기도 한 후임의 가토 게키[加藤圭木](かとう・けいき/1983-)가 준교수로 계속해서 한국근대사를 맡고 있고 특히 대학원에서는 근대사를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많이 재적하고 있다. 경대에서는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みずのなおき/1950-)가 인문과학연구소[人文科學硏究所]에 소속하면서 문학부 및 대학원 문학연구과[文學硏究科]에서 한국근대사를 담당 했다. 현재에는 같은 인문과학연구소 소속인 야기 다케시[矢木毅](やぎ・たけし/1964-)가 역시 문학부 및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한국중세・근세사를 강의하고 있다.

와세다대학에서는 이성시[李成市](1952-)가 문학부 및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한국고대사를 맡고 있고 그 문하 에서는 하시모토 시게루[橋本繁](はしもと・しげる), 이노우에 나오키[井上直樹](いのうえ・なおき) 등, 일본에서는 많지 않은 한국고대사 연구자가 배출되어 있다. 도시샤대학에서는 사회학부에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いたがき ・りゅうた/1972-), 경제학부에 후쿠오카 마사아키[福岡正章](ふくおか・まさあき/1973-), 글로벌지역문화학 부[グローバル(global)地域文化學部]에 오가와라 히로유키[小川原宏幸](おがわら・ひろゆき/1971-), 대학원 글로벌스터디즈연구과[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global studies)硏究科]에 오오타 오사무[太田修](おおた・おさむ /1963-) 등, 한국근현대사 연구자가 많이 재적하고 있고 이 분야의 연구자 양성 기능을 맡고 있다.

소개할 만한 대학 및 연구자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으나 지수에 한계가 있어서 이만 끝내야 된다. 자금까지 소개한 내용을 포함해 필자가 확인한 사항이기는 하나 2021년 7월 말 시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는 전임 교원(전임강사 이상)이 재적하는 대학과 소속 조직, 교원명을 이 글의 말미에 실린 별표로 정리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반드시 망라적인 것이 아니나 이 별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근대사를 전공하는 대학 교원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즉, 별표에 이름이 보이는 대학 교원 61명 중의 39명(63.4%)이 근대사 전공인 것에 반해 중세・근세사는 13명(21.3%), 고대사는 9 명(14.8%, 그 중 2명은 고고학)이다.

그런데 한국사 연구자들 중에는 전임이 아닌 시간강사로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자도 있다. 당연히 그들은 별표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필자가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도 합치면 일본 대학 에서 한국사 교육에 종사하는 연구자는 아마도 100명을 넘을 것이다. 이 글 모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외국사 연구 자수와 비교하면 극히 적다고 할 수밖에 없으나 그래도 근년에 와서 전임교원은 배치되지 않아도 많은 대학에서 한국사 수업이 행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개 깊다.

또한 21세기를 직전에 앞둔 1999년, 한국사와도 깊은 관련을 가지는 새로운 학회가 발족되었다. 한국・조선문화 연구회[韓國・朝鮮文化硏究會]이다. 이 학회는 문화인류학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한국을 필드[field]로 하는 인문・사회계의 넓은 분야의 연구자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며 한국사 연구자도 적지 않게 가입하고 있다. 기관지로 『한국 조선의 문화와 사회[韓國朝鮮の文化と社會]』를 1년에 한 번씩 간행하고 있다.

6.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사 연구의 추이와 현황

끝으로 이상과 같은 대학에서의 연구 교육 체제하에서 행해져 왔던 일본의 한국사 연구의 추이와 현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표 1]은 1950년부터 2017년까지 일본에서 발표된 한국사 관계 논문 수와 그 추이를 10년 단위로 구분해 정리한 것이다. 이 수치는 조선사연구회가 작성한 '전후 일본에 있어서의 조선사 문헌 목록(데이터 베이스 판)(논문편)[戰後 日本における朝鮮史文獻目錄 (データベース(database)版)(論文篇)]'을 근거로 산출한 것으로, 한국사 전공 연구자의 성과뿐만 아니라 일본사 등 인접 분야를 전공하는 연구자의 성과, 그리고 학술논문 이외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저술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경황의 대략을 파악할 수는 있다.
[표 1] 일본에서 발표된 한국사 관계 논문 수의 추이
구분 1950-59 1960-69 1970-79 1980-89 1990-99 2000-09 2010-17
고고·고대 161 283 623 768 846 1041 899
고려 48 79 64 93 92 185 122
조선 105 212 237 351 580 818 709
근대 83 314 647 823 1231 1926 1707
현대 104 492 560 1007 1310 2200 1327
기타 179 440 557 976 1625 3451 1684
전체 669 1820 2708 4018 5684 9621 6445
우선 이 [표 1]의 '전체' 항목에 주목해 한국사 관계 논문 수의 전반적 추이를 살펴보자. 전후 혼란기인 1950년대 에는 당연히 논문 수는 극히 적고 연구 활동은 전체적으로 저조하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면 논문 수는 단숨에 2.7배로 급증되고 그 후에도 증가 일로에 있었다. 2000년대에는 1950년대의 14.3배나 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전후[戰後] 75 년간에 일본의 한국사 연구가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시대별로는 어떤 특징이 있을 것일까? [표 1]의 '고대・고고' '고려' '조선' '근대'등, 네 항목에 주목하면, 1950년대에는 '고대・고고'가 가장 많고 이어서 '조선' '근대'순서로 '고려'가 가장 적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근대'가 가장 많고 '고대・고고' '조선' '고려' 순서로 되어 있다. [표 2]는 이들 네 항목의 비율을 산출해 정리한 것인데 이 [표 2]에 의하면 1950년대에는 '고대・고고'가 40.5%, '고려'가 12%, '조선'이 26.4%, '근대'가 20.9%였으나 1960년대 이후 '고대・고고'가 서서히 비율을 낮추는 한편으로 '근대'는 현저한 증가 경향을 나타내고 2010년대에는 거의 50% 가까이에 달한다. '고려'는 1950년대에는 12%를 차지했으나 서서히 그 비율을 낮추고 1970년대 이후에는 3-4%대를 맴돌고 있다. '조선'은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20%를 밑돌지만 그 이외에서는 거의 20%대를 유지하고 있다.
[표 2] 일본에서 발표된 한국사 관계 논문의 시대별 비율(%)
구분 1950-59 1960-69 1970-79 1980-89 1990-99 2000-09 2010-17
고고·고대 40.5 31.9 39.7 37.7 30.8 26.2 26.2
고려 12.0 8.9 4.1 4.6 3.3 4.7 3.5
조선 26.4 23.9 15.1 17.2 21.1 20.6 20.6
근대 20.9 35.4 41.2 40.4 44.8 48.5 49.7
이와 같은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사 연구는 근대사가 가장 많은 성과를 내고 있고 이어서 고대사 관계의 연구가 성하게 행해져 왔다. 근대사 성과가 가장 많은 것은 식민지 지배 문제를 포함해 일본 근대사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이 시기의 한국사를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대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며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 문제는 한국 고대사를 빼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사와 고대사 연구에는 일본사 연구자도 많이 관여 하고 있다. 근대사와 고대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선시대사 연구도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 같으나 역시 일본사 연구자에 의한 한일관계사의 성과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을 정면으로 논한 연구는 그다지 많지는 않다. 고려시대사에 대해서는 극소수의 연구자가 연구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일본에서는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대사, 고대사와 비교해 중세사, 근세사 연구는 활발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되어 온 셈이다. 물론 근대사는 한일간에 누어있는 이른바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여전히 중요하나 그것과 못지않게 중세사, 근세사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도 일본과 다른 한국의 전통 문화나 전통 사회에 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으로 역시 경시할 수는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한국사 이해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시대별 언밸런스[unbalance]를 해소한다는 점에서도 향후 중세사, 근세사 연구가 더욱 활발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연구자 수가 적은 고대사도 포함해 대학에서 한국 전근대사를 배울 수 있는 수업이나 교육과정을 늘릴 것이 하나의 과제인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 2021년도 한국학국제학술회의 발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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