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연 사람들

'한문'이라고 하는 공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세계각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언어를 습득하는 일은 어렵지만 재미있는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장서각의 소장자료들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업무를 하고 있는 조원희 선생을 만나보았다


조원희 사진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장서각 세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장서각에 소장된 자료들을 세계에 소개하고, 그 자료들은 바탕으로 국외의 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입니다. 장서각 자료는 한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세계 인류의 공통된 문화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해외에서는 장서각에 있는 자료들은 물론, 장서각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연구 사업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장서각 자료 번역 사업, 한문 워크숍, 그리고 국제학술대회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서각의 세계화를 위해 일하는 군요. 프로그램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조원희

번역 사업은 장서각의 자료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주요 목적입니다. 지금까지 『장서각 명품선』을 비롯하여 장서각에 소장된 주요 자료를 소개하기 위해서 기존에 출판된 장서각의 전시 도록을 주로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2016년 장서각 특별전을 바탕으로 번역 출판한 Hangeul: Voice of Diversity는 2019년 한글날 구글에서 한글 소개 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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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년 째 실시하는 장서각 한문워크숍은 장서각의 자료를 중심으로 영어로 한문 번역을 하는 단기 집중 한문 강독 프로그램입니다. 한국의 여러 기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다른 한문 강좌 프로그램과 달리 장서각 한문 워크숍은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한문 텍스트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장서각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 둘째는 과정 전체(강의, 번역, 토의 등)를 모두 영어로 진행하여 국제성을 강조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립적인 연구 역량을 가진 석사 과정생 이상의 학생들을 섭외하여 차세대 한국학자들을 양성하는데 주력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서각의 국제학술대회는 장서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주제를 국제적인 차원에서 비교 분석하여 한국의 최신 연구 성과를 해외 학자들에게 알리고 동시에 외국의 최신 연구 경향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세계 기록 문화를 주제로 한 “동서양 기록 문화의 과거와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장례 관련 기록을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인의 죽음과 상례”, 조선 왕실의 문화를 비교사적인 측면에서 분석하는 “세계사 속의 왕실 문화를 다시 보다” 등의 주제로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실 수 있다고 들었어요.

사실 2017 여름에 장서각에 오기 전에는 중국에 있는 상해 뉴욕 대학교(NYU Shanghai)에서 포스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에서 2년 반 동안 포스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한 “포스닥(박사 후 연구원)”이 가능했던 것은 6년 동안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이고, 박사 과정 중간에 1년은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보냈습니다. 박사 학위는 칭기스칸과 그의 후예들이 세운 몽골 제국의 종교 정책을 분석하는 논문으로 받았습니다.

조원희

2004년 내몽골 자치구 답사

여러 가지 접해 본 언어와 문자 중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분야는 ‘한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동아시아/중앙아시아 역사 전공자이기는 하지만 학부는 영어문학 전공이고, 고등학교까지도 사실 제가 제일 못 했던 과목은 한문(그리고 수학)이었습니다. 한문을 못 했던 제가 매번 핑계(?)로 들었던 것은 유년시절 3살부터 9살까지 시기를 호주에서 보내면서 한글을 제대로 배우기 전에 영어권 문화에서 자랐던 것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중국어, 일본어, 페르시아어, 아랍어까지 연구 언어에 추가하다보니 차라리 한자는 시간을 오래 두고 공부한 만큼 그나마 제일 익숙한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이름과 한자도 어쩌다보니 제 공부와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이름을 지어주실 때 으뜸 원(元) 그리고 밝을 희(熙)로 지어주셨는데, 전공 연구 대상이 몽골제국이 중국에 세운 왕조인 “원조(元朝)”와 한자가 일치해서 이름 지어주실 때부터 이 연구를 할 운명인가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실은 제가 두 형제 중에 막내인데 성명학에서 보았을 때는 동생에게는 “으뜸”을 뜻하는 원(元)자는 쓰는 게 아니라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중국 친구들을 만나서 이름을 한자로 얘기할 때 “원조(元朝)의 원(元)”이라고 소개하고, 이어서 제 전공이 몽골 제국이라고 하면 다소 놀랍니다. 한국에서는 자기 이름을 한자로 할 때는 훈‧음을 차례로 말하면 보통 아는데 (“으뜸 ‘원’자에 밝을 ‘희’자입니다”) 중국어로는 그게 안 되기 때문에 보통 저는 “송 나라의 조씨”와 “원나라의 원” 그리고 “강희제의 희(宋朝的趙,元朝的元,康熙皇帝的熙)”이라고 보통 소개합니다.


평범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셨네요. 여러나라 중 한국에서 그리고 또 장서각에 근무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조원희

2006년 이란 답사

사실 한국학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제 전공과 조금 거리가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장서각의 세계화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장서각 자료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있는 만큼 한문을 원문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 이를 소개, 번역할 수 있는 영어 등 외국어 능력을 갖춘 사람, 또 팀원들과 행정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한국어가 능숙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한국 사람으로서 미국에서 중국사/중앙아시아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가장 적합한 능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지원하였습니다. 장서각을 위해 이러한 스펙들을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장서각 세계화 사업의 맞춤형 인재가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장서각에 근무하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비록 제가 한국학 전공자가 아니고, 해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서각의 다른 선생님들과 “한문”이라고 하는 공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사실 장서각의 선생님들의 전공 분야(역사학, 고문헌학, 미술학, 종교학, 민속학 등등)는 각자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장된 어떤 자료를 보며 함께 분석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박사 논문을 쓰면서 해석이 정확하지 않았던 한문 자료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자료를 2018년 장서각 내부 발표회에서 선생님들과 같이 강독하면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측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민했던 부분이 풀리면서 해석이 완성되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국제학회에서 발표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특히, 이스라엘에서 공부할 때는 한문을 혼자 보면서 어려웠던 기억이 많았는데, 그러한 답답함이 여기 와서는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여가시간은 무얼 하며 보내시나요?


조원희 사진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디지털”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좋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대의 경계에 걸쳐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학교 입학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선배들이 당구 치러 갈 때 신입생들은 피시방으로 갔던 세대, 무거운 책 대신에 전자책을 더 좋아했던 세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으면 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 파일로 스캔을 하는 등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화를 모두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런데 제 전공 공부와 비교하면 이런 저의 취미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디지털 관련 취미는 일관성이 없고 끊임없이 변하거든요. 어렸을 때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다가, 나중에는 컴팩트하게 갖고 다니는 게임기를 더 좋아했고... 그러다가 점점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보니 직접하는 것보다는 게임 구경 – 이른바 E-스포츠 관람 – 에 더 관심을 가졌고, 그것도 한중연에 온 다음부터는 시간이 없어서 보지도 못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 만큼 디지털 환경과 매체가 급속도로 변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둘째는 제 전공 공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지만 디지털 분야에서는 도저히 남들과 경쟁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직접 게임을 ‘하고 즐기다가’ 이제는 게임하는 것을 ‘보는’ 사람으로 변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을까요?


단기적인 계획으로는 가능하면 빨리 제 이름으로 된 영문 저서를 내고 싶습니다. 제가 훈련을 받았던 미국 역사학계에서는 박사 논문은 저서를 위한 초록이며, 그 초록이 저서로 출판된 경우에만 학계에서 인정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꾸로 한국에서는 저서보다는 개별 논문의 숫자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한국적인 연구 환경과 분위기에 적응을 하다 보니 오랫동안 준비하였던 영문 저서에 손을 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해 안으로는 출판사에 보낼 초고에 좀 더 집중해서 완성할 예정입니다.

장기적으로는 디지털 인문학 연구 분야에 더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저처럼 디지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가령 한중연에서 디지털 인문학 박사를 받은 김바로 박사님과는 과거에 채팅으로 공부 얘기가 아니라 새로 발매된 윈도우 베타판을 실험 삼아 깔아야 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을 열성적으로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저의 취미와 학문적인 관심이 묘하게 만나는 접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 디지털 인문학 연구 분야를 공부할 때 시너지를 더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